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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6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결벽스럽게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단 한 권도 빼먹지 않고 구입하여 지금까지 전부 읽어 온 사람이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6권이 '삼국유사'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 시리즈는 오늘까지 188권 나왔으며, 나는 186권을 읽었는데, 그 중 스무권쯤은 아직 리뷰를 남기지 못했고, 이 책도 어찌하다 보니 리뷰는 미룬채 서재의 한 켠에 자리를 잡아버린 책이던 것을 오늘에야 맘 잡고 후기로 남긴다.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一然, 1206∼1289)이 충렬왕 7년(1281)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로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료가 빈약한 까닭에 황당하고 엉뚱한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 넘쳐나지만 나름대로 근거있는 연대와 날짜의 기록들이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는 책이다.
700년도 넘은 고려시대에 일연이 원본을 번역하여 출간한 이 책은 원본의 순서를 따르되 다만 맨 처음에 수록된 왕력(王曆)을 현대 독자들의 취향에 맞도록 부록의 형식으로 하여 책의 뒤쪽으로 뺐다. 나머지 목차는 원본의 순서에 따르고 있다.
권제1에 기이제일(紀異第一), 권제2에 기이제이(紀異第二), 권제3에 흥법제삼(興法第三)과 탑상제사(塔像第四), 권제4에 의해제오(義解第五), 권제5에 신주제육(神呪第六), 감통제칠(感通第七), 피은제팔(避隱第八), 효선제구(孝善第九)로 구성된 책이다.
기이 제1에는 고조선, 삼한, 부여, 고구려, 통일이전의 신라 등 여러 고대 국가의 유사 36편의 기록이 있다.
기이 제2에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이후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까지의 신라 왕조와 백제, 후백제 및 가락국에 관한 유사 25편이 있다.
흥법 제3에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불교와 고승들의 행정에 관한 7편의 기록이 있다.
탑상 제4에는 역시 불교와 관련된 기록 및 탑과 불상 등에 얽힌 이야기 30편이 수록되어 있다.
의해 제5에는 신라 고승들의 행적과 설화가 14편 수록되어 있다.
신주 제6에는 밀교(密敎)의 이적(異蹟)과 이승(異僧)에 관한 전기 3편이 수록되어 있다.
감통 제7에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感應)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검이나 영이(靈異) 등을 다룬 설화가 10편 수록되어 있다.
피은 제8에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은둔(隱遁)한 일승(逸僧)들의 이적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효선 제9에는 효행과 선행에 관한 기록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 많은 이야기들의 모음이라 개별적으로 편하게 읽을 수도 있지만 완독을 하려하면 지루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 등을 통해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 김훈 선생님은 그야말로 뼈대로만 글을 쓰시는 간결한 우조(羽調)의 명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김훈 선생님이 추천하는 3가지의 책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과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는 충무공과 벽초의 글이 그러하듯 사실주의 문장이라서 더욱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바로 그러한 책이라는 것이다. 난중일기와 임꺽정, 삼국유사... 참으로 대단한 기록들이다.
고려말 원나라의 침략을 받아 50년 동안 한반도의 최남단과 최북단을 여덟번이나 휩쓸고 다니던 그 암울한 전쟁의 기간 동안 왕은 강화도에 숨어 쾌락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는데, 그때 70 먹은 노인(=일연)이 조국의 눈물을 비장한 글로 남겨 쓴 것이 바로 삼국유사라면 말 다하지 않았는가? 남한산성이나 난중일기의 비장함도 바로 그런 상황에 자신의 몸을 맡긴 이순신이나 감정을 이입한 김훈의 기록이기에 더욱 더 감동적이지 않았던가.
지난 겨울에 이 책을 구입하였으니, 읽은지 꽤 되었지만 불필요하게 두꺼워서 들고 다니기가 좀 민망하여 집에서 수시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읽다보면 다들 읽어본듯한 내용이면서도 기억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들도 많았다. 많은 성인들이 그러하듯 이 책이 내가 처음 읽은 삼국유사도 아니었다. 나는 민음사판 삼국유사를 읽던 도중에 구석방의 다른 책장에 보관중인 을유문화사판 삼국유사를 다시 펼쳐보며 분노와 민망함을 감출 수가 수 없었다.
중문학자인 김원중 교수가 사마천의 사기와 정사 삼국지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몇 가지 자료들이 우리의 역사와 연관될 수 밖에 없음을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나름대로 의미있는 삼국유사 번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성과는 을유출판사를 통해 김원중 번역의 '삼국유사'를 출판하기에 이르렀고, TV 프로그램(느낌표)을 통해 추천도서가 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 나도 그 책을 한 권 구입했었다. 어린시절 삼국사기와 함께 삼국유사를 들춰 보기는 했으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보다 어려워서 읽다가 도중에 책을 덮어버린 아쉬운 기억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도전했었던 것이다.
오래 전에 같은 이가 번역한 똑같은 내용의 책을 왜 출판사만 바꿔 마치 다른 책인 냥 재포장해야만 했을까? 을유문화사판은 622쪽이고, 민음사판은 655쪽인데 약간 여유롭게 여백을 많이 줬으며 문장의 조사들만 조금씩 달리 했을뿐 전체 문맥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원문까지 수록했던 을유문화사판과 달리 민음사판은 아예 원문을 누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쪽수가 늘었고, 늘어난 쪽수에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두꺼운 종이에 인쇄를 하여 책의 두께가 무려 1Cm나 두꺼워졌다.
※ 위 사진은 황룡사의 장륙존상에 관한 부분으로 왼쪽은 민세문집166권의 303쪽이고, 오른쪽은 절판된 을유문화사 2002년판 삼국유사 309쪽의 비교이다. 빼곡한 내용의 을유문화사 책과 달리 2008년판 민세문집166권은 원문은 기본으로 누락되어 있고, 여백이 많고 활자가 약간 더 커서 읽기에는 편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격도 두께만큼 비싸졌다. 물가가 올랐으니 6년전에 비해 그 정도 책값이 오른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지만 충분히 얇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 책을 지나치게 두껍고 약하게 제본한 것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되었다. 2002년 연말에 구입한 나의 을유문화사판이 올초에 구입한 민음사판 보다 보존 상태가 좋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책 질이 너무 나쁘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출판인의 양심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현상일 것이다. 민음사 책은 비싸고 쉽게 갈라질만큼 제본이 허술함에도 책값은 오히려 비싸다. 하지만 독자들은 절판된 을유문화사의 질좋은 책을 더 이상 구입할 수 없다. 실용성보다 폼나는 장식용으로 변질되어 가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읽기 편한 책이 아니라 장식하기 좋은 책... 침대가 가구가 아닌 과학이 되어버린 것처럼 책 또한 읽기보다는 장식용이어야 한단 말인가?
P.S.
http://www.aladin.co.kr/shop/book/wletslook.aspx?ISBN=8937425947&curPageNo=2#letsLook
내가 구입한 책이 아니라서 아직 명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의혹하나...
민음사에서는 지난해 여름에 시리즈가 아닌 단행본으로 '삼국유사'가 한 권 더 나왔는데,
역자는 역시 김원중이고 책값은 무려 25,000원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6권의 역자후기가 이 책에서는 역자서문으로 소개되고 있다.
뒷표지에 그렇게 노출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일연은 이 책을 집필할 당시'라는 문장이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일연은'과 같은 식으로 편집에 장난을 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동일한 인물이 번역한 이 두 권의 책에 내용에 차별성이 없는데도 다른 책인냥 비춰진다.
과연 옳은 일일까?
이 25,000원짜리 삼국유사는 혹시 을유문화사의 2002년판의 진정한 포팅은 아닐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독자들은 바보들이고,
출판사는 천재들의 집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