숄로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8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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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읽고 싶으나 아직 읽지 못한 책 중에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이 있다.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준 이 방대한 작품은 뒤로 미루더라도 엄선된 멋진 단편들로 이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은 작은 기쁨이었다.

1905년,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의 회오리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작가 자신의 삶이 수 많은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문학 활동으로 영역을 넓혀가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지인 돈 강 유역을 무대로 다양한 작품을 남기게 된 것이다. 좌익적 혁명파가 붉은 색을 그들의 상징으로 삼아 적위군(赤衛軍)을 조직하고, 그에 맞선 보수적 반혁명파는 백색을 상징으로 삼아 그들의 군대를 백위군(白衛軍)이라 자칭하였는데 그들의 대립하는 시대적 배경에 카자크들이 주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카자크의 전통과 풍습, 내전 중에 겪게 되는 비극 등이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이 작품집은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주로 등장하는 '카자크'란 존재는 15~17세기에 과중한 세금과 압제를 피해 변경(자포로지예, 돈, 쿠반, 시베리아 등)으로 도망친 농노, 그 자손들을 말한다.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돈 강 유역의 카자크들은 특히농사를 지으면서 주로 기병으로 군무에 종사했다고 한다. 초기의 카자크 공동체는 아타만(대장)과 원로뢰를 통해 평등하게 땅을 공동으로 경작 하였으나 18세기 초부터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의 상층부에 귀족의 권한을 부여하여 영토 확장 등에 이용했다. 이후 카자크 사회는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고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적위군과 백위군으로 나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반(半) 카자크인인 숄로호프의 이 작품에는 카자크 사투리도 많아 번역에도 애를 먹었다고 이항재 교수는 말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188권째로 출간 된 '숄로호프 단편선'은 14가지의 내전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로 구성된 책이다. 부드럽게 술술 읽히지는 않고 이것저것 생각하며 읽게 만드는 독특한 문체로 시선을 한 군데 멈추고 생각하게 하기를 반복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작품들인 것 같다. 각 작품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면서도 마치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도 할만큼 일관성 있는 소재와 주제들이 많았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  '인간의 운명'은 1957년에 소개된 작품이며, 나머지 13편은 1926년에 쓰여진 단편집 '돈 강 이야기'에서 엄선한 것들이라고 한다. 맨 처음 소개되는 '인간의 운명'은 전쟁으로 모든 가족을 잃은 한 남자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고백과 그 불행 뒤에 피어난 새로운 희망에 관한 메시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준다.  이어 전쟁 고아가 어린나이에 실력을 인정받는 군인으로 성장하여 승승장구 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이후에 불행하게도 아버지에 의해 발견(?)되는 비극적인 이야기  '배냇점' 등은 꽤나 매력적이다. 첫 작품만 좀 길고 나머지 단편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가볍게 읽을 수 있을만큼 짧은 단편들이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다.

1. 인간의 운명
전쟁으로 모든 가족을 잃은 한 남자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고백을 듣노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거리에서 만난 사랑스런 아들 바뉴시카가 있으니 한 줄기 빛이다. 불행 뒤에 피어난 새로운 희망에 관한 그 메시지를 읽는 것은 가슴 뭉클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고아가 되어버린 두 사람, 미증유의 힘을 가진 전쟁의 광풍에 의해 낯선 지방에 내던져진 두 개의 모래 알······. 앞으로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이 러시아인은 잘 견뎌낼 것이고, 아버지의 어깨 주변에서 자란 이 소년도 어른이 된 후에 모든 것을 인내하고, 조국이 부른다면 자신의 인생길에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었다.'는 화자의 독백이 마음 편한 희망을 준 작품이다.

2. 배냇점
태어날때부터 있는 점 하나가 오래도록 헤어진 이산가족에게는 희망일 것이다. 여기 씩씩한 기병중대장으로 성장한 전쟁고아 니콜카가 있다. 나이는 어리지만 승승장구하는 행운의 배냇점을 가진 젊은이다. 그리고, 그에 맞선 카자크의 수령이 아타만이 있고, 운명처럼 이 두 사람이 맞대결을 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니콜카를 거뜬하게 이긴 아타만은 니콜카의 시신 복사뼈에서 배냇점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결국 오랫만에 만난 아들을 죽인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는 아타만의 이야기는 승자와 패자의 의미에 관한 엄청난 모순을 생각하게 하는 아픔일 뿐이다.

3.목동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도시로 떠나고 싶었던 목동 그리샤는 부당함에 맞서지만 결국 억울하게 죽을 뿐이다. 오빠의 뜻을 이어 받아 도시로 떠나는 여동생 두냐의 불행한 뒷모습에 한 줄기 구슬픈 희망이 오락가락 하고 있다.

4.식량위원회 위원
6년 전 집에서 쫓겨난 보쟈긴은 혁명군 식량위원회 위원이 되어 고향에 나타난다. 6년만에 그가 아버지와 재회한 곳은 혁명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총살을 해야하 처형장이었다. 당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총살시키는 극악의 순간을 상상해 보자. 자기 자신도 얼마 뒤 추격대에 쫒기다가 최후를 맞이한 후 이름모를 새들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비참한 이야기... 과연 그러한 혁명이 옳은 혁명일까?

5.시발로크의 씨 - 기관총사구 시발로크가 반혁명도당의 스파이인 여자와 사이에 낳은 씨. 자신의 씨를 고아원에 맡기는 독백의 과정이 제법 서글프다. 이 작품의 제목을 '시발로크 氏'로 읽을 수도 있으니 주의! ㅡㅡ;;

6.일류하 - 우스꽝스러운 곰사냥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촌놈 일류하(=일리야)가 부모님이 점지해준 시골 처녀를 외면하고 대도시 모스크바로 가서 혁명에 가담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는 한 여자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일념으로 안나와 늘 함께 하며 콤소몰 회원이 된다. 그러나 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는 순간 그녀는 유부녀라고 고백한다. 아, 우리의 일리야는 절망에 빠지고 열병을 앓는다.

7.알료시카의 심장
연속된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비극적으로 살아가는 알료시카와 가족의 이야기는 눈물도 말라버렸을만큼 삭막하다. 엄마도 죽고, 누나도 죽고... 이 말라깽이 소년이 혁명에 가당하게 되는 과정이 슬프고도 진지하게 그려진다. 러시아 청년공산당원이 된 알료시카의 심장 바로 옆에서 수류탄 파편을 꺼내준 것도 그들 동지였다. 알료시카의 심장은 이제 당을 위해 뛰어야 하는가?

8.공화국 혁명군사회의 의장
부락 의장직을 맡은 이 사나이는 반혁명도당에 맞서다가 카자크에 의해 한 쪽 다리를 잃는다. 누가 뭐라해도 그의 의지는 투철하다. 그의 옹고집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9.망아지
트로핌이 속한 기병중대의 말이 백위군과의 전쟁 중에 새끼를 낳았다. 트로핌은 주변의 만류에도 그 망아지에 모든 애정을 쏟는다.  망아지가 돈 강의 물살에 휩쓸려 백위군 쪽으로 떠내려가자 스스로 그 망아지의 목을 겨눠 총으로 쏘아 죽이고 죽은 망아지를 강변으로 끌어 올린다. 잠시 백위군도 잠시 사격을 중지하고 있었지만 이내 총 알 하나가 트로핌의 가슴을 뚫는다.

10.소용돌이
이념의 대립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도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아버지 파호미치와 두 아들(그리시카, 이그나트)은 땅의 균등한 분배를 약속하는 적위군에 가담하고, 또 다른아들 미셴카는 카자크군 소위로 백위군 편에 서 있다.

"아버지는 남의 땅을 갈 권리가 없어요!"
"그에게도 초원을 독점할 권릭가 없다. (중략) 그는 흑토를 차지하고 3년 동안이나 내버려 두고 있어. 이게 무슨 법이냐? "
"아버지 밭을 가는 걸 그만둬요. 안 그러면 아타만에게 명령해 체포하겠어요!"
"넌 네 피붙이들 덕분에 공부하고······ 성장했다. 나쁜 놈 개자식 같으니!"
새파랗게 질린 미하일이 이빨을 갈았다.
"이 늙은이가······."(181쪽)

미셴카(=미하일)에게 포로로 잡힌 아버지와 두 형제는 이송 중에 사살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다. 이 단편집을 읽다보면 백위군이 옳은지 적위군이 옳은지 특별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념의 희생양이 되는 그 가벼운 존재들만 불쌍할 뿐인 것 같다.

11.콜차크, 엉겅퀴에 대하여
인민재판관 앞에 선 한 사나이가 있다. 돈강 유역의 사투리를 남발했을 듯한 원작이 그려질만큼 사투리 번역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혁명 이후 가부장적이던 카자크 가정의 가장 페도트는  여자들의 권리 상승을 인정하지 않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에게 억눌리고 개 별명인 콜차크나 엉겅퀴로 불리는 자신에 대한 한탄이 제법 익살스럽게 그려진다.

12.타인의 피
카자크인 가브릴라 노인 부부는 백위군으로 내전에 참여한 외아들은 실종 되는데, 꿈도 희망도 없는 나날들을 막연하게 적위군을 향한 증오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노부부는 아들 표트르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절망에 빠진다. 그러던 중 부상당한 젊은 적위군 니콜라이를 지극히 간호하여 아들로 삼게 되고, 죽은 아들을 위해 준비했던 외투를 주고 어려서부터 고아이던 니콜라이를 표트르로  부르는 등 새로운 희망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표트르는 새로운 부모님을 뒤로 하고 징발되기 전에 일했던 공장을  재건하기 위해 고향으로 떠난다. 노부부는 다시 한 번 이별의 고통을 느낀다.

13.처자식이 있는 남자
어떤 여자는 생선의 배를 째면서 쓸개를 짓눌러 버리는데, 그런 스프를 먹으면 지독하게 쓰지. 내 인생이 바로 그랬다네. 살면서 쓴맛만 보았으니까. 어떤 때는 참고 또 참다가 이렇게 말하곤 하지. '인생아, 인생아, 언제 너는 더 나빠지느냐?' (240쪽) 화자인 제대병이 만난 사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일곱 명의 어린 자녀들을 살리고 자신도 살기 위해, 그리고 카자크들에게 적위군에 반대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적위군에 가담한 두 아들을 총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 죽였던 아픔이 있다.  사공의 딸은 아버지의 손을 볼 때마다 오빠들을 죽인 그 손이 역겹다고 이야기 한다. 나룻배 사공 미키샤라는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이다.

14.하늘색 초원
폭염이 쏟아지는 돈 강 상류, 화자와 나란히 누운 자하르 노인이 대를 이어 모셨던 영주 토밀린 부자의 변태스럽고 잔인한 추억을 맛깔스럽게 들려 준다. 마부인 자하르를 데리고 마차 바퀴가 부셔질 때까지 구덩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행위, 젊은 자하르의 아내를 탐하다가 숨어서 지켜보던 자하르에게 얻어 터진 이야기, 중풍으로 쓰러져 죽은 토밀린의 뒤를 이어 젊은 장교인 아들 토밀린이 볼셰비키 혁명으로 영지에서 쫓겨난 뒤, 카자크와 함께 돌아와서 자하르 노인의 손자인 세묜 부부를 포함해 32명이 총살하는 구슬픈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 와중에 두 다리가 잘린 채 살아 남은 또 다른 손자 아니케이가 결국 얻어낸 땅에서 살아가는 지금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전쟁의 잔혹함을 이토록 부드럽게 호소하는 단편들을 읽으며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평화만이 길이다.'라던 묵자 사상이었다.
아버지에게 총을 겨누고, 형제에게 총을 겨누고, 아들에게 총을 겨눠야만 했던 돈 강 카자크들의 서글픈 사연들... 결국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이 위대한 작가는 1932년 이후 공산당에 입당하여 현실 정치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미소 냉전이 한참이던 1984년 2월 21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의 배경인 돈강 유역을 구글어쓰로 검색하며 이 책을 읽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최고 작가로 불리는 숄로호프로 인해 그 강줄기에 보다 큰 평화의 혼이 서려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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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마님 2008-10-09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요한 돈강, 20여년 전에 읽은 것이라 내용은 중간중간 필름 마냥 기억나지만 그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지요. 한질을 학과 사무실에 기증했는데, 중간중간 끄적여 놓은 낙서가 후배들 사이에 회자되었던 사연이 있어요. 안중찬님 글을 보니 옛 기억이 나서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어젯밤에도 한 줌 흰머리를 뽑았구만...ㅜ.ㅜ

동탄남자 2008-10-09 16:08   좋아요 0 | URL
고요한 돈강을 더욱 더 읽고 싶게 만드시는군요. 두꺼운 2권짜리로 할까 고심중...
흰머리... 다음에 함께 염색약 사시면 함께 발라요~ ㅡㅡ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