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한 사람들
고미숙과 함께한 <임꺽정> 강연회 행사 후기

 



내가 고미숙 선생님의 '연구공간 수유+너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았다.
이번에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이라는 주제의 임꺽정을 함께 읽기 강연을 듣게 된 것은 즐거움이었다.
역시나 같은 책을 읽어도 시선은 달랐다.
신자유주의가 세상의 유일한 가치가 되어 버린 21세기에서 벽초의 눈으로 바라본 '임꺽정'의 조선 중기 사회는 모든 것이 멋지다.

물론 임꺽정의 시대에는 물질이 풍부하지 못하여 배고 고팠고, 비행기나 자동차도 없어 세계 여행이란 꿈도 못꿨을 시절이지만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지금 시대에 도저히 추구할 수 없는 부럽고 또 부러운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우리가 예전에 20여년 전에 접했던 임꺽정은 혁명가였다.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만난 임꺽정은 'Carpe Diem!'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자유인이었다.
세상의 규범을 알기도 전에 세상을 뒤엎으려고 하는 무식한 사나이의 이야기로 뭔가 불평불만은 있는데, 기존의 정치나 사회질서에 대해 전혀 파악되지 않은 무모함으로 시대와의 불화가 아닌 그 시대 밖에 존재하는 존재들의 이야기로 임꺽정이 읽혀진다는 것이 즐거운 임꺽정 읽기의 근원이었다.

감악산 아래 양주에 살면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처자식을 거느린 임꺽정은 (지금의 관점에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대책없는 청년 백수다. 아버지는 소백정이고 자신은 직업도 없으면서 처자식을 거느렸는데 삶에 대한 별 고민도 하지 않는다니... 이 시대의 관점으로 얼마나 부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만약 양반 가문에 태어 났더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만큼 뛰어난 재능(나무 뿌리를 뽑을만큼 강인한 체력과 배짱 등)을 갖고 태어난 임꺽정은 다행히 천민이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참으로 기운 센 천하장사다. 책하고 담을 쌓은 임꺽정은 검술이나 말타기에는 많은 공을 들여 실력을 쌓지만 왜 그런 실력연마를 하는지 뚜렷한 목적의식은 없는 마음 편안한 인물이다. 주변에 좋은 스승님들이 넘쳐날만큼 스승복과 공부복(글 공부 말고)이 넘친다.

고미숙 선생님은 그렇게 목표의식도 없이 자기 하고픈대로 실력을 쌓는 임꺽정의 정신(벽초의 눈)에 반해서 독서에 심취하셨던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 임꺽정을 위시한 주변인물들의 생활상을 연구하여 조선조 부락공동체의 경제구조를 파악하여, 우리 시대 무직자들의 생존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신 분이시다. 그 즐거운 상상은 전혀 황당무계한 상상만이 아니라 선생님의 깊은 고민 중에 한 가지를 토로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수많은 회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만하지 않은가?

고미숙 선생님께서 사계절출판사의 개정판 '임꺽정'을 읽을 당시에 북경올림픽이 한참이었다는데, 세계 신기록을 목표로 하는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면서 그냥 좋아서 실력을 연마하던 임꺽정의 학습 태도애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달리기와 수영 등은 이해하겠는데, 도대체 역도는 왜 하지? 우리 생활중 도대체 어디에 필요한 거지?'라는 시선... 장미란 선수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공감할만한 시선이며, 그러한 시선이 강의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줬다. 이날의 강의는 웃음이 끊기지 않는 즐거운 임꺽정 읽기였다. 몹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지만 듣기에따라 코미디 생중계같은 바로 그런 시간들이었다.

유복이가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원수를 갚는 장면은 오늘 날의 관점으로 보면 잔인하기 이를데 없지만, 원수의 간을 씹어먹고 나면 마음의 병을 완벽하게 치유한다는 데에 있어서 이해할만한 가치일 수도 있다.

아무 개념없이 결성된 임꺽정 일당이 매번 사사로운 일 하나 때문에 영웅적인 성과를 일으키는 것은 독자들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지만 그들의 행동에 커다란 가치나 혁명가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뻘쭘할만큼 동기는 단순 무식하다. 80년대에 고정관념으로 임꺽정 일당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겠다던가 썩어빠진 위정자들을 응징하겠다는 식의 정치적 명분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벽초 홍명희의 소설에서 읽혀지는 그들 임꺽정 일당은 그저 본능에 충실한 야성적인 남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복종을 거부하고, 관군이 쫓아오면 달아나는 도망자들일 뿐인 것이다. 가치가 있다면 그들만의 우정, 의리, 자존심 정도랄까.

친구들의 면모만 보더라도 기가 차다.
앉은뱅이 시절을 극복하고 표창의 명인으로 거듭난 유복이, 기묘사화 때 풍비박산 난 집안의 봉학이, 눈치밥이 싫어 떠돌던 알바인생 곽오주, 소금장수 길막봉이, 떠돌이 부랑자 배돌석이, 매형이라는 이유로 임꺽정과 어울리게 된 천왕동이 등 대부분의 주역들은 오늘날 관점에서 볼 때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조직의 브레인인 서림이는 늘 조직원들과 갈등이 있다. 청석골 칠두령들은 머리 쓰는 걸 선척적으로 싫어하는 존재들이다 보니 작전은 늘 서림이의 머리에서 나오며, 그들의 전략전술은 늘 도중회의이며 두령인 임꺽정이 승인하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청석골을 떠나 광복산으로 도주하기로 했을 때 천왕동이, 곽오주, 막봉이는 서림이를 흠씬 두들겨 패기도 한다. 이유는 단 하나, 자존심 상하는 작전인 도주를 선택했다는 것. 그렇게 그들은 머리보다 몸만 주먹이 앞서는 조직이라 읽는이가 어찌 즐겁지 않으랴~

후반부에 임꺽정 서울에 잠입하면서 세명의 아내와 한 명의 첩을 데려오는데 열받는 것도 그의 처남인 천왕동이다. 어찌 누나 걱정으로 마음이 편하랴~ 다음 동영상은 임꺽정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 중 일부이다. 특별히 의미가 깊었다기 보다는 고미숙 선생님의 강연 방식을 간단하게 디카로 담아본 것이다. 약간의 광고(불가피한)와 함께 한 번 들어보는 것도 즐겁다.

http://video.mgoon.com/1707341

참으로 걱정되는 인물 임꺽정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즐거움과 조선조 사회의 리얼리티가 아닐까 한다.

지난번 이덕일 선생님 강연에 이어 고미숙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니 임꺽정과 벽초 선생님에 대해 더욱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 무식한 일당들은 날이면 날마다 마음가는대로 즐기고 노는 파티 중독자들로... 그들이 가는 길에 서경덕이 나오고, 황진이가 나오고, 사주쟁이가 나오고, 기묘사화가 나오고, 남명 조식이 나오지만 더 깊이 있는 역사해설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저 민초들의 흥미진진한 무개념 여정이 있을 뿐이다.

광복산으로 도주했다가 다시 청석골로 돌아오고, 다시 자모산성으로 이동한 그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작가인 홍명희 선생님의 월북으로 미완성인채로 끝났다. 미완성 10권의 소설이 이렇게 즐겁게 다시 읽혀질 수 있도록 배려한 사계절출판사와 그 기대에 전혀 어긋남없는 시간을 즐기게 해준 고미숙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임꺽정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그 사상이나 정치적인 철학에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말고, 단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강연 후, 마무리를 해주신 진행자(사계절출판사 직원분)의 깔끔하고 명쾌한 내공도 좋았다.

강연이 끝나고, 가져간 고미숙 선생님 저서에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가 언젠가 다시 찾아뵙게다는 마음에 돌아섰다.
다음 토요일에는 이덕일,고미숙 선생님에 이어 마지막으로 김훈 선생님의 임꺽정 강연이 기다리고 있는데, 앞 선 두 강의가 멋진 명강의였기에 마저 참석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다만 아내와 함께 한계령 시인 정덕수 형을 만나 설악산 등반을 할까말까 계획중이어서 갈등이 갈등에 꼬리를 문다. 어느것이 내게 더 가치를 줄까 정말 고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