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작가와의만남님의 "이덕일, 고미숙, 김훈과 함께하는 <임꺽정> 강연회 초대"
이덕일과 함께한 <임꺽정> 강연회 후기

평소 존경하던 이덕일 선생님의 강연에 다녀왔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실만큼 훌륭한 강의였습니다. 제 아내는 이덕일 선생님을 잘 몰라서 흥미를 갖지 않았기에 아내 대신에 후배를 데려갔었답니다. 후배 녀석이 이 강압적인 선배에 의해 반항도 못하고 괜히 끌려갔다고 생각했던 것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감탄하며 자리를 지켰답니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 말기 3대 천재중에 한 사람이었던 벽초 홍명희 선생님의 이야기로 시작된 강연은 상민 출신이던 이광수, 중인이던 최남선과 달리 양반 가문 출신이던 출신 배경으로 사회주의자가 된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고 운을 뗐습니다. 3.1운동 이후의 일제는 무단통치를 접고 단체설립을 어느 정도 허락해 주는 문화통치 시대로 전환하는데, 이때 코민테른이 파견한 조직책인 박헌영에 의해 설립된 사회주의 단체였던 화요회가 있고, 벽초 선생님은 이 단체 회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이어 신간회를 주도 하다가 1935년 자신해산한 배경에 코민테른의 단순한 사회주의 확장과 달리 일제로부터 민족의 독립에 중요한 가치를 두었던 까닭이 아니겠느냐는 깊이의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덕일 선생님께서 읽은 벽초의 작품 '임꺽정'은 그래서 양반출신 반골로 민중을 지지하고, 사림계열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명종시대의 의적 임꺽정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에 깊이 관여된 성리학과 당파 문제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신 강의였습니다.

남송으로부터 시작된 정치는 사대부들이 해야한다는 논리, 즉 성리학이 고려말에 이 땅에 전파되어 당시 고려의 땅을 완벽하게 장악 소유하고 있던 60~70 개 정도의 사대부 가문의 자기합리화, 그들 고려말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섬기게 된 이야기는 정도전을 위시한 역성혁명파(훈구세력의 뿌리)와 정몽주를 위시한 온건개혁파(사림파의 뿌리)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삼봉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중에 민중의 깊이 있는 지혜를 경험하고부터 농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그러한 사상으로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이 정도 군사로는 못할 것이 없다."는 논리로 혁명을 준비합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은 토지개혁 정국이었으며 1391년 토지의 국유화를 기본으로 하여 공전(公田)을 확대하는 과전법(科田法)과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여 사실상의 새국가 기틀이 됩니다. 결국 1년 뒤인 1392년 조선이 건국되어 조선 초기 양반 관료 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게 됩니다.
이 과정에 정도전이 집필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은 성리학의 전파를 위해 의도된 불교비하의 글이랍니다.

조선 정사에 나오지 않는 태종우(太宗雨;음력5월10일에 내리는 비)의 이야기는 개혁군주를 존중하는 뭉클한 민중의 소리였습니다.
태종이 단행한 피의 숙청이 법위에 그 누구도 군림할 수 없는 민중이 환영할만한 제도였는데... 이를 잘못 읽은 이는 수양대군이었고,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군신관계의 부활로 이끌어 냈으며 특히 사림파(고려말 온건개혁파)의 화려한 부활을 가져옵니다.  이어지던 조선은 성종이 장인이자 훈구파(고려만 역성혁명파)의 대표격인 한명회의 도움으로 집권 하면서, 오히려 사림을 통해 그들을 견제하게 됩니다. 이렇게 강의를 듣다보면 조선사 공부에서 늘 그러하듯 훈구가 좋은지 사림이 좋은지 상당히 헷갈리게 됩니다. 극단의 평가가 불가능한 대립 관계는 정치적인 해석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듯 합니다. ^^;;

성종시대 간신으로 임금 잘못은 없고 하늘의 잘못이라는 발언으로 언관(사림파)들의 눈밖에 난 임사홍은 탄핵되었다가 연산군 시대에 화려한 부활을 한 인물입니다. 조선시대 27명 임금 중에서 왕권을 가장 크게 강화시켰던 인물인 연산군을 다시 평가하자는 현시대 일각의 시각이 있지만 이덕일 선생님은 단호하게 연산군을 비판합니다. 권신들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한 것이 전혀 백성들을 배려한 조치는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연산군이 강화된 왕권을 백성들과 나누었더라면 어쩌면 위대한 왕으로 재평가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연산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자신은 별다른 노력없이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중종입니다. 중종의 부인 신씨는 말머리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신씨는 권신들의 논리에 의해 쫓겨나는데 그 배경에는 반정의 주동자인 박원종이 살해한 신수근의 딸이었기 때문인 이유가 있습니다.
중종은 조광조를 대사헌으로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시행합니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은 민중을 섬기는 모습으로 인기를 얻는 등 성리학적 사회를 만드는 기틀을 만들어 갑니다. 하지만 중종은 오로지 왕권을 강화하려는데 반해 조광조는 훈구파(고려말 역성혁명파)만을 견제하려 하다가 갈등하게 되고, 결국 훈구파의 계략에 의해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1년 뒤 사약으로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사림은 오히려 조광조의 죽음 뒤에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되며 이미지가 상당히 상승하게 됩니다.

사림파의 부활은 명종시대에 시작되며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횡포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양재역 벽서 사건 등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재야의 인물 남명 조식과 제도권의 퇴계 이황 시대가 시작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림파는 정권을 잡은 이후에 민중을 배신하고 상민을 탄압하는 이중성을 보이게 됩니다.

결국 이 시대에 의적 임꺽정이 전국에 이름을 날리게 되는 것이지요.
미완성 작품인 벽초의 '임꺽정'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덕일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입니다.
미완성 작품에 뭔가 암시하는 소년 이순신과 임꺽정의 만남 등은 참으로 아쉬운 면이 많습니다.

한때 율곡 우상화를 위해 10만 양병설 등이 교과서에 실린적도 있지만 어떤 역사 기록에도 그 근거는 없다고 합니다. 누가 역사를 쓰느냐에 따라 기록은 달라진다는 단면이겠지요. 만약 벽초 선생님이 월북하지 않고 이 땅에 남아 있었더라도 온전하게 활동할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명박 정부들어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가 상당히 수정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으셨지만 올곧은 역사학자로서 분명 이덕일 선생님은 그런 부분들에 대한 우려를 하고 계시리라 봅니다. 바 내리는 토요일 오후, 저는 기대 이상의 강의를 듣고 나왔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산에서 몇 번 뵜던 사계절출판사의 강맑실 대표님의 조용한 미소도 오랜만에 접하고 제 기쁨은 배가 되었답니다.
사계절출판사 강맑실 대표님이 벽초 홍명희 선생님의 손자인 홍석중(소설 황진이 작가) 선생님과 평양에서 직접 만나 저작권계약을 체결한 화제의 작품 '임꺽정'의 출판을 기념하고, 또한 홍익대학교 앞거리에서 펼쳐지는 와우북 페스티벌을 기념한 이덕일, 고미숙, 김훈 3인3색 임꺽정 특강의 그 첫번째 시간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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