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방학만큼 일이 많고 번잡했던 적도 별로 없었던 듯 하다. 아버님의 수술과 간병, 나의 어지럼증으로 열흘은 약을 먹고 조심하였고, 설세고 아버님 팔순을 집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치루고, 화영이의 유럽배낭여행을 준비해서 보냈고, 열이가 특별휴가를 나왔다 갔고, 이제 내일이면 미국형님내외분이 미국으로 출국을 하시게 된다. 그리고 월요일 새벽에 나는 개학을 한 학교에 출근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가겠고....."

방학 40일도 안되는 기간동안에 있었던 일이다. 사이버 연수를 하나 듣고있고, 사이버 토익강좌를 들었고, 책을 읽고 살림하고 운동하고 정말 쉴새없이 바쁘고 분주하다. 그중에도 알라딘과 맺은 인연의 싹을 소중히 하면서 공을 들여보고 있다. 역사와 관련된 좀 괜찮은 독서 홈피를 꾸며볼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아직은 다른 사람들의 것들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있지만, 좀더 나은 식견을 위해서는 해야 할 작업임에 틀림없다. 오늘은 사이버 연수의 과제를 했다. 아직 인터넷과 연결시켜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프라인 작업을 하였다. 나모5버전에서 하느라고 - 영어도 듣고 보고 할 일은 많은데 알라딘에 투자한 시간이 많았던 탓에 벌써 자정을 훨씬 넘겼다. 시간을 잘 안배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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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간달프님의 "[김한규] “고구려는 한국.중국과는 별개의 국가였다”"

이성시님의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혹은 "만들어진 고대"를 보면 이와 유사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만들어진 고대는 당시현재의 관점에서 고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정치적 의도가 예리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열린 시각으로 검토하고 우리 것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해보는 자세가 정말 필요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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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만남을 가졌던 2003학년도가 어느새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네. 넉넉치 못한 마음으로 인하여 너희들에게 준 게 너무 적었고 받은 것만 너무 많은 듯 해서 미안함이 앞선다. 하지만 먼저 축하하는 것이 순서겠지? 너희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련히 떠오르는 숱한 기억들, 수업시간 마다 잠자기를 밥먹듯 했던 모습, 늘 잘나오던 식당의 반찬에서 고기가 한끼라도 빠지면 풀만준다고 입을 내밀던 모습, 자율학습 시간에 집단상담하며 먹던 아이스크림, 앞날을 걱정하며 고민했던 여러 생각들, 생각과 실천의 간격으로 인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순간들, 지내놓고 보니 모두가 값지고 아름답구나.

학습반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윤정이와 일서비, 유학길에 올랐을 한없이 맘이 좋은 한선이, 많이 고민하며 간호학원을 다닐 정순이, 혼자서 무궁무진하게 웹서핑을 통해 진로를 찾아내던 준형, 그리고 지도장으로 고생한 석일이, 중장의 많은 친구들 - 귀염둥이 혜진, 씩씩한 형선, 입을 잘 내밀었던 정배, 개과천선형 재훈, 금메달 따기를 빌었던 희창, 말없는 카리스마 왕서비, 열심히 도전하는 재철, 유연한 해피맨 정현, 많은 시합을 휩쓸면서 똘똘 뭉쳐다녔던 태권동자들 - 얌전한 미진, 상냥하고 활발한 달래, 재주많은 수지니, 얌전하게 내면을 바라보던 재영, 씩씩한 보혜 모두가 학교의 보배들이었다. 물론 개성이 강한 태영이, 순한 상일이, 기량이 좋은 힘맨 동우, 잠버릇 험한 요한, 매력적으로 웃던 윤범이도....."   학교 원숭이 막사를 짓느라 고생했던 레슬링의 혁창인 면허를 땄다고 자랑했지? 책읽기를 좋아했던 원석이도 여전하고? 졸업이 정말 어렵다고 실토했던 동욱인 요즘 전화가 없네.고민이 많은 정욱이랑 옆구리 터진 김밥 이영이랑 경남대에서 고생하고 있을 민국이 모두 수고가 많았다. 속도 많이 썩였지만, 너희들의 선량함과 귀여움을 알았기에 한해동안 너희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던 듯 하다. 로울러의 승영이랑 경모도 재치있고 성실하게 고3을 마무리하였지? 상무에 간 동남이, 단거리의 현호, 고집먹통 동우, 그리고 우리반의 든든한 젠더 정연이 좀더 따뜻하고 세심한 눈길을 주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앞서지만, 실업팀으로 대학으로 혹은 군대로 제 갈길을 잘 잡아 갔다고 생각을 한다.

남들은 한가하게 놀고 지낼 이 시기를 동계 강화로 땀흘리며 알차게 엮어나가고 있는 너희들을 생각하며 앞으로 우리가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든 이 인연을 귀히 여기자는 것, 그리고 삶이 어렵거나 힘들때엔 "비호대에서 흘린 땀방울"을 기억하자는 말로 맺을까 한다.

모두 모두 사랑한다. 선량하고 자신에 충실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성숙해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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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화영인 오랫동안 준비하고 웹서핑을 하면서 어떡하면 더 싼 가격으로 유럽여행을 떠날까를 한달간이나 준비하다가, 오늘 드디어 대장정에 나섰다.

     싼 비행기표를 구입하느라 일본으로 날아가서 일박을 하고 아마도 비자가 없기때문에 시내구경도 못하고 호텔에서 나리따 공항으로 가야하겠지만 로마와 파리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을 구경하는 일정을 짰다. 숱한 단편 정보를 얻고자 이곳저곳을 검색하면서 많이 알아보았지만, 그래도 가장 확실하게 읽으면서 준비한 책은 이원복의 먼나라이웃나라와 이미지로 올린 유시민과 함께 읽는 유럽문화이야기였다. 하기야 두 책 모두 제노포브스 가이드와 관련이 있는 책들이긴 하지만, 유서깊은 나라를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밟아보고 오기위해 도둑과 사기꾼들이 들끓는다는 유럽으로 용감하게 떠났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을 찾아 밥을 무제한 먹을수있다는 장점때문에 싼 가격의 숙소를 찾느라 여러날을 헤매고 날마다 변하는 일정을 짜면서 고민하고, 유레일을 끊기위해 어떻게 할까 숱하게 망설이면서 대학일학년 생활의 마무리를 하고자 유럽 첫여행을 시작하였다.

     다녀오면 화영이의 삶의 폭과 깊이는 얼만큼 변화할 수 있을까?

    짐을 줄이겠다고 하면서도 책 두권을 들고서 나간 아들,  경비절감을 부르짖으면서 삼성공항터미널을 제껴두고 5호선 방화역까지 한시간 반을 전철로 타고가서 김포역에서 5천원을 줄여 공항버스를 타겠다는 아들,  멋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머리며 수염 그리고 썬글래스를 맞추는 아들,  바지에 체인을 늘어뜨리고 한껏 멋을 부리며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려는 기대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아들, 이 모든 모습이 화영이의 부분이다. 보름간의 여정을 통해 알뜰 살뜰 잘 살고, 보고 듣는 것마다 삶에 플러스가 되기를......" 엄마는 너를 떠나보내면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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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간달프 > 임동원-홍세화 대담

 

 

 

 

 

‘핵위기’ 어떻게 극복할까  (2003 2 3 한겨레)


아담한 키에 잔잔한 미소가 인상적인 임동원 전 외교안보통일특보를 홍세화 기획위원이 지난달 27일 동교동의 김대중 도서관에서 만났다.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 국정원장, 2번의 통일원 장관을 지낸 임 전특보는 외교안보통일정책에 관한한 김 전 대통령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에서 시작된 남북화해협력의 최일선에 서있었다. 얼마전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 기념강연에서 그는 이 시기를 ‘평화와 통일을 향한 탈냉전의 프로세스’로 불렀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그가 언론과 직접 한 인터뷰는 드물다. 무엇이 지난 15년여 그를 한반도 탈냉전 프로세스의 한 가운데 있게 만들었을까. 다시 불거진 핵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현안 말고도, 고희를 넘긴 ‘임동원’에 대한 궁금증도 이번 대담을 기획했던 이유다.

점심시간까지 합해 4시간여 걸쳐 진행된 이번 대담은 안과 바깥의 ‘특별한’ 만남이라 할 만하다. 이북 출신, 육사 13기, 육사 교수, 외교관 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경력은 ‘주류’이자 ‘인사이더’다. 한세대 정도의 차가 있지만 홍세화 위원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20년간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파리의 택시운전사’다. 한국에 와서도 그는 ‘아웃사이더’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궤적이 다른 만큼 임 전 특보와 홍 위원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 어색함은 홍 위원이 자신의 대학시절로 얘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홍세화=개인적으로 만날 약속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원래 공대에 들어갔다가 외교학과 들어간 것도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아주 순진하고 소박한 생각이었습니다. 근데 들어가보니 한국 외교의 총량이란 것이 미국의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한 사람의 역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공부할 마음도 옅어졌습니다. 그런데 외교일선에 나선 저의 동료나 선후배가 아니라 거꾸로 군인이자 이북 출신으로서 전쟁을 경험했던 임 전 특보가 88년 7·7선언부터 92년 기본합의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등 큰 일을 했다는 게 착잡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습니다.

임동원=제 살아온 인생은 크게 세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제 통치 아래서 소학교 나오고 공산치하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17~18살 때까지가 한 시기죠. 전쟁 중에 단신 월남했는데 오자마자 국민방위군에 들어가게 됐어요. 경상도 시골의 한 과수원 창고에서, 정말 자고 일어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생활이었죠. 하루에 주먹밥 2개 받아 연명했는데, 그해 겨울이 얼마나 추웠던지 하늘이 도와 살아남았죠. 전쟁으로부터 국제냉전이 종식되던 80년대말의 약 40여년에 걸친 냉전시대는 군인으로서 28년, 외교관으로 10여년을 보냈습니다. 사실 미군 부대 식당 창고지기로 2년간 일하면서 부산에 있었는데 군대보다는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혼자 틈틈이 공부했는데, 학비를 낼 형편이 안됐죠. 근데 교회 갔다 오는 길에 우연히 육사생도 모집 포스터를 봤어요. 4년을 먹고 자고 입혀준다니 들어간 거죠. 두번째 제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냉전은 두가지 형태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이념의 대결이고 다른 한 측면은 군비경쟁이죠. 한반도는 양대 진영의 최전선 기지로 냉전에 희생돼 왔다고 할까, 그런 입장에서 벗! 어날 수 없었던 시기고요. 이런 시기 군인, 외교관으로서 어떻게 하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근무했죠. 그 시대의 사람으로 당연한, 명예스런 임무였고, 그런 일을 한 걸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시기가 80년대말 탈냉전 이후 90년대 초 남북협상에 참여해 지금에 이른 시기입니다.

=67년 당시 쓰신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사실 그 책이 임동원이란 사람을 있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책을 써서 몇몇 유명 출판사에 내려 했지만 모두 딱지를 맞았어요. 물어물어 아주 작은 출판사에 갔는데, 당시에 1년에 몇권을 내야 하는 규정이 있었나봐요.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 내주기는 하는데 자비출판을 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때 아내가 친구로부터 돈을 꿔서 1천부를 찍었어요. 들어간 돈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중정)에서 부르는 거에요. 아이고, 걸렸구나. 거기엔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뭐 이런 내용들이 다 인용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중정쪽에서 자기들도 북한이 이런 게릴라 전략으로 나올 거라고 분석하고 있었다며 교재로 당장 5천부를 구입하겠다는 거에요. 그게 인연이 돼 유명해졌고, 중정은 물론이고 경찰쪽으로부터도 강연과 책을 구입하는 요청이 잇따라 3만부 정도를 찍었습니다.

=그런 역할까지 하셨다면 냉전주의적 사고랄까 반공주의 의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가 변한 거죠. 80년대말 국제정세에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속에 체제전환의 과정이 일어났고, 한편에선 군축협상을 통해 군비감축이 시작됐습니다. 냉전의 외딴 섬으로 남아있던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80년대말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군축 탈냉전의 과정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는데 7·7선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만드는데 관여했고 이를 계기로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로, 군사외교 담당으로 나간 게 인연이 됩니다. 제 인생의 세번째 시기인 이 15년은, 한반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탈냉전의 전환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냉전시대엔 그 시대의 역할을 했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저도 변한 겁니다. 그래서 전 예비역이나 이북 출신 모임에 가면 외톨이가 되버립니다. 언젠가 제가 성우회에서 강의를 하는데 누가 “교수님, 옛날엔 그렇게 얘기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두가지 점을 들어 얘기했죠. 세상이 변했는데도 낡은 시대의 사고방식을 고집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기에 적응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또 하나는 90년 남북고위급 회담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우리가 북한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군사전략 이런 걸 할 땐 항상 북한이 우리보다 많은 군사력을 가져 위협이 된다는 거였는데 오히려 저쪽은 북침, 흡수통일의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더라는 거죠. 남북한 국력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지고 세상이 변하는데 왜 우리는 와들와들 떠는가, 너무 과대평가한 겁니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그 자리에서 반박하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물론 6.25때 북은 240대 탱크에 20만 대군을 몰고 파죽지세로 내려왔는데 우린 탱크는 한대도 없고 병력도 10만명이 채 안됐죠. 그때 사람들은 아직도 탱크만 보면 놀랍니다. 거꾸로 북한은 얼마나 공습에 시달렸는지 자꾸 땅굴만 파는 거에요. 큰 쥐를 보고 놀란 새끼 고양이는 자라서도 쥐를 못잡는다는 말을 누가 합디다. 우리의 안보상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자신감을 못 갖고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

=세번째 시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되셨는데 95년 아태평화재단의 사무총장직을 수락하실때 김 전 대통령의 ‘삼고초려’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지금 말씀하신 새로운 흐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가던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요?

=90~93년초까지 열렸던 남북고위급 회담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사람은 저 혼자인 것 같습니다. 70여회 북한과 협상을 했어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일부 차관을 그만두고 연구소에서 정리도 좀 하면서 글도 쓰고 여생을 보내려 했는데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이 사람을 시켜 연락을 해왔어요. 저는 김 대통령을 잘몰랐고 별로 좋아하는 쪽의 사람이라 할 수도 없었죠. 수십년간 그 분이 평화통일 말하면 빨갱이라 하고, 민주화 말하면 과격분자라 하고, 정치한다 하면 거짓말쟁이로 몰아오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런 걸 계속 들어오며 살았고 정치에는 관심 없어서 그냥 그런 분인가 하고 있었죠. 사람 보내서 같이 통일문제를 얘기해보자고 할 때 깜짝 놀랐습니다. 난 아니다 능력도 없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분이 끈질기셔요. 다시 며칠 뒤에 또 사람을 보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또 사양했어요. 그런데 또 다시 요청이 왔어요. 마음이 흔들렸죠. 도대체 김대중이라는 분이 어떤 분인가 관심을 갖게 되고 이전에 쓴 통일론을 읽었는데 상당히 괜찮아요. 그리고 외교안보통일분야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통일문! 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지도자가 어디 있는가 그런 분을 돕는게 나의 사명 아니겠느냐 싶었죠. 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은 셈입니다. 그날을 잊을 수 없죠. 지난 1월23일이었으니까 이제 9년을 넘어 10년째 접어듭니다. 이곳 동교동에서 점심식사 하면서 2시간여동안 얘기를 나눴는데 남북문제, 통일문제, 북한 핵문제가 상당히 쟁점이었는데 탁월한 식견을 갖고 계셨어요. 나 역시 전문가라 자처했는데 감명을 받았죠.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요. 처음 1년간은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이분도 확고한 신념, 고집이 있잖아요. 저도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4~6시간씩 자택에서 토론하기도 하고, 어떨 땐 토요일 호텔에 방을 잡아 잠자면서 토론도 했어요. 처음엔 이견도 많았죠. 살아온 길이 워낙 다르잖아요. 전 그래도 국가의 녹을 쭉 먹고 그런 면에선 편하게 지내온 편이죠. 60년대엔 육사교수 생활, 70년대엔 합동참모본부에서 군사전략, 안보정책을 담당하며 율곡사업(한국군 전력증강사업)의 바탕이 된‘율곡계획’을 만들었고 그 이름도 제가 붙였습니다. 김 대통령의 장점이 뭔가 하면 상당히 학구열이 강하고, 탐구심이 ? ?萬? 자기철학이 있고 비전이 있으니까 잘맞지 않는 경우 대화가 열을 띠 죠. 그럼에도 일단 납득이 되면, 바로 받아들이시죠. 저도 그분 생각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죠. 그런 과정에서 소위 요즘 말로 코드를 맞춰갔습니다. 아태재단에 오자마자 처음 한 것이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을 완성하는 것이었어요. 새시대에 맞는, 김대중의 통일론을 발전적으로 재조명한 거죠. 초안을 만들고 다시 호텔 방을 잡아 김 대통령과 쭉 독회를 했어요. 가만히 들으시다가, 거기는 이렇게 하는게 어떤가라고 의견을 내놓고 그러면 다시 토론을 하고 고치고 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에 구체적이고 정책적인 내용들이 담기도록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뒤에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의 ‘바이블’이 된 거죠. 대북정책은 이미 3년 전부터 준비가 돼 있던 셈입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6·15 공동선언문을 서명할 때 배석한 남쪽 인사는 임 전 특보가 유일했다.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길이 많지만, 한번 트인 둑에서 물줄기는 계속해서 흐를 것이다. 15년 이상을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그의 경험은 비단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교훈일 것이다. ‘첫째, 둘째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 뛰어난 임 전 특보는 손을 꼽아가며 그 경험을 얘기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6·15 공동선언까지 간 걸텐데 지금 되돌아보면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사실 김대중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말씀하셨지만, “이미 통일의 길은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대로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통일되기 이전에 어떤 관계로 남북이 살아갈 것인가, 그 방향을 정한 게 남북기본합의서죠. 우선 남북이 누군가인가부터 따졌어요. 외국에 대해선 주권국가지만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보자,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죠. 이 ‘특수관계’를 5가지 분야로 정리했습니다. 먼저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면서 화해해나가자, 두번째로 다방면에 걸쳐 교류와 협력해나가자, 세번째로 불가침-전쟁하지 말자, 네번째로 전쟁하지 않기 위해서는 군사적 신뢰조치를 취하면서 군축을 해나가자, 다섯번째로 현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바꿔나가자. 이 5가지입니다. 지금 다시 남북이 모여앉아 협상을 해도 그 이상 나올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후속조처를 담은 부속합의서를 3개 만들어 실천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핵문제가 튀어나오자 아까운 시간을 아무 것도 못하고 흘려보내고 말았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미 합의돼 있던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실천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남북정상회담은 바로 그 내용을 ‘실천하자’는 것을 합의한 겁니다. 6·15 선언은 뭐 심오한 내용이 새로 들어간 게 아니라 ‘실천선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의의는 5가지입니다. 우선 긴장을 해소하자, 즉 북한과 남한이 각각 서로에 갖고 있는 공포증을 털어버리자. 두번째는 통일문제를 재검토하자는 겁니다. 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은 남북대표 동수가 만나 민족회의를 열어 우선 연방정부를 만들어 외교 군사는 연방정부하에 두자는 건데 지금 어떻게 즉각 통일이 되겠습니까.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냉전시대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연합제 통일방안은 사회문화경제공동체를 구성해서 상호의존도를 높이고 나중에 통일 이룩하자, 서로 오고가며 돕는 ‘디 팩토 유니피케이션’(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이루고 나중에 법적으로 통일하자는 기능주의적 접근방안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게 좋다는 거에요. 그래서 합의했습니다. 다만 북은 그걸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 부르겠다는 거였죠. 세번째는 교류협력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 신뢰를 조성해나가자, 다져나가자고 합의서! 에 되어 있어요. 그건 제가 강하게 그 표현을 주장해서 넣은 겁니다.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서 보면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안되는 문제가 불신입니다. 조금이라도 서로 믿을 수 있으면 진전이 되겠는데. 그러니까 이 불신을 줄여야 하는데, 실천을 통해서 신뢰를 조금씩 다져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적 교류, 철도 도로가 연결되고 왔다갔다 하면 신뢰가 조성돼요. 지금 사실 남북간 신뢰가 어느정도 쌓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한꺼번에 될 순 없습니다. 네 번째, 중요한 의의는 북한이 드디어 어느정도 안심하고 개방하고 경제개혁에 나서게 됐다는 것입니다. 1년반 전 7·1경제관리개선조처로부터 경제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전엔 북침위협, 흡수통일 공포 때문에 못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움이 많겠지만 그래도 시작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입니다. 우리 문제를 남북이 마주앉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한 겁니다. 외세가 개입하고 하면 점점 어려워지는 겁니다. 자주적으로 한다는 것인데, 핵문제도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만 이건 워낙 국제문제라는 측면이 크기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만 70여차례 북한사람? 欲?만났던 임 전 특보에게 북한의 고위인사들에 대한 인상을 물어봤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2000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을 ‘식견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000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 말대로 가서 만나보니 진짜 지적인(식견있는) 인물이란 걸 느꼈고 남의 말을 경청하고 훌륭한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 실용적 사고를 갖고 있고 결단력이 있더라고 썼습니다. 스웨덴의 고란 페르손 총리도 같은 인상을 말했습니다. 제가 추가하자면 나이드신 분들에 대해 예의 바르고 유머감각이 뛰어납니다. 영화 음악 드라마 등 예술에 상당히 관심있고 조예가 깊어요. 남한의 영화, 드라마, 음악을 너무 잘아는 바람에 제가 당황한 적이 많습니다. 특사로 갔을때 저녁식사하며 5시간 동안 얘기했는데 이분이 <춘향뎐>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를 얘기하는데 제가 봤어야죠. 나중에 돌아오자마자 비디오를 빌려서 봤습니다. 또 <용의 눈물>을 몇회까지 봤는데 그 다음 얘기가 어떻게 됐냐고 묻는데 그것도 대답 못했죠. 통일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북한 바로알기’라는 코너가 있는데 ‘그거 좀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면서 은근히 불만을 얘기하기도 하더군요. 그것까지 다 봤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파트너로 만나왔던 고 김용순 비서에 대해선 기억이 각별할 것 같습니다.

=김용순 비서는 저와 동갑인데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에 대해 참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저하곤 남북정상회담 전부터 만나 한 3년간 카운터 파트로 중요한 막후협상을 하고, 논쟁도 많이 벌였습니다. 그 분은 상당히 뛰어난 능력이 있고 순발력과 유머 감각도 있는 재밌는 분이에요. 정상회담 이후 제가 서울로 초청해 추석때 제주도에 가서 밤새껏 얘기했습니다. 다 밝힐 순 없지만, 이 자리에서 하나 얘기하면 제주도에서 김 비서와 국군포로, 납북어부 이분들을 송환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당시로선 절대로 안된다였죠. 국군포로는 다 송환해 없다는 거고 납북자중 남은 사람은 자기 희망으로 남은 건데 그렇다면 남한에서 석방한 반공포로도 돌려보내라는 입장이었죠. 그래도 생사 확인하고 주소라도 확인하자고 했어요. 인도적 문제인데 이게 안되면 다른 더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푸느냐고 논쟁을 하다가 암암리에 합의를 했습니다. 시작이라도 하자. 이산가족 상봉때 국군포로, 납북자를 몇명이라도 만나게 해주자는 거였습니다. 정부가 왜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를 거론 안하느냐고 비판하는데 얼마나 많이 했는? ?모릅니다. 국군포로나 납북자 문제는 90년 남북고위급회담 때 제가 교류협력분과위원장 지냈는데 그때도 다뤘습니다. 그때부터 쭉 참여했으니 이 문제가 얼마나 풀기 어려운 건지 잘알고 있습니다.

=북쪽과의 협상에 임하는 자세랄까, 어떤 점이 중요한지 들려주십시오.

=북한과 협상을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협상기법을 개발, 발전시켰다고나 할까요. 일반적으로 국가간 협상도 그렇지만 남북협상은 서로 기본입장을 내놓고 이를 고수하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적과 적이 마주앉은 개념으로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거에요. 그러나 이기고 지는 그런 협상은 잘안됩니다. 공동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떤 원칙, 어떤 기준 하에서 하는 게 좋겠는가부터 논의해서 그 원칙 하에서 협상을 하는 ‘원칙협상론’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상당히 많은 진전을 봤습니다. 적과 적이 만나는 게 아니라 문제해결사들끼리 만나자, 문제 해결사 입장에서 해결하자는 거죠.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존심 강한 나라니까 자존심 존중해주면서 말입니다. 상대방을 긁기 시작하면 책상 치고 나가버려요. 지금도 남북이 회담하는 데 있어선 적과 적 입장에서 만나지 말고 문제해결사 입장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몇십번 하다보니, 그쪽도 사람이에요. 특히 남북이 좋은 게 언어가 같고 역사와 문화가 같고 생각이 비슷해요. 그런 공통점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제 ‘지금’을 이야기 할 때가 됐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대북송금특검을 둘러싼 논란, 최근의 사면 논란까지 임 전특보는 그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술술 넘어가던 분위기에서 조금씩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결국 대북송금특검이 있었죠. 그때 1억달러가 넘어갔다고 발표되지 않았습니까. 그때 분명히 대가성이 아니라고 말하셨지만, 어쨌든 그것이 국민들에겐 대가성인 양 받아들여진 부분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문제는 특검이 발표할 때도 대가성이 아니라고 발표했죠, 재판과정에서도 대가성이 아니라고 판명됐습니다. 그때까진 우리가 본격적인 식량지원 안할 때입니다. 기껏해야 옥수수 5만t 정도 보내주고, 민간차원에서만 보내주던 때거든요. 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북한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인도적 차원에서 또 정책적인 차원에서 한 1억달러 상당하는 물자를 제공해줄려고 한 건데, 물자로선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돈으로 준 거지, 정상회담을 돈으로 산 건 아닙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가는데, 비유하자면 못사는 지역의 동생 집에 가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가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선물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통령은 그 내용을 보고 받고 즉각 국민들에게 공개하라, 국민들에게 알려주면 국민들도 좋아할 거라 했습니다. 그런데 참모들이 다 반대했어요. 여소야대의 국내정치도 그렇고 자칫하면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개를 안 하니까 어떻게 돈을 확보하느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아마 현대쪽에다 대신 지! 불 해달라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재판과정에서 새롭게 사실로 밝혀진 게 있습니다. 북한이 당시 현대쪽에 7대 경협사업의 30년간 독점권을 주면서도 통신사업은 제외했는데 현대가 통신사업을 받는 대가로 추가로 1억달러를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대로선 정부의 부탁으로 1억달러를 준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거래를 했던 겁니다. 어떻든간에 국민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누를 끼친 것에 대해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워낙 과거의 총풍이라든지, 남북관계를 국내 전환용으로 이용했던 사례가 있었던지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괜히 오해받는 결과가 돼버렸죠. 그 뒤 김대중 대통령에게 엄청 혼났습니다. 그때 내 말 안 듣고 공개안하고 고집 피우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고.

=특검으로 결국 재판정에도 섰는데 소회라고 할까, 어떠셨습니까. 최근 또 사면문제를 둘러싸고 논란도 있었는데요?

=민주화 투쟁하며 고생한 분들에겐 할 말 없지만 70평생 살아오면서 전 ‘찰’자 붙은 데는 불려간 적이 없습니다. 검찰 경찰은 물론이고 재판 구경도 해본 적 없습니다. 이번에 그런 경험도 해야 한다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더 정신차리라고 말입니다. 법정에서도 진술했지만 현대가 송금하는 것 중 2억달러가 정상회담 전에 가야 하는데 환전이 안된다며 국정원에 긴급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당시 정상회담이 1주일도 안 남았을 때인데 정식 수속을 밟으면 오래 걸린다고 해서 국정원의 고유업무인 ‘공작적’ 차원에서 편의를 제공해주기로 결정한 겁니다. 저는 그것을 왜 재경부장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했느냐는 것으로 기소됐습니다. 그런데 모든 국가간의 행위엔 크게 3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선 외교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게 안되면 전쟁까지 가고, 그렇지 않은 제3의 길이 비밀공작입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나 국정원의 일이라는 게, 국가이익을 위해 외교나 전쟁 아닌 다른 방법 이른바 ‘비밀공작’으로 국가이익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국제인권규약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인정돼 있는! 국제관례입니다. 재경부를 통해서나, 공식적으로 안되는 상황에서 대북송금의 편의를 봐준 겁니다. 그에 대해 사법적 잣대를 들이미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개인비리가 있다면 물론 조사를 해서 처벌해야겠죠. 그러나 고유업무인 공작에 대해선 사법적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법을 적용해야 하는 재판부도 고민은 있었을테고. 그 분들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크게 보면 그런 측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면 문제는 제가 말할 입장이 아니고 그 질문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임 전 특보는 어떻게 볼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이 과연 햇볕정책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말로는 계승한다고 하지만, 이라크 파병을 실질적으론 핵문제나 경협과 연계시키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참여정부가 처음에도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킨다는 말을 했고 요즘엔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처음엔 표면상으론 그렇게 하면서도 내막적으론 이전 정부와의 차별화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까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속 지켜야 하는데, 의의에 대해서도 별로 말하지 않고 그래서 안 지키려는 것 아닌가라는 오해도 살 수 있었겠죠. 그런데 최근 와서는 다시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6.15공동선언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조금 차별화에 치중하는 감이 있었지만 지난 1년을 볼 때 참여정부는 햇볕정책의 계승 발전이라는 입장을 유지해왔고 6·15 공동선언을 지켜나가는 입장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중국 쪽에선가 한국의 햇볕정책을 특유의 4자성어로 표현했다는 걸 봤는데, ‘선이후난(先易後難=쉬운 것부터 풀어나감), 선경후정(先經後政=경제가 정치에 우선), 선민후관(先民後官=민간이 정부보다 먼저), 선공후득(先供後得=먼저주고 받자)’ 등으로 정리해 아주 일목요연하게 그 뜻이 들어왔습니다.

=사실 그건 제가 포용(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을때 중국 전문가들이랑 식사하면서 그들에게 잘 이해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쓴 말입니다. 당시 야당으로부터 퍼주기니 뭐니해서 ‘선공후득’에 대해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근데 그게 사실 영어로 하면 ‘기브 앤 테이크’에요. 테이크 앤 기브라는 영어가 없듯이 ‘주고 받는’ 겁니다. 근데 이를 한자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렵더군요. 중국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선공후득’이란 거에요. 그 말은 중국분들한테 배운 겁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후 첫 남북회담이 98년 베이징 차관급 회의였습니다. 북한이 이 회담에서 비료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잘됐다 이산가족 상봉시키자고 했죠. 상호주의 원칙으로 하자고 한 겁니다. 그런데 회담이 결렬됐습니다. 그뒤로 대화가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선공후득’으로 갔습니다. 먼저 주지만 결국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관계의 발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걸 퍼주기라며 비난했습니다. 퍼주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동안 대북지원을 보면 1년에 국민 1인당 2500원씩 ‘퍼줬습? 求蔑? 통일부에서 여론조사 해서 당신은 1년에 얼마정도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보면 평균 1만원 정도까지는 괜찮다라는 답이 나옵니다.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놓고 홍 위원은 비판의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 전 특보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간을 보면 아쉬움이 배어 있는 걸 느낄 수는 있다.

=제가 어떤 글에서 수구언론들이 왜 북한 ‘퍼주기’는 아우성 치면서 미국의 일방적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 ‘바치기’에 대해선 아무말 안 하는가 한 적 있습니다만…. 지금 노무현 정부는 북핵위기 속에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선 이라크 파병이 필요하다며 연계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전혀 별개문제로 봅니다. 특히 부시 행정부에 대해선 더더욱 파병을 해선 안되는 일입니다.

=(파병문제는 언급하지 않은채) 핵문제는 해결의 방법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미국과 북한 지도자의 해결의지가 있는가, 특히 부시 대통령이 해결할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부시 대통령입니다. 의지만 있으면 내일이라도 곧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외교협상론을 보면 협상을 경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장애물을 높이면 말이 뛰어넘기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협상에서도 문턱을 자꾸 높이면 못 들어오죠. 그래서 협상 결렬의 책임을 상대방에 떠넘깁니다. 그러니까 해결의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의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부시가 왜 북핵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가. 북핵문제를 지렛대로 해서 중국견제를 하기 위해서 또 거기에 미사일방어(엠디)시스템과도 연결시켜 북한이 핵문제를 오히려 해결하지 않는 편이 부시나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의 이익에 맞기 때문 아니냐는 겁니다. 그럴 때에 노무현 정부로선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병행’이란 것도 그 자체로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판단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우리의 땅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고, 한반도의 주인공은 우리입니다. 확실한 주인의식을 갖고 북핵 위기는 한반도의 위기이기에 주인으로서 발언권을 갖고 할말 다 하고 설득할 것은 해야 합니다. 98년 김대중 정부 초기에도 문제는 복잡하고 심각했습니다. 금창리 지하 핵시설 건설 의혹이 제기됐고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미국 강경파들은 북한에 대한 정밀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해 상하 양원을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대북정책을 전면검토하라는 압력을 받아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페리는 94년 당시에 북한을 치려 했던 국방장관 아닙니까. 우리로선 위기에 봉착했죠. 제가 그때 페리 팀을 만나 8번에 걸쳐 협상을 玖庸?설득했습니다. 미국을 설득해서 정책에 보조를 맞춰나가도록 했더니 북한도 큰 무리없이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을 설득해서 그 힘을 바탕으로 미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힘을 모으면 미국은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대미관계에서 참여정부는 역사적 소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시위 등의 국민의 대미의식이 정권출범에 바탕이 됐고, 노 대통령을 뽑은 국민의 뜻엔 분명 미국과 관계가 수직적 종속적인게 아니라 좀더 수평적 관계가 되기를 바랬던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여정부 출범 뒤 오히려 대미 자주의 노선을 보여줘야 하는 역사적 소명이나 바램을 저버린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실기했다고 할까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참여정부가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려 했다는 건 읽을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상대를 만나 어려운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들도 좀더 뒷받침을 많이 해줬어야 하지 않았나는 생각입니다.

=이라크 파병이 결국 부시의 당선을 돕는 행위가 될 수도 있잖습니까. 국내적으로 봤을 때도 수평적 관계를 원했던 국민의 바램을 저버리는 것이 되고. 그런 면에서 보면 정말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 전투병 파병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우리 국민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다음 국회로 넘어갔죠? 우리 국회의원들이 현명한 분들이 많으니까 국민의 뜻을 잘 반영하겠지요.


미군이전 문제 등에 이르자, 홍 위원은 한미관계가 수직적 종속적인 불평등한 관계라며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다.

=요즘 용산기지 문제나 평택으로의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국내의 수구 보수언론들은 주한미군의 성격이 동북아 지역군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라는 데 주목하기 보다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 이런 맥락에서만 보고 있습니다. 결국은 특보 말대로 국민이 얼마만큼 의식이 깨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용산기지 이전문제도 그래요. 벌써 노태우 대통령 때인 10여년 전부터 제기된 문제잖습니까. 이번엔 차원이 다르죠.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전세계에 배치된 미군 기지들을 조정해 지상군 구조를 대폭 바꿔나가는, 즉 한반도에 고착시키는 군이 아니라 긴급대응군형태로 바꿔나가는 개혁과정에 있습니다. 럼스펠드 장관은 ‘군사혁명’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용산기지는, 그게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남쪽으로 이전한다고 해서 안보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수도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건 말이 안됩니다. 이번 기회에 옮겨가야는데 미군 스스로의 기지이전 계획에 우리가 부담을 해야 하느냐, 이건 슬기롭게 해야겠죠. 어느 당 어떤 사람들은 수도권 방위가 어려워진다는 데 그건 넌센스입니다. 자주-동맹 논란은 언론에서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봅니다. 이건 대립 모순되는 개념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개념입니다. 제가 2002년 4월 특사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갑자기 민족공조냐, 외세공조냐 선택하라 해서 김용순 비서와 2시간 동안 논쟁한 적 있습니다. 외세공조와 민족공조는 대립되는 ! 개념 아니다, 한반도 문제는 민족내부이자 국제문제라는 이중적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민족공조를 잘하기 위해서 국제공조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폐쇄적 배타적 자주이어서는 안된다. 열린 자주여야 한다고 말했죠. 옛날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새우 멘탈리티’를 가졌는제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래 사이 낀 건 맞지 않느냐? 살기 위해선 고래는 아니더라도 돌고래 정도는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돌고래는 슬기롭고 덩치도 어느 정도 크고. 북쪽도 일리가 있다며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지정학적 위치를 얘기했는데 반도가 갖고 있는 의미는 해양이면서 대륙이잖습니까.어떻게 보면 분단이란 게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에 의한 분단이고. 두 세력의 찢어짐이 우리 분단으로 나타난다고 볼 때 좀더 거시적으로 해양세력이면서 대륙세력일 수 있는 반도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전 결국 북핵문제도 남북철도라든지, 좀더 가시적으로 ‘선이후난’ 논리로 풀어가면서 냉전의 구조자체를 해체시켜야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선 역시 노무현 정부가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 이건 남북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남북이 풀려야 적대관계가 사라지고. 북한과 미국이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데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북한은 어떻게하든 미국이?해야 살 수 있다 생각하고 있는데 북한 핵문제보다 이게 더 어려운 일입니다. 북핵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면 화생방무기, 재래식 무기, 인권문제 들고 나올 거고. 그 다음에 남북 군사력 너무 많은데 감축해 나가야 하거든요. 적절한 수준으로 군사력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정전협정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꿀 수 있는 겁니다. 이를 당장에 바꾸자고 하는 얘기는 맞지 않습니다. 평화하자고 약속하는 건 이미 기본합의서에서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시동을 걸어논 것입니다. 계속 움직여서 속도를 내도록 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밀어줘야 합니다 .

=그렇게 밀고나가야 하는 게 노무현 정부의 역할이 아니었나 생각하는데 과연 그랬는지 의문입니다. 예컨대 자주국방 얘기하는데 지금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무기 사들이고 첨단장비 갖추는 게 과연 우리 자주국방 능력입니까. 그런데 국방 라인에선 계속 국방비 증액해서 사들이는 데 관심있지, 체제의 문제, 어찌보면 미군에 편입돼 있는, 종속된 편제 속에 있는 구조적인 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부족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외교 안보 국방에서 어떤 마스터플랜이 있는가 의심이 들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 방향으로 70년대 중반부터 노력해왔죠. 율곡사업 등 통해 군 구조도 바꿔나가고. 70년대 중반에 비한다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선 많은 문제가 물론 남아있어요. 참여정부가 말하는 자주국방은 그런 측면이 아닌가 싶은데, 이건 쉽지 않습니다. 혼자 할 수는 없고, 미국과의 관계가 있으니까요.

=사실 북한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습니다. 군비 감축 같은 문제엔 북한이 응하지 않는 한 진전을 보기 어려운데. 그들이 왜 남북 군사당국자 회담에 응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북한은 예전부터 군축을 원하고 있었지요. 작년 6월인가 외무성이 핵억제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재래식 무기는 돈이 많이 들어서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진심일 겁니다.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군비 감축이 이뤄져야 할 겁니다. 다행인 것은 정상회담 이후 군사 실무회담이 계속 되고 있고 국방장관 회담을 한번이라도 해서 출발은 해둔 상태라는 겁니다.

=결국은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 아닙니까. 과연 한국의 파워엘리트에게서 미국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거나 미국과 대등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기대할 수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그런 시각은 커녕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물론이고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종속적인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외교 안보 통일분야의 엘리트들은 미국의 자장 속에서 커온 사람들입니다. 남북간의 긴장이 그들의 힘의 원천이라는 거죠. 미국 네오콘 얘기를 하지만 국내에도 그러한 세력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수구언론이 같이 연동되고요.

=현실적으로 미국은 우리나라에 굉장히 중요한 나라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유일강대국이라서가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라도 러시아, 중국, 일본에 둘러싸여 있는데 멀리 있는 미국이 가운데 있어서 균형 잡아주는 게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우리는 경제적으로도 의존성이 높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적 사고를 갖고 굴욕적인 입장에 서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대등한 입장에서 파트너로서 이 지역의 평화 유지하고 경제적 공동이익 추구하는 관계가 돼야 합니다. 또 탈냉전의 과정에서 우리 지위가 상대적으로 많이 올라간 건 사실입니다. 물론 아직 많은 문제들이 남아았지만. 좀더 자주적인 입장에서 국가와 민족의 입장을 생각하면 미국과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게 가능하다고 봅니다.

임 전 특보를 보면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부드러운 듯 하지만, 자신의 원칙에 대해선 흔들림이 없었다. 고집도 있어 보였다. 15년간 한반도 평화의 길을 이끌어온 힘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과 수많은 토론을 했지만 “물어봐도 내가 워낙 문외한이니까”라며 단 한번도 정치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국정원장으로 재임하면서 2000년 총선을 치뤘다. 그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이 국회정보위에서 “사설탐정까지 고용해서 알아봤는데도 이번 국정원은 정말 총선에 개입을 안했다”라는 말을 했는데 여당의원들은 언짢은 표정이더라며 웃었다.

정리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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