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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1 - 아나톨리아 횡단 ㅣ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씩 수업시간에 교과서 외의 책을 얹어 가지고 다닌다. 어느 날 이 책을 가지고 갔더니만, 한 학생이 "선생님, 혹시 "나는 달린다"의 짝퉁....?"하고 묻는다.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간단히 소개를 해주었다.
채 다 읽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기자출신의 노인(61세)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은퇴후 4년여에 걸쳐 실크로드를 발로 꼭꼭 걸어간 이야기라고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보는 부러움의 하나는 유럽인이기 때문에 전시 하나 다름없었던 아나톨리아 평원(터어키 등지)을 여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이다. 나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길이지만, 가까이에서 이런 꿈을 꾸었던 지인의 소개와 선물로 이책을 읽게 되면서 저자의 느림의 철학을, 그리고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서 솔직하게 대면하는 외로움과 고적함을 행간에서 읽어내면서 나는 지리산 종주의 꿈을 꾸었다.
대부분은 대학생시절이나 청년시절에 실현했던 지리산 종주를 나는 그 시절엔 꿈도 꾸지 못하였었다. 40대를 훌쩍 넘어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들어서야 비로소 여유를 갖고 좋은 등산 용품을 하나하나 구입하면서 꿈을 꿀수 있었다. "겸허함으로"라는 모토를 걸고 2박3일의 산행을 계획하고 70이 넘으신 친정아버지와 동행하였다. 아버지와 단 둘의 여행으로는 처음이었고, 비가 오리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산을 좋아하는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경험자의 충고를 귀담아 듣고 배낭을 꾸리면서 지고가는 짐의 무게가 겁나기도 하였고 초행길의 산등성을 왼종일 걸으면서 숙박에 대한 불안감도 많았지만,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가까이 보이는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나 풀들을 정겹게 바라보고 - 원추리랑 산나리랑 그밖의 이름모를 산풀들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답게도 꽃망울을 달고 있었다 - 비가 개이면 끔찍이도 아름다운 산하를 바라보면서 내 강산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뭉클뭉클 솟아나는 걸 느꼈다. 비를 맞으면서 날씨를 탓하기보다는 덥지 않아서 물을 조금만 준비해도 좋아서 그리고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등등의 좋은 이유를 달고 또 예정보다는 많이 어그러졌지만 무사히 종주를 마친데 대한 자긍심과 기쁨이 절로 넘쳤다. 연로하신중에도 무사히 마치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기쁨도 또한 컸다. 그리고 마지막 밤을 보낸 장터목 산장에서 밤하늘에 쏟아졌던 수많은 별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담아보고 북두칠성 넘어 우뚝 솟아있을 천왕봉을 우러르며 일출을 기대했던 순간과 제석봉을 지나 통천문을 넘어 헉헉대면서도 천왕봉에 올라 여명의 기운을 바라보고 해오름에 탄성을 질렀던 기억들이 어느새 아스라하다. 나는 무슨 선행을 했길래 우중에도 명료하고 장엄한 일출을 바라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을까? 높은 산 정상의 바위 한 쪽을 차지하고는 마치 호수위의 한 섬에 앉은 듯한 착각 속에서 무한한 여유를 느껴본다. 주변에서는 통일의 노래도 들려오고 또 윤도현의 노래도 들려온다. 입술을 들먹이면서 함께 합창하고, "추위쯤이야.... 뭐...." 하면서도 사실은 준비를 잘 해 가지고 간 겨울 옷을 입고 앉아 흐뭇해 하였다. ㅋㅋ
중산리로 내려오면서 연하봉을 식별한 기쁨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영신봉과 촛대봉 그 사이의 세석평전을 그려보았다. 진주까지 택시로 나가서 다시 하동으로, 구례로 또 노고단 아래 성삼재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찾아가지고 나오면서 종주할 때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되새겨 보았다. 나와 만나고 나의 숨은 능력들을 신뢰하고 오로지 두 발과 두 팔로 살아간 건강한 2박 3일의 짧은 시간들이지만 무수히 많은 길들과 열려진 세계를 향한 마음이 실크로드를 연결하고 또 세계 일주도 꿈꿔보는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
일상성에 신선함과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이 기쁨을 나는 또 언제쯤 맛볼 수 있었을까? 함께 종주하려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못가게 되었던 동생 내외는 지리산의 정기라도 쏘인다고 계곡을 찾아들어 발 담그고 노고단까지는 올랐다고 한다. 돌개바람을 만나서 꼼짝도 못하고 주저앉아 있다가 내려왔노라던 동생은 다음번엔 꼭 함께 가자 한다. 물론 좋다고 응수하였고....
동생에게 이 책을 권해야 되겠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지혜가운데 침묵이나 혹은 단순한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롭게 전하는 이야기가 듬뿍 담긴 책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