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가난
엠마뉘엘 수녀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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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부요함이 내 가족이 행복과 풍요를 가져다 줌은 물론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지수로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내 이웃의 빈곤과 어려움을 돌아보기보다는 나의 문제에 국한된 아주 작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나에게 엠마뉘엘 수녀(Soeur Emmanuelle)의 삶과 주장은 경건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유복한 환경속에서 자라던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짚자리에 누워있는 아기예수의 불쌍한 환경에 대해 항의하는 유년기의 심성은 범상치 않음을 보여준다. 평생을 불행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고 교사직을 은퇴한 62세에 새로 선택한 삶은 카이로의 빈민가 넝마주의의 생활이었다.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회복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도운 그녀는 1993년 프랑스로 돌아와 부유한 나라의 불만에 가득찬 사람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다.

  물질적 풍요의 파괴적인 변모 그리고 가난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풍요로움의 패러독스로부터 이 책은 시작된다. "가난은 내가 이 지구상에서 몰아내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싸워온 추한 현실"(20쪽) "자신을 사람들이 쓰고 나서 버리는 쓰레기 같다고 느끼는 소외 - 소외란 사회와 노동의 세계와 가족 바깥에 처한다는 의미로 가난한 이들은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한다. 외톨이다" (50쪽) "아프리카에서는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핍 속에서 근근이 생활하지만, 질투를 느끼지는 않는다. 질투는 오히려 부유한 나라들에서 터져나온다. 소수의 가난한 이들이 부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그런 나라들에서" (50쪽) "말로 하는  항거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란 어렵다."(72쪽) "가난은 궁핍과는 다르다. 궁핍은 기본적인 욕구들의 박탈을 내포한다. 먹을 것과 입을 옷과 주거지가 없어 배고프고 목마르고 추운 상태인 것이다."(133쪽) "나는 여러분들이 행복한 사람의 대열에, 자신들의 정체성이 물질적 정신적 지적 풍요로움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에 토대를 둔 것이라 믿는 자들의 대열에 들어서길 기원한다."(141쪽) "인간에게서 감동적인 면모는 의기양양한 모습이 아니라 나약함과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매달리는 악착스러움을 통해서 싸워나가는 모습" (153쪽) "자신을 해방시킨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타인과 관계 맺는 존재를 해방시키는 것"(168쪽) "우리 모두가 빛과 그늘을 가로질러, 손에 손잡고 형제애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길이다. 그것은 환희다." (234쪽) 듬성듬성 뽑아보아도 내 마음을 채우는 주옥같은 글귀들이 그의 삶속에서 체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풍요로운 가난을 실천했던 작은 경험들이 있다면 그것을 살려보고, 꾸준히 실천해감으로써 나와 네가 함께 행복해 질 수 있는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가난했던 나라에서 살아왔던 우리들은 가난의 퇴치를 위한 여러 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상대적 빈곤으로 박탈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작은 노력들을 꾸준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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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퍼와 백만장자
마크 피셔 지음, 김호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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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청소년 필독서로 올려진 목록으로 필요에 의해서 읽게 된 책이지만 실망이 많이 되었다. 미국에서 인기를 끌수 있었던 이유는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좀 낯설은 시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물론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면 성공이란 꿈을 실현하는 것과 호기심을 가질 만한 스포츠를 접목한 이유로 호기심을 충족시켜가면서 가볍게 읽어내도 부담이 없을 책이다. 한데 청소년 필독서라니... 심했다.

   왜 이런 책을 청소년 필독서로 선정했을까? 골프는 미국의 대중적인 스포츠일망정 우리 정서와 환경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많다. 박세리 선수 이후로 많은 골퍼들이 해외에 나가서 좋은 성적으로 국위선양을 하고 또 어려움에 빠진 국민들에게 유쾌한 소식을 전해 청량제 역할을 함으로써, 골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진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너무 비싼 비용과 또 좁은 국토의 효울적인 이용가치의 측면에서도 많은 골프장의 건설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부자란 그리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누구나 부자가 되길 꿈꾸면서도 부자를 존경하지 않는 패러독스는 공의와 정직이란 이름으로 부자가 만들어진다고 믿지 않기 때문인듯 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골퍼와 백만장자"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성공가치를 대표할 만한 존재는 아닌 것 같다. 더구나 운동치고 멘탈 게임에 의존하지 않는 운동이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의 곳곳에 배어있는 기독교적 관점도 미국적인 이상이 짙게 배여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미국화를 의미할 만큼 미국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다양한 종교들을 생각할 때 보편성을 지닌 범신론적인 가치들을 보여주는 게 포괄적일 것 같다.

  이 책에 표현된 백만장자는 마치 신(god)과 같은 존재이다. 침묵하고 있거나 지옥의 끝에 까지 내려가 만난 절대적인 신성보다는 편안하게 내게 필요한 것들을 현재에 맞춰서 다 제공해 준다. 그것도 필요한 분량만큼만 말이다. 대통령도 기다리게 할 만큼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불치병을 앓고 있는 이름없는 한 소년의 남은 생명을 위해 기꺼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주며 가능성을 가진 좌절한 골퍼에게 그에게 필요한 인생의 본질을 가르쳐주고 적절한 충고와 물질적 도움으로 성공하게 만드는 그는 시간으로부터 자유하고 공간으로부터도 그리고 물론 물질로부터도 매우 자유로우며 스스로 겸손한 자이다.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백만장자 중 이렇게 완벽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반면에 골퍼는 매우 부수적인 자이다. 어린시절 부모로 부터 받은 불신과 처벌이 자신감없는 존재로 만들어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고 무기력하게 사는 레디메이디 인생이다. 그런 그에게 행운이 따르는 것은 백만장자와의 우연한 조우를 통해서이다. 애인의 일편단심, 죽어가는 소년의 최고 골퍼에 대한 신뢰, 그리고 백만장자의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아는 열린 마음 등등, 이렇게 가변성이 많은 골퍼를 통해 백만장자는 무엇을 배웠을까? 인간이란 서로간에 주고 받음이 없이는  원만한 관계맺음이 성공할 수 없을 것인데, 일방적인 받기를 통해 평등한 관계를 설정할 수 없음은 뻔한 것이고 낯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성공한 후에 말과 행동으로 전해주라는 당부는 좀 진부하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은 청소년 필독서로는 안어울린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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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급별 소풍을 진행하게 되면서, 소풍을 준비하는 교사의 마음도 들뜨게 된다. 장소의 선택과 일정의 재단 등이 모두 우리가 자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구상들을 해보았다. 반 학생들을 다 데리고 움직여야 하기때문에 제한은 있지만, 많은 토론거리를 물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대충 때우기식의 행사에서 참여하고 준비하고 또 계획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진행되는 소풍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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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1
홍석중 지음 / 대훈닷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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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름으로 기획한 '2005 가을 나기의 황진이 시리즈'의 마지막 권을 덮다. 세 종류의 소설 책들이 모두 다른 각도를 가지고 있어서 황진이란 16세기의 한 여성을 조명해 보는데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자아을 찾아가는 서경덕의 제자로서의 인간, 황진이를 그린 "나, 황진이"나 여성성을 토대로 황진이의 모든 것을 욕심껏 표현코자 했던 전경린의 소설도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관계없이 말이다. 그런 중에도 홍석중의 "황진이"는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양반집 딸로서의 황진이가 가슴에 품었던 자유분방함과 학문에 대한 관심 그리고 감성이 강한 느낌들이 곳곳에 배여있는 한편 놈이의 눈먼 사랑이 정혼한 윤승지댁에 출생의 비밀을 토해내게 되고 그로 인해 황진사의 딸 진이는 기생으로서의 명월이의 삶을 선택하고 남성중심의 사회에 대한 조악한 조소와 비웃기를 한다. 이로인해 政治性까지 확보하는 상상은 작가가 그려낸 황진이의 이미지 중 하나란 생각이 든다. 

  홍석중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몇 가지 특징을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북한에서 쓰여진 소설이기에 단어의 낯설음이 눈을 어지럽혔다. '지어는'은 '심지어는', ' 리해, 리별, 련정' 등 두음화가 안된 많은 단어들을 '이해, 이별, 연정' 등으로 읽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에서 사용되는 단어들과 한자어, 고사숙어 등의 여러가지 어휘가 감칠 맛을 돋구어 주었다. 어휘풀이를 들여다보는 재미는 보통 소설에서 맛보지 못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혹 개짐의 뜻을 아시나요? 여성이 월경할 때 샅에 차는 물건이라고 1권 323쪽 '어휘풀이'에 적혀있네요. 생리대보다 훨씬 멋지죠???)

둘째, 황진과 황진의 상대가 되었던 양반들을 중심으로 그려지기 쉬운 구도를 가지고 민중들의 삶과 생활을 감칠맛나게 그려낸 점이다. 놈이나 괴똥이 이금이와 할머니 그리고 청루에 몸담고 있던 인물들의 모습이 진솔하게 그려지며 활력을 갖게한다.

세째, 16세기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상상과 관찰을 가져오게 하는 점이다. 사림들의 중앙정계 진출로 인해 훈구세력과의 부단한 갈들이 숨쉬던 정국, 그로 인해 성리학의 이상세계 속에 안주하지 못하고 도교나 다른 종교에 기웃거려 보던 많은 성리학자들의 한숨 - 물론 그 한숨이 후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훨씬 많은 읽을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직은 유교적 틀에 정형화되지 않았기에 고려시대의 자유스럽던 여성들처럼 보여지는 자그마한 몸짓과 자유분방한 생각들 - 현재와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현재적 시각이 많이 배여있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있다. 소설이면서 소설스럽지 않은 느낌, 무엇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 하나하나에 대해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게 하는 것은.... 벽초 홍명희의 손자가 쓴 책이라서 일까, 순전히 내 개인적 취향의 발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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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2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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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장으로 구성된 전경린의 황진이1,2 소설에서는 여성성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온몸으로부터 뿜어내는 고혹적인 향기며 눈에 띄게 예쁘진 않으나 한번 눈길을 주면 도저히 뗄 수 없는 매력과 압도하는 힘에 누구나 눌려버리게 된다는 잦은 표현들은 말로나 가능한 것이리라.  사람의 행위와 사고의 그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나 느낌이 아닌, 생래적인 교태랄까 그런 것을 뿜어내는 사람이 있을까? 원래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진이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당당하게 선택하고 온몸으로 살아낸 완성인으로 그려졌다.

  김탁환의 "나, 황진이"에 이어 시리즈 - 물론 내가 구성한 시리지이지만 - 두번째를 차지한 이 소설은 부재한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가야금이나 시 등의 예술로 찾아가는 어머니와의 화해의 길이 아름답고 자유롭게 묘사되어 있지만, 읽는 나로서는 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길러준 엄마의 정성과 헌신 속에는 아버지와 생모의 사랑을 갈라놓으려는 칼같은 냉정함이 있다든지 친부의 냉정함 속에는 자신의 사랑을 잃게 만든 원인제공자로서의 미움이 새겨진 탓이라든지, 이사종과 한양 3년의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낮추고 시집 식구들에게 기울이는 진의 모습은 헌신과 사랑이라는 설명은 두 여인이 기울이는 같은 사랑과 같은 헌신의 모습을 너무 다르게 평하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모습은 다양하게 비춰질 수 있는 것이고 한 면에서의 단정과 평가는 편협하고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뭇 남성들과의 성적 편린이나 구애의 모습도 진실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또 한편 시와 가무에 능하였던 예술인으로서의 진, 금강산이나 예성강 등을 유람하며 시가로 감흥을 전하고 대자연에 압도되며 자신을 발견해가는 자연합일을 꿈꾸는 자연인의 모습까지 모두 다 체현한 완성인으로 황진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게다가 황진이 전혀 못누렸을 평범한 여성의 삶까지도 제대로 맛본 듯이 그려져 소설을 읽으면서 짜증이 피어올랐다. 우린 삶의 향방을 선택해 가면서 얻을 것을 구하는 댓가로 어느 부분들은 희생하고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수퍼 우먼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니까....

  처음부터 여성성이 표현되었고 기생으로서의 삶을 그리고자 하였다면, 그 부분만을 부각시켜 보는 것이 소설의 빛깔과 향기를 발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다른 부분들은 다른 작가에게 맡기고 말이다. 또한 인물과 인물의 관계지움과 맺음이 어느 한편의 일방적인 끌어당김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일진대, 황진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니 기우뚱거리는 모습이 자주 발견되어졌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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