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레미송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 그런데 어떤 바흐?
상식의 사정

이 노래들 말고 뭐가 또 있냐고요? 우리나라 민요 (아리랑〉이 있죠. 또 중국 전통 노래, 일본 노래도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음악도 그렇고, 실은 유럽에서도 17세기까지만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도레미’로부를 수 없는 수많은 음악들이 있었습니다. 그뿐인가요? 20세기 이후에는 클래식 음악에도 ‘도레미’로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도레미’를 알면 모든 노래를 부를 수있다고요? 천만에요. 우리나라의 판소리도, 세상 곳곳에 있는 민요들도, 심지어 미국의 재즈도 ‘도레미’만으로는 부를수 없습니다. ‘도’와 ‘레’ 사이 어디쯤에 있는 어떤 음들을 사용하기도 하고 그 사이를 흔들거리며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도레미’로 도저히 말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는 묘한떨림이나 꺾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비슷하게 ‘도레미’로 부르고 악보로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순간 그것만의 독특한 향취가 사라져버립니다. 판소리 〈춘향가〉 ‘쑥대머리‘의 한 대목을 서양 악보로 그려 ‘도레미’로 읽어내면쉽게 배우고 익힐 것 같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가진 특징이사라져서 우리 음악과 서양 음악 사이의 어정쩡한 음악이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도레미‘는 우리가 요즘 자주부르는, 서양식으로 만들어진 한정된 시기의 음악만 부를수 있을 뿐입니다. 딱 거기까지인 거죠. 문제는 ‘도레미‘가 그러한 사실을 잘 인정하려들지 않는다는 거죠. "아, 물론 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그건 예외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 지구의 전 시대를 고려한다면 글쎄요, ‘도레미’가 오히려 예외가 아닐까 싶은데요? 체계로서의 ‘도레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합리성, 효율성, 예측가능성, 소통가능성이라는 핑계(혹은 무기)를 들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무지막지하게 공격해 자신의 체계 안에 들어오고야 말도록 손을 보죠. 그래도 말을 안 듣는 경우에는? 그럴 때는 또다시 공격합니다. 틀렸다고, 이상하다고, 그러니 시끄럽다고 말이죠.
그러니 1756년에 태어나 1791년에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가 대체 어떤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말했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자, 여기가 핵심인데요, 사실 모차르트가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사람은 아버지 바흐가 아니라 바로 C. P.E. 바흐였습니다. 서양 고전 음악에 꽤 조예가 있는 분들조차도 이 사람의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이 사람이 아버지 J. S. 바흐보다훨씬 더 유명한 작곡가였습니다. 또 모차르트가 평생 자신의 진정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런던에서 여덟 살때 만나 한동안 레슨을 받았던 J. C. 바흐 였습니다. 아버지J. S. 바흐가 아니었습니다.
당연한 것들을 다시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그것을 우리는 ‘상식‘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통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음악적 상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에게 상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상식은 자연의 법칙이나 당위적 명제가 아닙니다. 상식은어떤 역사적 계기로 인해 ‘그렇게 여겨지게 된 것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상식의 역사성’이라고 할까요? 음악과 관련된 상식의 역사성 말입니다. "원래 음악은 이런 거야" "음악은 원래 이렇게 듣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 ‘원래’가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 원래’에 어떤 사정이있었는지, 어떤 조건과 환경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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