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예외적으로 눈이 밝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불가사의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해답이 이처럼 개명된 소수에게는 빤히 보인다. 세상에 대한 이들의 접근법은 아주 쉽고 간단하면서도 틀림없이 옳다. 이들은 거짓된 복잡성을 꿰뚫어보고 인생의 단순한 진실을 발견한다. 밀드레드는 바로 그런 명석함이라는 축복을 받았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시련과 언제나 허약했던 건강 때문에 그녀는 어린아이나 노인처럼, 존재의 경계선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의 천진난만하면서도 심오한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돈을 준다는 건 힘든 작업이다. 계획과 전략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인도주의는 주는 사람에게도 해가 되고 받는 사람의 버릇도 망친다. 더 자세히. 너그러움은 배은망덕의 어머니다.

아버지는 조반니티의 착한 마음과 그보다 착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시인을 강렬하게 싫어했다. 아버지는 그 이유가, 최악의 문학은 늘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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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국에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마력을 지닌 책이다.


시간은 지속적인 가려움이 되었다.

벤저민은 돈의 뒤틀림에 매료됐다—돈을 뒤틀면, 돈이 자기 꼬리를 억지로 먹도록 만들 수 있었다. 투기의 고립되고도 자족적인 성질은 그의 성격과 잘 맞았고, 경이감의 원천이자 그 자체로 목표였다. 벌어들인 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또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사치란 천박한 부담이었다.

셸던은 관습적이면서도 당혹스러운 자질, 즉 “취향”으로 넘칠 듯했다. 벤저민은 오직 남에게 고용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준 돈을 그런 식으로, 안도감과 자유를 찾아 써버릴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그곳의 침묵에는 침착한 자신감이 있었다. 마치 조금만 노력하면 침묵이 언제나 이길 수 있다는 걸 아는 듯했다.


쓰레기투성이 세상이 망가진 사본을 만들 때 참조한 진품들.


평생 자족적으로 살아왔다는 점을 자랑으로 삼던 사람이 문득 세상을 완전하게 만드는 건 친밀함이라는 걸 깨달으면, 친밀함은 참을 수 없는 짐이 될 수 있다. 축복을 발견하면 그 축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과연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권리가 있는지 의심한다.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의 숭배를 지루하다고 느낄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상대에 대한 갈망이 그들로서는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드러났을지 몰라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모든 의문과 걱정의 무게에 허리가 굽어져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되고, 동반자 관계에서 새로 발견한 기쁨 탓에 이제는 떨쳐버렸다고 생각했던 고독을 더욱 깊이 표현하게 된다.


무력함은 종종 적의로 변하고,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결국 그런 가치 절하를 남 탓으로 돌린다는 걸 알기에


작품과 작가 사이의 거리는 오직 실망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가 일어선 게 아니었다. 지구가 가라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이는 과장된 만화적 태도가 그 태도로 감추고자 했던 감정의 강도를 정확하게 드러낸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과장과 허풍으로 진짜 감정을 숨기기도 하니 말이다.


부정은 언제나 긍정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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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속의 희망이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 요인이니까.

그렇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만 그 모든 지식을 굳이 볼 사람이 누가 있기는 할까. 나는 그것을 자주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무엇 때문일까? 학교란 배워서 우리의 삶과 세상을 개선하고자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세상에는 개선이 필요 없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모든 교육은 그저 우리를 바쁘게 해주는 방법에 불과하다.

정말로 열망할 만한 것이 없는 시대에 삶은 주로 유지 보수였다. 영원한 유지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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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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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에 무슨 말을 얹을 수 있을까.
다만, 노벨문학상에 관한 거라면 할 수 있겠다.
지금껏 한 번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굳이 구매한 적 없고, 어쩌다 읽어도 다 재미없었는데, 이 책은 달랐다. 상을 탔기에 구매했고, 그렇게라도 읽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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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가 아닌 한, 스물두 살에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겨우 알까 말까 하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기교를 싫어하는 슬기로운 사람이요 연민의 철인인 파랭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 그리고 그의 말은 옳다 — 서투르게 쓴 이 책 속에는, 그 뒤에 나온 다른 모든 책들보다 더 진정한 사랑이 담겨 있다.


예술가는 그처럼 저마다 일생을 두고 그의 됨됨이와 그가 말하는 것에 자양을 공급해 주는 단 하나뿐인 샘을 내면 깊은 곳에 지니고 있다. 그 샘이 고갈되면 작품은 말라비틀어지고 쪼개져 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우선 가난이 나에게 불행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빛이 그 부(富)를 그 위에 뿌려 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의 반항들까지도 그 빛으로 환하게 밝아졌었다. 나의 반항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람의 삶이 빛 속에서 향상되도록 하기 위한 반항이었다는 것을 나는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다


빈곤은 나로 하여금 태양 아래서라면, 그리고 역사 속에서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내게는 신과도 같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안 된다. 


샹포르가 말했듯이, 자신의 성격상 감당하지 못할 원칙들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려 들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의 교만함을 인정하고 그것이 보람되게 쓰이도록 애써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자문해 본 결과, 내게도 많은 약점들이 있지만 우리 사이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결점, 뭇 사회와 뭇 주의(主義)의 진정한 암적 존재, 즉 시기심만은 한 번도 그 속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증언할 수 있다.


  그러한 다행스러운 면역(免疫)의 공적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면에서 궁핍하기 짝이 없었지만 거의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았던 나의 집안 식구들 덕택이다. 글도 읽을 줄 모르던 그 가족은, 오직 그 침묵과 신중함과 천부의 질박한 자존심만을 통해서 나에게 가장 드높은 가르침을 주었으며, 그 가르침은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너무나 눈앞의 감각에 열중해 있어서 미처 다른 것을 꿈꿀 틈이 없었다. 지금도 나는 파리에서 엄청나게 부유한 삶을 목도할 때면, 거기서 내가 느끼게 되는 격원감에는 일말의 동정심이 깃들어 있다.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많이 있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후의 불공평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그러한 불공평의 수혜자였다. 열혈 박애주의자가 이 글을 읽고 퍼부어 대는 비난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내가 노동자들은 부유하고 부르주아는 가난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더 오랫동안 노동자들을 노예 상태로 붙잡아 둔 채 부르주아의 권세를 보존하게 하려는 저의를 갖고 있다고 말이다. 아니다, 그런 말이 아니다. 


지금 나는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특혜받은 자로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소유할 줄을 모른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애써 가지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 중 어느 것도 나는 간직할 줄을 모른다. 그것은 낭비벽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어떤 종류의 인색함 때문인 것 같다. 재물이 지나치게 많아지기 시작하면 즉시 사라져 버리고 마는 자유에 나는 인색한 것이다.


내가 몸담아 살고 일하기를 좋아하는 곳(더 드문 일이겠지만, 나로서는 거기서 죽어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곳)은 호텔 객실이다. 나는 한 번도 집안 생활이라고 불리는 것(그것은 내면 생활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지만)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이른바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행복은 나에게는 따분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하기야 그러한 적응 능력 결핍은 전혀 뽐낼 것이 못 된다. 그것은 나의 좋지 못한 결점들을 길러 주는 데 적지 않은 몫을 했다.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나의 권리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의 부러워하는 심정에 생각이 미치지 못할 때가 있어서, 그것이 나에게서 상상력을, 즉 남에 대한 친절을 앗아가 버린다.


슬픈 일이지만 사람은 타고난 천성의 결함을 메우기 위해서 좌우명을 만든다. 


사람이란 의욕만 가지면 — 나에게도 의욕은 없지 않다 — 가끔 도덕에 입각하여 처신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도덕적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실제로는 정열의 인간이면서 도덕을 꿈꾼다는 것은, 정의를 부르짖는 바로 그 순간, 불의에 빠져드는 것이 된다. 내 눈에는 이따금 인간이란 살아 움직이는 불의 같아 보인다 — 내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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