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세계사 / 1995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misfortune처럼 작용하는,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이의 죽음처럼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마치 자살 직전에 있는 것처럼 혹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숲에서 길 잃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 구실을 해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최승자 시인의 일기에 인용된 구절이다. 시인은 이 글귀가 하도 자주 인용되어 식상하다고 했지만, 내 경우엔 식상하기는 커녕 처음 읽어봤을 뿐 아니라, 인용을 하고 싶은 유혹이 마구 솟는 책에 대한 정의이다.

그렇다, 책이란, 독서란, 궁극적으로 카프카의 정의처럼 저렇게, 우리에게 정신이 번쩍 나게 해주는 무엇이 있어야 그 가치를 발휘한다. 갑자기 혹은 서서히.

그럼에도 나는, 그런 책들 이외에 시인이 아이오와에서 회화를 배우기 위해 주절주절 사모은 별자리 운세 잡지나 성적인 담화들이 그득한 책들을 심심풀이 땅콩처럼 읽듯, 이런 무정형 무목적의 독서를 할 때 참 재미나고 기분이 좋아진다.

나 같은 사람이 제대로 된 책을 준다고,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를 잘 알아보기나 할런지. 영 자신이 없어서 더 그런가보다.

전에 최승자 시집을 읽으면서 김칫국물을 흘리고는 이걸 용서해줄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여기 알라딘에도 적었었는데, 이 일기집을 읽고나니 그런 걱정이 거의 사라졌다.

자신이 왜 쓰느냐 무엇을 위해 쓰느냐 라는 질문이 애당초 마뜩치 않은 이 시인으로서는 자기 책이 무슨 이즘이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게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사용 된다면 좋은데에 사용되면 좋겠다 정도라고 했으니, 내가 속독 습관 고치려고 김칫국물 흘린거는 잘 사용했다고 할 거 같은 생각이 든거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외 생활이 잦았고 출장을 자주 다니는 나로서는, 해외에서 처음 대하는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시인의 속생각과 억지 사교 행각이 나와 닮은 구석이 많아서 키들키들 웃음도 나고 재미있었다.

외롭지 않아서 그런게 아니라 , 그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 그들은 시인.

자신의 아주 작은 행동이나 말에도 의미 부여를 하는가 하면, 당장 앰뷸런스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삐뽀 삐뽀 달려가도 무덤덤하게 갈 길을 계속 가는 무딘 사람들, 그들도 시인.

제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제 아무리 멋진 곳이라 해도, 심상이 오지 않는 배경이나 풍광은 저리 꺼져버려도 좋아 라는 배짱 두둑한 사람들, 그들도 시인.

시를 쓴다고 다 시인이 아니고, 데뷔를 했다고 진짜 시인도 아니고, 위와 같은 특성을 가졌다고 다 시인이 아니겠으나,

진짜 시인이라면, 최승자처럼 내면을 알면 알수록 재미난 구석이 많은 사람 일 수 밖에 없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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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10-31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춘쿠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죠.
아이오와라는 지명을 들으면 무조건 최승자 시인의 이름이......^^

치니 2006-11-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역시 로드무비님도 읽으셨군요.
포춘쿠키, 음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볼수있었던거 같은데...이젠 없어졌나봐요.

2006-11-09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6-11-09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속삭이신 님, 제가 메일 답장도 보내고 덧글도 님의 서재에 가서 남겼는데...
이상하네요, 다시 댓글을 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