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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가뭄을 적시는 비가 온다. 이럴 때는 정말 비님이라고 치켜세우는 존대를 하고싶어지고 저절로 자연 앞에 감사의 마음이 된다.
<열정>은 이런 비의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비록 내용은 비의 촉촉함이나 물방울이 똑똑 떨어질 때의 찰랑임이 아니라, 비오는 날의 잿빛 거리를 연상케 하는, 그런 무겁게 가라앉아 읊조리는 안단테와 긴 호흡으로 이어져 있지만,
책 다운 책 (도대체 이것의 정의가 뭐냐고 한다면 대답이 궁하지만)을 읽고 싶다는 열망에 가뭄같이 가슴이 식어가던 차에 만났으니 마침 가뭄이 심할 때 적절하게 와 준 비, 그것과 같다 느끼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경쾌하고 사랑받는 법을 알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호의를 받기에 충분한 햇살을 가슴에 담고 부유하고 반듯한 가정에서 군인으로서의 직무를 다하는데 아프기 쉬운 육체의 미비함을 빼고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자라난 헨릭.
그와는 반대로 가난하지만 교양이 있는 집안에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자식의 앞날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님 덕에 한 계단 한 계단 애써서 이 세상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운명에, 군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음악적인 콘라드.
이들의 우정은 처음에는 돈만 문제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그 선천적인 '다름' 때문에 서로를 완벽하게 신뢰하고 아는데 실패하고 좌절하며, 사랑하는 여자마저 같을 수 밖에 없는 모진 운명에 휩싸이게 되고 애증에 빠져 친구를 살해하는 가망 없는 꿈을 꾸는 콘라드의 도피로 이르게 된다.
간단하지만 미스테리 적인 형식을 갖춘 이 소설은, 늙은 헨릭의 회상의 모노로그로 독자에게 나즈막히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다 읽고나면 꽤나 뻐근하다.
그토록 확신에 찬 헨릭의 모노로그를 다 읽었음에도, 어쩌면 아직도 많은 것들이 또 다시 숙제가 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할 수 없는 행복감이나 더 할 수 없는 확신에 찬 인간 관계에 대한 회의가 물밀듯이 밀려와서 속수무책인 심정이 되어버리는 것.
어떻게 살아가는가 보다는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이유라 해도, 아무리 비난 받고 무시 당할 이유라 해도, 그냥 사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입하는 이 소설을 어찌 해야 할 것인가.
그 말에 그렇지는 않다 라고 반박할 수 있는 무엇이 없는데.
다른 모든 것에 마음을 걸어도 인간에게만은 걸지 말아야한다고 말했던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것 역시 반박의 여지가 없다,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