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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ㅣ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한 작가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토를 달자면, 한 작품 만을 읽어놓고 (작품을 하나 밖에 쓰지 않고 죽어버렸다면야 하는 수 없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게 나름의 내 양심이다.
<인간실격>을 읽고 다자이 오사무를 지껄였던 기억이 선명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오사무를 조금이나마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싶어서 그의 초기 단편집이라고 하는 -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출간된 - <만년>을 들췄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익살스럽고 재주가 탁월한 글솜씨는 여전했지만, 나잇값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상통하는 것인지 오사무 역시 젊은 치기를 아예 버리지는 못했음을 느낀다.
그래도 지나치게(?) 양심적인 이 젊은이는 단편 곳곳에서 고뇌하고 또 고뇌한다.
그는 아무래도 이 세상 자체의 거짓을 이겨나갈 어른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벌써부터 예감하고 있으며 끝끝내 그러한 어른이 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으니.
거짓 없는 생활. 그 말부터 이미 거짓이었다. 좋은 것을 좋다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한다. 그것도 거짓이었다. 우선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마음에 거짓이 있겠지. 저것도 더럽다, 이것도 더럽다 하고 사부로는 매일 밤 잠못 이루는 고통을 겪었다. 사부로는 이윽고 한 가지 태도를 발견했다. 무의지 무감동의 백치의 태도였다. 바람처럼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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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지 무감동의 태도가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이거야말로 거짓 지옥의 깊은 산이다. 의식해서 노력한 백치가 어째서 거짓이 아닐 수 있겠는가.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거짓에 덧칠을 해 간다. 멋대로 해. 무의식의 세계. 사부로는 아침 일찍부터 주점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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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 거짓말 사부로의 거짓말 화염은 이쯤에서 그 극점에 달했다. 우리는 예술가다. 왕후라 해도 겁나지 않는다. 돈인들 우리에겐 나뭇잎 같이 가볍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대저 최고의 사기꾼은 사업가와 예술가이다. 그들의 목표는 일맥 상통할 뿐 아니라, 우리를 거짓 세상 속에서나마 숨을 쉬게 하느니, 그 숨을 놓는 자 떠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