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뷔똥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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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좋은 것은,

뭐니뭐니 해도 건조한 듯 청량하게 느껴져서, 지리했던 여름의 무더위를 날려주는 바람과 파랗고 높은 하늘 때문이겠다.

가을을 타네 어쩌네 하던 것도 옛날 이야기고, 요즘 같아선 그냥 덥지도 춥지도 않으니 생활 하기 좋다는데에만 감사하며 겸손하게 지내고 있다. -_-;

안분지족형인 나는, 이런 식의 만사 안일하게 흘러가는, 비정치적이고 비가열찬 생활이 참 좋다.

그럼에도 86학번이라는 죄로,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이 그러하듯, 나만 뚝 떨어져서 시대가 주는 짐을 영 몰라라 하고만 살 수는 없었다.

웃기지도 않게 부학회장이라는 자리도 떠맡은 적도 있고,

소위 운동권 꼬심에 부침을 당하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전체주의적인 분위기에서, 개인주의자가 설 자리는 별로 없었다.

어릴 때 이미 박정희 아저씨의 새마을 운동 덕에 열심히 애국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세뇌를 실컷 받은 세대인지라,

운동권이든 비운동권이든, 나라를 위해 뭐라도 안 하고 자기 생각만 하면 그건 바로 이기적인 인간으로 찍혀 얼굴 들고 뻔뻔히 다니기 힘든 상황으로 몰리는 거였다.

아니면 의식 없는 인간 취급 당하면서, 날라리 생활 하든가.

이눔의 의식이라는게 또 그렇다.

한 세상 사는데 꼭 그렇게 저마다 '의식' 가지고 살아야겠냐 라는 생각이 그때도 나는 많이 들었다.

(비겁한 지라, 대놓고 아무데서나 떠들지는 않았지만)

 

김윤영의 이 정직해보이는 소박한 단편집은 그래서 마음에 드는 구석이 꽤 많다.

작가가 이미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이, 그랬던 세대들의 아픔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위무해주며 해방시켜주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이런 삶이 있으면 저런 삶도 있다는 건 명백히 아는 일이지만, 좀처럼 그 다름에 대한 인정이 되지 않던 우리들에 대한 자성이기도 하며, 그럼에도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들에 대한 해법을 묻고 있기도 한 단정한 모음집.

작가라기보다는 사회학자의 면모가 더 많이 어울릴듯한 냄새가 많이 나서, 감성적인 미문이나 수려한 문장에 혹 하고 싶은 처지인 사람에게는 좀 심심하지만,

전체적으로 단 하나 재미없다 소리 나올만한 지루한 작품이 없다는게 이 단편집의 -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 장점이기도 하다.

천재적이거나 타고난 작가가 아니어도, 이만큼은 오밀조밀 잘 써내서 재미도 있게 할 수 있다는 전례를 보여주니, 괜한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 (하지만 솔직히 말해 천재적인 재능이 번뜩거리는 걸 보면서 가슴이 막 두근거리는 느낌이 더 좋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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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6-09-0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전설의 86학번.

치니 2006-09-06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대학 시절 생각만 해도 지루해요. 게다가 여대였다구요 엉엉.

blowup 2006-09-06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분지족형 인간, 여기도 있어요.
저녁에 바람만 세차게 불어도 혼자 마음이 두근대곤 해요. 샌들 사이로 나온 발가락이 살짝 시릴 정도의 날씨를 좋아해요. 그래서 가을 중반까지 줄기차게 샌들을 신죠.
이 작가의 산문을 읽은 적이 있어요. 말씀하신 대로 독자를 혹하게 만들 정도의 재능을 가진 작가는 아닌 듯 싶었어요. 그래서 매번 '다음 기회에' 하고 미루었던 작가예요.
세간의 평가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치니 님에게 이 정도의 평가를 받은 사람이라니까, 그 다음 기회가 곧 찾아올 듯합니다.
(참, 중간에 작가 이름을 박윤영으로 쓰신 부분이 있어요. 별건 아니지만요.)

2006-09-06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dan 2006-09-06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녀공학 대학시절도 별로 상큼발랄하진 않았어요.(공돌이 유머 아세요? 그거 다 진짜에요. -_-)

sudan 2006-09-0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차. 치니님 엉엉 하시는 게 재밌어서 댓글 달다가, 안분지족형 인간이라고 고백할 타임을 놓쳤어요. ^^ 가을이 오는 이 느낌을 뭐라 말해야 할지. 정말이지.

sudan 2006-09-06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리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댓글이 부끄럽다. 흑.)

로드무비 2006-09-0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dan님, 제 방에서도 이렇게 좀 놀아주세요.ㅎㅎ

두어 달 전, <창비> 여름호에서 이 작가의 작품 처음 보고 반해가지고
바로 책 두 권 주문 들어갔거든요.
<루이뷔똥>은 그만큼의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호감이 가더군요. 이 작가의 관심사랄까.^^


Fox in the snow 2006-09-0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리뷰를 보니 가을이로군요. 전 왜 안분지족이 안될까요. 늘 결핍상태예요.흑흑. 정직하다는 평에 눈길이 가네요. 요즘 전 동네도서관에 갈 시간도 없어 매일 회사도서관 책으로 연명하다보니 실용서들에 오염되었어요. 뭔가 혁신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 자꾸 다그치고 있어요. 물론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지만요. 정직한 소설집을 읽어야 할 시점이예요

치니 2006-09-0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 아 , 짧은 댓글에도 이렇게 무릎을 탁 치는 표현을 해주시다니, 역시 나무님이에요, 샌들 사이 발가락에 부는 바람, 느낌이 정말 생생하게 와닿습니다.
어제 퇴근 직전에 쉬뤼릭 쓰느라 작가 성도 막 바꾸고, 지금 읽어보니 창피할 따름인 리뷰이군요. ㅋㅋ 지금 고쳤어요.

속삭이신님 / 역시 작가의 성을...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처음 댓글 달아주셨네요, 반가와요.

수단님 / 아 공돌이 과 나오셨구나 ㅋㅋㅋ 어쩐지, 수학을 그리 잘하시고 좋아하신다니 왠지 그런 상상이 들긴 했어요. 인문계는 아닐거라는...수단님은 고백 안하셔도 충분히 안분지족형으로 이미 보여요. ㅋㅋㅋ

로드무비님 / <창비>에서 보신게 <비밀의 화원>이셨던가요? 개인적으로 대표 작품으로 내세운 <루이 뷔똥>보다 <비밀의 화원>이 훨씬 마음에 들었드랬어요. ^-^

Fox in the snow님 / 아무리 남들이 자꾸 가을 가을 한다고 고만 좀 하라고 투덜대도, 저 역시 속으로는 "아, 가을이야..."하고 생각하기가 일쑤인 날들이에요.
회사도서관도 있으시군요! (이 와중에 이런거나 부러워하고, ㅋㅋ)
실용서들은 점점 안 보게 되요. 봐도 그 때 뿐이다 싶고...
할랑하진 않은 주제들이지만, 이 단편집이 보여주는 정직함은, 그런 주제의 무거움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바와 생각하는 바를 최대한 솔직하게 보여주는데서 믿음이 가기 때문에 느껴지는 거 같아요. 결핍 상태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mooni 2006-09-07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후훗. 86학번이셨군요. 제가 말이죠. 스무살 넘어 사회생활하면서 보니까 위아래 십년 안팎으로는 다 맞먹고, 친구삼고 그래도 되겠더라구요. 상대방의 동의여하에 상관없이...+.+ (그러니까 무척 가까운 친구셔요. 치니님은. ㅋㅋ 이렇기 때문에 리뷰와 상관없는 댓글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쓰고 가요.. 헤헤)


sudan 2006-09-0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난 위로 한살까지는 맞먹고, 아래로는 얄짤없는데. 헤헷.
그래도 저도 무척 가까운, 그거 할래요. ^^

치니 2006-09-0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하연님 / 위아래 십년은 물론이고, 20년까지도 무방하다가 제 생각이옵니다. 친구란 무릇 실제적인 나이와는 별개의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
수단님 / 수단님 나이는 제가 어디선가 읽고 알게된 거 같은데...그게 맞는지 아닌지 헷갈리네요. 아무튼 무척 가까운, 그거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