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 - 개정판 나남창작선 58
박경리 / 나남출판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소설이 이야기나 드라마를 담고 있다는 전제를 깐다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일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파시]를 읽으면서 줄곧 감탄한 이유는, 이거였다.

'참 말 되게 썼네' '드라마가 살아 있어' 뭐 그런 심정이 드는 것이었다.

얼마나 말이 안되는, 아니 말이 못되는, 이야기들이 책과 드라마에 널려 있는지,

라고 웅변을 좀 한대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웃긴건 마찬가지다,

내가 꼭 그걸 그리 많이 겪어봤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영 아닌 거 같은 책은 들여다보지 않은 지 오래고, 티비 드라마는 최근 들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지라.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사건들,

아귀가 꼭 맞는 내러티브와 복선,

대사 하나의 토시들마저도 사소한 틀림이 없고 단박에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이나 행동까지 그려지는 묘사의 탁월함,

이런 점들 때문에 아마도, 읽는 내내 '드라마'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가보다.

 

하긴, [토지]가 벌써 세번인가 드라마 화 되었다. 음음, 그럴만해.

 

아무튼, 묘미는 이거다.

박경리씨의 대하성(이런 말 있는가? 대하 소설 잘 쓰는 성격을 나 혼자 만들어내고 있음)이 통이 큰 거장의 몸짓이라면, 그의 토시 정하기 같은 걸 보면 거장의 치밀하고 섬세한 맛내기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것.

기억이 맞는가 또 가물하지만,

한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는 여성작가, 여류작가 라는 말을 꼭 작가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이 관례였던 걸로 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여성작가 치고는...여성작가인데도...'라는 말도 서슴없이 붙였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사 그랬다가는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아지겠지만, 문학계라는 소위 예술가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에서도 그런 정도의 차별은 무수히 일어나고 있었던 훨씬 옛날 옛적에도,

왠지 박경리 씨 만큼은 씨로 불리우고 남성 여성 가르지 않게 읽히고 , 그랬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성별구분이 필요없는, 할 마음조차 안드는  '사람'이 가진 힘.

그것을 가진 작가의 글은, 역시나 섣부르게 토 달 수 없는 힘이 있는 것이다.

독서 중, 어줍잖게 까탈을 부려쌓는 내 지적 허영심에 일갈을 주기 위해 , 알라딘의 서재지기 [나무]님이 특별히 내게 보내주신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에 슬며시 빙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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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1-2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대하 서사라는 건, 이야기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죠.
토지를 어느 해 겨울, 군고구마 까먹듯 야곰야곰 읽었는데, 지나치게 늘어놓았다는 아쉬움이 있긴 했어요. 어딘가에서 압축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리고, 일갈은 무슨. 고전 중심으로 읽는 치니 님 책 읽기에 감탄만 하는걸요.

치니 2006-01-2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잡으면 스케이트 타듯이 주루루 진도 나가는 책인데도, 완독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야 리뷰 썼네요. 덕분에 좋은 책, 재미나게 잘 읽었어요, 또 감사.

Fox in the snow 2006-01-2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박경리를 읽은지 10년도 넘었어요..얼마전 이청준 소설을 다시 읽고 나 자신에 조금 실망했던 적이 있어서, 어릴때 좋아했던 책을 다시 잡는 일이 선뜻 내켜지지가 않네요.

sudan 2006-01-26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가 참 재미는 있었는데, 두 권 읽다가 포기했어요. 드라마처럼 읽히는 소설이 안 땡기는 이유가 뭘까. 정서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음.. 그냥 지적허영심이란 말인가요. -_-

치니 2006-01-2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ox in the snow님, 이청준은, 생각하면 괜히 지리합니다. 헤 ... 박경리는 그렇진 않았어요, 왠진 몰라도. 저는 [토지]도 길어서 읽지 않은 사람이라, 대하 풍을 좋아하지 않는데, 적당한 분량의 [파시]는 꽤 읽을만했어요.

수단님, 토지. 두 권이나마 읽으셨군요. 길어서 아예 엄두도 안낸 저보다는....^^;;
지적허영심이란 말이야, 드라마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쓴거구요, 요즘의 제 독선적이고도 편의적인 책 고르기 심리를 자조하는 말이었을 뿐입니다. 하하.

mooni 2006-01-3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삼국지는 다섯 번쯤 봤습니다.
이문열씨가 쓴 건 안봤지만, 대략 돌아다니는 건
이런저런 버전으로 많이 구해봤어요.
그치만, 제 주위엔 삼국지를 다 본 사람이 거의 없어요.
딱 한명 있는데, 삼국지에 대해선
두마디 건너가면 쌈 되요, 자칭 전문가인 그쪽하고
제가 의견이 안 맞아서;;;
그래서 저는 삼국지 봤다는 이야기를 할 때
좀 따되는 기분이 듭니다. ^^


그거랑, 또, 토지 이야기할 때요.
저는 토지를 안 봤거든요.
얼마전에 회사에서 누가 토지를 봤냐고 하기에
안 봤다고 했더니, 절더러 어려워서 그러는 거면,
어린이용 토지라도 보라고 권해주더군요.
뭐라 할 말이 없었어요.

뭐, 인생은 짧고, 책은 많으니까요.
좋을대로 읽고 잊으면 그뿐 아니겠습니까.

파시는 재미있나 보군요.
틈나는대로 한 번 봐야겠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치니 2006-01-3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실은 장정일의 삼국지를 노리고 있긴 합니다.
그가 [생각]이라는 책에서 여성독자들이 삼국지를 읽지 않게 된 것에 대해 저 대신 실컷 이유를 설명해준 덕분에 , 신뢰가 좀 있어서일까, 그런 사람이 번역한 삼국지는 어떨까 궁금해지더군요.
하지만 정말 길지 않은 인생에 그 많은 책 중에 언제 제 손에 잡힐런지는 의문.^-^;

파시는, 개인적으로, 다른 책의 글자들이 눈앞에서 뱅뱅 돌기만 하고 의미가 잘 안 들어오는 현상이 생길 때, 느긋하게 편안히 읽어도 좋은, 그런 책입니다.
마하연님의 리뷰가 벌써 기대되는데요? ^-^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