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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어릴 때도 나는 건조한 아이였던가보다. 마법 같은 것이 진짜로 있어서 내가 그런 걸 써먹을 수 있다거나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걸 쓴다거나 하는 상상은 안해봤다.
오히려 다 크고나서는 <해리포터>시리즈 같은 것을 읽으면서 잠깐씩이나마 설득이 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세상 진짜 다 안다고 할 사람 없는데, 이런 호그와트 같은 학교가 없다는 보장은 또 어딨어? 있다면 정말 거기 다니는게 좋을까 나쁠까? 그런 생각도 하고.
아무튼 사람들이 마법에 기대는 심리란 요약해보자면 이런 걸 거다.
'해리'가 부모 잃은 고아가 되어 삼촌과 숙모에게 갖은 핍박을 받았을 때와 같은 크나큰 불행이 찾아왔을 때, 그리고 여기 위저드 베이커리의 '나'가 겪는 5단박치기 - 7세때 자신을 버린(적이 있는) 엄마 자살, 아버지의 무관심, 그 아버지와 재혼한 못된 새엄마, 새엄마가 데리고 온 7세 여자아이의 성추행범으로 오인 받음, 그 성추행범이 실은 아버지였음을 나중에 알게 됨 - , 가정생활의 초불행 같은 것이 찾아왔을 때, 도무지 현실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테고, 그러면 도피하거나 죽거나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겠을 거고, 마법은 이럴 때 자살과 우울을 미연에 방지하는 최고의 묘약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걸 거다.
불행한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그렇고 그런 성장소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 소설이 주목 받았던 이유는 제목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위저드'(마법사) vs '베이커리'(빵집)의 단어 연결이 주는 묘한 분위기, 즉 마법사에서 풍기는 신비함과 음험함에다가 빵집에서 풍기는 고소함, 달콤함, 부드러움 따위를 범벅하는데 그것도 영어로 해서 조금 더 세련되게 보이는 그런 분위기가, 소설을 읽기 전부터 빠져들 준비를 하게 만들지 않는가.
물론, 제목에 걸맞게 내용 역시, 불행한 아이가 마법을 만나 신데렐라처럼 행복을 다시 잡는다는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나름 마법사의 입장에서 남을 행복하게 만들고 자신을 버리고 사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보여주고 결말조차도 주인공이나 독자에게 열어주면서 우리네 인생이 항상 다변하고 정답이 없다는 걸 잘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가독성도 따라오고, 적당한 긴장감으로 다음 장이 궁금해져서 한번 잡으면 놓지 않게 되는 몰입력이 있다. 그런데 막상 나는 주인공 '나'에게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 딱히 마법사 이야기가 나와서라기보다는, 중간 중간 작가가 애써 만든(것처럼 보이는) 멋진 문장이 결과적으로는 감정이입을 거스른달까.
주인공인 '나'가 16세인 점을 감안하고 읽자면, 아무래도 '나'의 사유체계가 너무 어른의 그것같이 정형화 되어 있거나 지나치게 진지하다는 느낌을 주는 문장들이 많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이건, 내가 16세 아들의 엄마라서 내 아들의 정신 연령이 16세 평균의 정신 연령이라고 착각한 탓일까 아니면 작가가 정작 16세 눈높이를 못 맞춘 탓일까. 둘 중 무엇 때문이든, 감정이입에 실패한 나로써는 다 읽고나서 여운이 남는 작품은 아니었다. 또한, 엄청난 사건들을 다 겪어내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몰두하느라, 그런 사건들의 배경들은 단순하게 처리된 점이 아쉽기도 하다 (하기야, 자신의 이붓 딸을 습관적으로 성추행하는 아버지의 심리를 작가라고 어떻게 알겠냐. -_-;;)
다행인 것은, 순전히 외국소설로만 청소년기의 '위시리스트'를 작성해야 했던 우리 어린 시절보다는 지금의 십대들이 훨씬 풍요롭게 국내 청소년 문학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들이 더 많아져서, 많은 만큼 옥석을 가려낼 기준도 더 까다로워지고, 진정한 보물과도 같은 작품이 오래 오래 청소년들의 필독서로 읽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