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해온 일
정리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해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 중에서>
잠시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 지친 시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뎅뎅 하고 울리는 것 같다. 슬프고 퀭한, 그러나 묘한 강단이 있는 그의 얼굴이 그 목소리 위에 오버랩 된다. 요즘은 자꾸만 시가 내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길고 설명이 많은 책들을 멀리 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인가보다.
시인은 '지지한' '생기없는' 노래, 결국 하나의 명령 밖에 안될 노래를 부른다고 자괴감에 빠지지만, 우리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간절히 지금 이 자리에서 필요하다.
시가, 우리 시대에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