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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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는 철이 늦게 든 편에 속했다, 늘.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에 처음 내 돈을 주고 사서 읽었던 소녀 잡지에서 자꾸 나오는 단어인 ‘생리’라는 뜻을 도통 모르겠어서 망설이다 엄마에게 물어보기도 했고, 젖봉오리가 살짝 올라올 때는 오빠에게 만져보라며 자랑도 했으며, 중학교 2학년이나 되어서 첫 생리를 시작했을 때에도 막연한 불편함에 서럽기는 했지만 여자가 되었다는 기쁨 따윈 생각도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 3학년에는,
집에 와서 하루 엄마가 안 보인다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엄마!엄마!엄마! 소리를 지르며 울고 다니기도 했고,
초등학교 6학년인가 중학교 1학년인가에는,
자는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나를 뒤로 하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처음 듣는 엄마(여자)의 목소리를 내며 신문에 이름을 낸 옛사랑의 열정을 애써 도도한 목소리로 확인해보던, 그 전화 한 통을 걸기 위해 수날을 망설였다가 이내 자책과 실망으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 같던 불행한 모습의 엄마가 기억의 한 페이지로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가족의 트라우마는 마침 중학교 3학년 때에 내게도 찾아왔고, 그것이 여적 남은 걸 보면 나는 아직도 그때 겪은 외상을 어린 시절 읽은 잔혹 동화 정도의 하나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구석을 지니고 있다.

엄마는 어린 내 눈에 하루만 안 보여도 안되는 무조건 ‘엄마’이면서, 어딘가에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애정을 갈구하는 한 ‘여자’.
내게는 어쩌면 영원히 화합되지 못할 것 같은, 이중적인 존재.
이제 내가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보면, 가끔 눈앞이 아주 뿌얘지면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알려주어야 할 지 모르겠는 나를, 아이더러 이해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엄마나 나나,
아이들에게는 잔혹 동화를 읽어주는 사람이면서, 잔혹 동화를 겪게 하는 사람들. 아니 엄마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반복해서 서로에게 소통을 빌미로 그렇게 하고 산다.
김애란은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그런 일들이 무심하게 일어나는 일상 속에서 소설이라는 한계적인도구를 사용해 자신만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우주를 펼친다.
첫 작품집보다 두서가 없고 산만한 두번째 작품집은 소설이 지니는 한계와, 일상과 상상의 극단적인 부조화 속에서 피치 못하게 떨어지는 결과물이기도 하겠고, 조금쯤은, 안이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나저러나, 몇 편의 단편 중에서 두 편 정도를 제외하고는 무척 재미가 없다.
김애란은 나보다 꽤 어린 사람인데, 그가 묘사한 노량진이랑 학원이랑 자취방은, 왜 내가 겪었던 그 옛날의 그것들이랑 한 치 차이가 없는지, 그게 참 재미가 없다. 게다가 어떤 묘사들은 청신하다 느껴졌던 그만의 묘사에서 많이 식상한 쪽으로 기울었다. 글은, 재주라기보다는 사색과 부단한 연습에서 나오는 것이리라…또 다시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오래 삭힌 세번째 작품집이 나오기를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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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12-0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겪었던 그 옛날의 그것들이랑도 한 치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무료로 고시생들에게 아침밥을 준다는 그 교회의 이름까지도 저는 어딘지 알겠거든요. 거기서 저는 정말 무릎을 꺾었습니다요.ㅋㅋ

어릴적 겪은 트라우마는 사람을 참 시니컬하게 만들어요. 가볍게 사는 일을 한번도 꿈꿔보지 못한 것처럼 말이에요.

치니 2007-12-03 12:4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가끔은 가벼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스스로 느낄 때마다 더욱 시니컬해지곤 하죠...

토니 2008-01-15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댓글 읽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네요.
최근 절친한 회사 동료가 "토니는 가벼운게 정말 하나도 없네. 생각도 몸도 그리고 목소리까지도.. "

책에도 궁합이라는 게 있나 봅니다.
남들이 그토록 열광한(?)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저는 굉장히 재미없게 (페이지 걸러 한번씩 신경질을 부려가며) 겨우 읽었기에 "침이 고인다"는 소설을 선뜻 읽을 수가 없네요.
김애란의 글은, 제가 느끼기엔, 수식어도 많고 그래서 그런지 독자를 의식하면서 쓰는 것 같아 좀 거북스러워요.

저도 참 웃기죠.. 겨우 책 한권 읽고서 이렇게 작가를 폄하하다니..
나는 뭐길래... 띄어쓰기 하나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저 역시 김애란의 세번째 소설을 한번 기대하겠습니다. (이번 작품은 패스~)



치니 2007-12-05 09: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책에도 궁합이 있는데다, 그 책을 읽는 시기나 마음 상태도 꽤나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달려라 아비'에서는 독자를 의식하면서 쓰더라도 그래서 신선하다 싶은 수식어를 좀 남발하더라도, 그게 참 귀여웠는데, 이번엔 시들해져버렸네요.
어쩌면 그것이 처음이었기때문에 그랬는지도...아무튼 글을 쓰는 직업이란, 정말 고단한 일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