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침묵은 어떤 발언보다 더 효율적인 법.
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비껴갔다. 단일 선택지가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병렬적으로 쌓이면 악행으로 치닫기 쉬웠다.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밉보이지 않으려 손수 그릇을 치웠고, 길고양이까지 챙기려 했고, 이를 위해 가급적 흠결이 없는 제품을 구매했던 나의 연쇄적인 노력들은 염분을 제거하지 않은 참치 하나로 나쁜 짓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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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자 하는 도덕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가끔 패배가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는 일처럼 불합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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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마트도 같은 맥락이었다. 돈은 없지만 다양한 식자재를 구입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박한 욕망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바닥에 눌어붙은 통장 잔고를 위해 그들이 열심히 지켜온 갖가지 선택지들이 병렬로 연결되고, ‘25마트 상품’이라는 저질 제품으로 수렴하는 순간 최종적으로는 ‘무책임한 선택’만 남는다.
선량한 구렁이가 눈가를 어찌나 핥아댔는지 5년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악인이 되지 않는 방식만 선택하는 건 마음 안에 용수철을 꾹 눌러두고 손을 떼지 않는 일과 같았다.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튀지 않게끔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
고상한 불행은 천박한 행복을 이길 수 없었다.
서로의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관계라면 구린 것도 아닌 척 넘어가기 십상이다. 마땅히 모순적인 일을 해도 ‘너는 예외다’라며 눈감아 주는 것은 비겁보다는 어떠한 관용이었다. 나와 친밀한 사람에게는 참된 정의가 무엇이냐, 도덕이 무엇이냐 사력을 다해 왈가왈부하는 일보다야 밥 한술 더 물려주는 것이 나를 제법 아량 넓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일상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 쉬웠다.
같은 정당이라면 아무리 멍청한 소리를 해도 지지하는 정치인을 머저리다 욕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장사하면, 아무리 바보 같은 물건이라도 좋다고 홍보해 주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다 욕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다움의 본질은 때때로 얄팍하다.
하지만 사과 씨를 심은 곳에서 오렌지 나무가 자라면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듯이, 기대로 쌓은 관계가 틀어질 때, 그때는 괘씸함에 배신감까지 추가되어 되돌릴 수 없는 적이 태어난다. 멍청한 소리까지 지지해 줬던 동료 정치인이 돌아설 때 가장 큰 적이 되고, 바보 같은 물건을 홍보해 줬던 친구가 돌아서면 가장 곤란한 민원인이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