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언어를 구사했고, 외국어로 글을 쓰며 삶의 문제를 해결해 갔다는 독일 작가 괴테는, “외국어를 통해 자신을 바라볼 때, 외국어는 그 자체로 거울이 된다”•고 썼다.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모국어도 알지 못한다”•• 라는 그의 유명한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감이라는 것을. ‘이 정도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사는데도 모르는 게 있다면, 모를 만하니까 모르는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자신감이다.


숫자를 세는 법도 독특했다. 희한한 20진법과 60진법으로, 이를테면 숫자 78은 soixante-dix-huit(60+18, 수와썽 디즈윗)이 됐고, 83은 quatre-vingt-trois(4×20+3, 꺄트르 방 투화)라고 불렀다. 나는 이 숫자 세는 법을 보고,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의 산수 실력이 프랑스 아이들보다 앞서는 이유가, 우리가 오랫동안 믿고 있었던 지능이나 교육 방식 같은 그런 거창한 게 알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78을 칠십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들과 60+18이라고 계산한 후에야 부를 수 있는 아이들의 산수 실력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은행에 갔다고 해보자. 담당자와 약속을 잡고 갔지만, 앞선 미팅이 지연돼 대기실에 앉아 잠시 기다리게 됐다. 그는 대기실로 들어오면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이제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Je suis à vous!”라고. 이 표현은 조금 전까지 다른 일로 바빴지만 이제 당신과의 일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상대를 기다리게 했을 때 프랑스 사람들이 아주 흔하게 쓰는 표현이다.


언어는 말하는 이의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과 세계관을 가득 담고서 내게로 온다. 누군가의 언어를 여과 없이 흡수해 내 것으로 만든 세월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아주 다른 두 개의 세계 속에 각각의 내가 있다. 그 언어들이 나를 만든 건지, 내가 그 언어에 맞는 자아를 매번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새로운 언어 속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익숙한 모국어와 자기 자신을 ‘외부의’ 시선으로 낯설게 보는 일, 외국어를 알아서 생기는 즐거움이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일은, 마치 손으로 모래를 옮기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손을 꼭 쥐고 조심조심 움직여도 알갱이가 술술 빠져나간다.


프랑스어로 “내가 당신을 생각합니다Je pense à vous” 혹은 “우리는 당신을 생각합니다Nous pensons à vous”는 주로 어려운 일을 당한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로 사용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나는 이 말을 국가적인 사고로 사망한 이들의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대통령 연설이나 공적인 자리에서 자주 들어왔는데, 매번 그 말의 정확한 의미가 와닿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생각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위로의 대상이 아닌 행위의 주체만 강조하는 생색내기가 아닌가 하면서.


  주 뻥스 아 부. 그 순간,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준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당신을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를.


  당신을 생각하겠다는 말은 당신의 상황을 헤아리고,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내 것처럼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내 시간이 당신과 함께한다는 의미고, 나의 마음이 당신 곁에 머물고 있으니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며, 그러니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나를 생각하라는 뜻도 된다. 또 그 말은, 당신의 아픔을 나도 함께 느끼겠다는 의미였고, 그러니 당신의 비극은 나의 비극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나 그럼 주말에 짧게 베를린은 어때? 몇 년 전에 출장 갔을 때 보니까, 도시가 엄청 젊고 힙하던데. 한번 다시 가고 싶었어.


  동거인 베를린? 독일인들과 주말을 보내자고? 왜 돈을 내고 그런 우울한 일을 해야 하지?


“지금보다 10킬로그램이 더 찐다고 해도, 5킬로그램을 더 뺀다고 하더라도 저는 정상 범주라고 말씀드릴 거예요. 그 이상이면 건강에 무리가 가겠지만요. 몸무게에 연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다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마음의 문제니까요.”


  교과서 같은 말이지만,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알았다. 이 선생님이 나의 주치의가 될 것임을. 지난 15년간 쌓여온 내 몸의 기록을 넘겨줄 사람을 찾았음을.


프랑스의 야당 정치인 중에는 본업이 우체부인 사람도 있다. 그는 과거 TV 정치 토론 프로그램의 단골 패널로 활약하면서 대선 후보를 긴장시킬 만큼 인기가 높았는데, 프랑스인 누구나 그의 이름을 아는 지금도 파리의 한 우체국에서 일하는 중이다. 모두가 자기 고양이를 찾는 일만으로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거대 자본이 모든 부를 독점하지 않는 사회가 아마도 그가 찾아 나선 고양이일 것이다.


어차피 삶은 ‘그럴 수-있다peut-être’ 속의 연결선에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단어를 만드는 가느다란 선 위를 걷고 있지. 내 무게 때문에 선이 끊어진다면 할 수 없지 어쩌겠어. 뭐가 살아남고 뭐가 죽었는지는 그때 가서 보는 수밖에.•

  


  

    •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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