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무 계획 없어.” 물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말했다. “계획을 안 짜는 걸 계획했겠지. 

슬픔이라니. 그건 섣부른 동정이었다. 그림 속 인물들도 각자 삶의 비루함을 견디며 우뚝 서 있는데, 내가 뭐라고 그들을 위로하는가. 그 위로가 가당키나 한가.  

어쩌면 허무는 텅 빈 상상력의 자리일지도 몰랐다. 버킷 리스트를 손쉽게 하나씩 이루고 있었지만, 뭔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나는 슬슬 눈치채고 있었다. 완벽해 보이는 나의 버킷 리스트에 빠진 결정적인 무언가. 그건 바로 상상력이었다. 도대체 아는 것이 없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곳에 살면서 무엇을 욕심내도 되는 건지, 어떤 것 앞에서 용감해져도 되는 건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떤 시간은 소화를 하는 데 오래오래 걸리는 법이니까. 

궁금함은 점점 커졌다. 억지로 틈을 벌려서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어떤 무늬의 여행이 될까. 돌아가야 하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억울한 마음이 자라나지 않는다면 여행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 살고 싶은 속도대로 살아도 되는 여행이라면, 내가 살고 싶은 속도는 어떤 걸까. 그 속도를 열심히 찾아보자, 라고 쓰려다가 멈춘다. 찾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그래도 되는 시간이다. 그래도 되는 시간을 내가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보란 듯이 사치스럽게 쓰렴.


  지금은 무지개의 시간이야. 

변하고 변하지 않는다. 친구를 보며 깨닫는다. 변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친구가 변했고, 변하지 않았고, 우리의 관계가 변했고, 변하지 않았다. 변해서 놀라고, 변하지 않아서 웃음이 터진다. 변해서 새롭게 드러난 면이 감격스럽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기어이 변하지 않은 부분은 경이롭다 못해 어이가 없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주인공은 단연 두 개의 〈수련〉 방이다. 타원형의 커다란 방 두 개를 빙 두르며 모네의 〈수련〉 연작 8점이 그 모든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작품의 길이를 다 합치면 무려 100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이 대작들은 모네가 이 둥근 전시실에 꼭 맞게 작업한 작품들이다. 모네는 “작품은 일반 시민에게 공개할 것. 장식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하게 할 것. 작품은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하게 할 것”을 조건으로 이 작품들을 그렸고, 천장의 조도와 관람객이 앉을 의자의 위치까지 섬세하게 계획했다고 한다. 연못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들이 관람객에게 오롯이 전달되길 원하며. 불행히도 그는 이 전시실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 연작을 의뢰한 그의 평생 친구, 클레망소(당시 프랑스 총리)는 장례식장에서 “모네에게 검은색은 어울리지 않아”라며, 검은색이 아닌 꽃무늬 천으로 관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친구의 눈물은 재채기다. 재채기를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변하지 않는다. 30년이 지나도, 친구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우리가 마흔이 넘고, 파리로 배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친구와 나는 서로에게 한결같음으로 응수하고 있다. 얼마나 안도한지 모른다. 사실은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와는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바뀌어버린 가치관과 뻔한 통념으로 지금의 나와 만나기에, 자연스럽게 만남을 줄이게 된다. 어떤 친구는 과거의 영광에 발목 잡혀 있다. 그때의 자신을 과시하며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기에, 만나고 오면 피곤함이 짙어진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어려움만 끝없이 토로하고, 어떤 친구는 생각이 좀처럼 자라지 않아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걱정은 당연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가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꿈으로 만드는 데 이토록 성공한 도시가 또 있을까. ‘Paris’라는 단어를 새기기만 해도 팔리는 상품들이 있다. 그 단어를 듣기만 해도 꿈꾸는 얼굴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교한 아름다움은 그만큼 비싸고, 한번 그 아름다움을 본 이상 평범한 상품들로는 돌아갈 수 없다. 

여행 친구를 선택하는 건 실은 어떤 여행 세계를 선택하느냐와 같은 문제라는 걸 깨닫는다. 좀 더 친숙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좀 더 모험심 가득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요리와 술이 넘치게 흐르는 세계를 택할 것인가. 천천히 오래 보는 세계를 택할 수도 있고, 빠르게 많이 경험하는 세계를 택할 수도 있다. 

시간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얼마나 가차 없이 굴었는지 우리는 아니까, 애써 더 느긋해진다. 허락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던 모양으로 살아버린다.  

하늘색 조명 하나를 내 몫으로 가지고 책을 읽다 보니 불현듯 도서관이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공간은 빗소리로 가득 찼다. 유리 천장은 바깥 날씨를 그대로 공간 전체에 투영했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지며 그 큰 도서관 전체를 두드려댔지만, 나는 괜찮았다. 우산을 안 챙겨왔지만 나는 어둑해진 도서관 안에, 원하는 하늘색 조명 아래 안전하게 자리 잡았으니까. 나는 책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책이 너무 좋아서 고개를 들면 책보다 아름다운 도서관의 풍경이 보였다. 

좋아하는 것 앞에 ‘지겹다’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호사가 어찌하여 내 것이 됐단 말인가. 

이 오케스트라의 이야기는 아는 바 없지만, 사랑받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공간 전체를 감싼 단단한 사랑. 처음에 조마조마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심지어 친구는 그 음악에, 분위기에 단단히 감동한 표정이다. 이 연주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상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같이 있었고, 같이 즐겼고, 같이 웃었다. 인생에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다.

치즈 가게에서 줄을 서며 나는 새삼 또 배웠다. 누구든 자신의 차례가 오면 그 시간을 충분히 누려도 된다는 것을.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도 된다는 것을. 이곳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해야 하는 한국이 아니다. 내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배려하느라 너무 급한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 시간에 대해 당당해져도 된다. 그것은 나의 권리. 눈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주인장까지도 기다려준다.  

이러려고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공원 근처로 숙소를 고집했던 걸까.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던 아침 시간을 내 마음대로 써보고 싶어서. 평생을 한결같이 미워했던 아침 시간들에게 정당한 자리를 찾아주고 싶어서. 아침부터 숨 쉬듯 쉽게 행복해지고 싶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우리는 어른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어른답게 다 사버렸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왜 돈을 버는데요,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심지어 온 김에 전시실을 다 봐야 한다는 조바심도 없었다. 나는 또 올 거니까. 아낌없이 와서 아낌없이 시간을 써버리는 그런 사치, 내가 해버릴 거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어린 나의 결핍을 다름 아닌 지금 내가 다 채워주었다. 오래도록 내가 부러워할 대상은, 다름 아닌 오늘의 내가 될 것이다. 

이 도시가 지겨워지는 순간이 찾아올까. 이 도시가 시시각각 살포하는 문화의 마법 가루에 내가 휘청이지 않을 날이 오긴 할까. 그건 어떻게 가능한 거지. 

너무 좋은 것 앞에서도 사람은 소진된다. 지친 몸에는 흥이 깃들지 않는다. 눈은 더 이상 새로운 걸 감각하지 못한다. 

목적지가 아니라 등대. 그곳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항해를 하듯이 그쪽으로 나아가는 거다. 지금부터는 목적지뿐만 아니라 경로도 여행이 된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빗소리만 들었다. 도로 위를 미끄러지는 차들의 소리가 지나가고, 빗속을 뛰어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다시 빗소리. 안과 밖의 선명한 풍경 차이. 포근한 침대와 시원한 비. 얇은 잠옷과 창밖의 흔들리는 나뭇잎들. 적막과 빗소리. 일상과 비일상. 경계에 누워 경계의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어떤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20년간 지속되어온 나의 일상과 지금 이 시간의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너무나 일상적인 한순간처럼 보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나의 일상이 아닌 곳에 일상인 양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다. 생의 이런 무게감은 너무나도 생소해서 이것이 나의 생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이 안전은 우연이다. 우연히 내가 저기에 없었고, 우연히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 우연히 내가 안전하고, 우연히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다. 일상이라 단단히 믿고 있던 지반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이 모든 순간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나의 안전은 얼마나 수많은 우연이 결합해서 기적적으로 찾아온 것인지. 이 안전에 필연은 없다. 

파란 하늘과 거대한 나무, 연둣빛 잔디와 빨강 매트, 차가운 와인과 맛있는 음식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그 위로 흩어지는 웃음. 매우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행복. 더 근사한 무언가를 찾아 더 먼 어딘가를 헤매는 나를 불러다 앉히는 사람들. 

이토록 계산 없는 환대라니. 낯선 나를 ‘우리’ 사이에 넣어주는 사람들이라니. 파리의 화려한 겉만 핥고 있는 나의 손을 낚아채 이 도시의 깊은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니. 내가 나를 열면, 이런 세상이 열리는 거였나. 

유명하다고 여기에 들어가면 나는 너무 불행할 것 같아.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기이할 정도로 큰 해방감이 찾아왔다. 마침내 애달픈 마음이, 미련으로 들끓던 마음이 착착 접혔다. 이걸로 끝. 어차피 다 갈 수 없다. 어차피 다 먹을 수 없다. 어차피 다 알 수 없다. 파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내 사랑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어느 편에 서고 싶은가. 혐오의 편에 서고 싶은가, 작은 친절 편에 서고 싶은가. 영화 〈르 아브르〉 속에서 난민 소년 옆에 서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배척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의 답은 명확했다. 자신이 당한 인종차별 앞에서는 분노하면서,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차별적 발언을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월급 때문에 살아보고 싶은 삶을 시도조차 못 한다는 건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결단했다. 더 이상 매달의 월급은 없을 것이다. 대신 매일 나에게 24시간이 입금될 것이다. 마음껏 다 써버려도 다음 날이면 다시 24시간이 내 손에 들어온다.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은가? 그러니까 오늘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지만 월급 때문에 살아보고 싶은 삶을 시도조차 못 한다는 건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결단했다. 더 이상 매달의 월급은 없을 것이다. 대신 매일 나에게 24시간이 입금될 것이다. 마음껏 다 써버려도 다음 날이면 다시 24시간이 내 손에 들어온다.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은가? 그러니까 오늘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지만 월급 때문에 살아보고 싶은 삶을 시도조차 못 한다는 건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결단했다. 더 이상 매달의 월급은 없을 것이다. 대신 매일 나에게 24시간이 입금될 것이다. 마음껏 다 써버려도 다음 날이면 다시 24시간이 내 손에 들어온다.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은가? 그러니까 오늘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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