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초라해지는 상황은 참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나오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 남자가 늘 불쾌한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가 있는 법이지. 아주 오랫동안 멈췄던 시계가 다시 움직일 때 말이야. 그날 그 시간의 다음이 다시 시작되는 일 말이야.”



나는 더우화를 아주 좋아했다. 특히 할아버지가 아침에 사다 주는 그 자랑스러운 한 그릇을. 몽글몽글한 더우화에 숟가락을 꽂고 달콤하게 졸인 땅콩과 함께 섞을 때,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나는 이 세계에 군림하는 작은 패왕 같았다.



나는 눈물이란 슬플 때 제멋대로 나온다고 믿었기에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몇 주 동안 혹시 내가 슬퍼하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 대부분은 다른 이의 시계로 측정되는 것이라 아무래도 이런 오해가 생긴다.


밍첸 삼촌에게 비밀이란 그게 어떤 것이든 개구리에게 비와 같은 것이다. 개굴개굴 울지 않고 배길 수 없는 것이다. 


“공자님 말씀이지, 아마? 중요한 일을 제대로 하면 작은 일은 어느 정도 어겨도 된다는 소리야. 공자님 제자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거두절미하고 이 말은 진리야.”


  “《논어》 같은 걸 읽어?”


  “내게 적당한 부분만. 



“자네 할아버지는 늘 화가 나 있었어요.” 위에 씨가 말했다. “가슴속에 아직 희망이 있었던 거죠.”


  “희망?”


  “조바심과 초조함은 희망의 다른 얼굴이니까요.”



이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절대복종과 괴롭힘을 함께 견딘 동료들에 대한 연대감과 소속감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은 분노의 칼끝을 원한도 없는 사람에게 돌리는, 교묘한 자기기만이다. 타인을 모방해 그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고 한 자크 라캉의 주장이 옳았다. 그렇게 전쟁도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운명의 사람을 만날 때는 나쁜 일조차 도움이 되지.”



사람에게는 성장해야 하는 부분과 성장할 수 없는 부분과 성장해선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혼합된 비율이 인격이고,



“우리 마음은 늘 과거 어딘가에 붙잡혀 있지. 억지로 그걸 떼어내려 해봤자 좋을 게 없단다.”
















“죽을 때만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런 일은 없어. 만약 내가 내내 행복하다가 죽을 때 차에 치여 죽는다고 해도 지금까지 행복했으니까 뭐, 괜찮네, 라고 생각할 거야. 거꾸로 내내 불행했는데 죽기 전에 복권에 당첨되었다면 지금 새삼스럽게? 라고 생각하겠지.”


사소한 일로 자기 대신 분노를 뿜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늘 조금쯤 친절해진다. 그런 법이다.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헤어지는 원인을 나누려고 했던 거야. 


우리는 끝내 마음을 따르거나 아니면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느 쪽으로 가야 좋은지는 죽을 때까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단호하게 마음을 거절하다 보면 우리는 더는 우리가 아니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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