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언어로서 음악’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디를 잘라도 미려하게 다듬어낸 사운드가 들리도록 완성하면 말(기호)로서 음악을 재현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사운드와 언어가 늘 양립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음악은 자국 중심 문화의 세계화를 도모하기에 적절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에 이르러 수많은 민족이 독립 국가가 되기를 희구하며, 자신들의 국민적 정체성이 담긴 음악을 지니고자 열망하게 된다. 베버나 베르디나 쇼팽 같은 국민악파 작곡가들이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국민음악은 민족을 결집하는 정체성의 핵인 동시에 그 민족문화를 국경을 넘어 보편화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에 가장 성공한 나라가 독일이었던 셈이지만, 자국의 음악을 세계 기준으로 유통할 때의 표어가 ‘음악은 말이 아니다/국경을 초월한다’였을 가능성은, 이것이 잠재의식 아래에 있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높이 작용했을 수 있다. 사실은 그 문화에 밝아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음악을, 자국 중심성은 숨긴 채 ‘국경을 초월한다’라고 내세워 세계에 전파한 것이다. 

예를 들면, 쇼팽의 음악을 ‘폴란드의 영혼’이라 칭하며 폴란드인 이외에는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은연중에 암시한다. 반면, 그것을 ‘국경을 초월하는 언어’라고 믿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나 아르헨티나인에게 연주하게 하고, 또 ‘세계 언어로서 쇼팽 음악’의 중심지인 바르샤바의 쇼팽 콩쿠르에 참배토록 한다. 바로 이런 행위에 ‘국경을 초월하는 음악’ 이데올로기의 이중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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