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보면 ‘음악은 말이 아니다’라는 레토릭은, 음악을 종교 없는 시대를 구제하는 새로운 종교로 삼으려는 세력과 새롭게 등장한 시민계급 청중을 상대로 음악으로 장사를 하려는 세력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데서 생겨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음악이 독일 낭만파에 의해 일종의 종교체험으로까지 드높아지면서 동시에 음악에서 ‘침묵’이 점점 신성시된다. 비평 또한 말의 무력함을 웅변적으로 내세우는 레토릭으로, 침묵하는 청중 형성에 가담한다. 나아가 바야흐로 분업의 시대에, 음악 행위가 ‘하는 것(작곡가/연주가)’과 ‘향유하는 것(청중)’과 ‘말하는 것(비평가)’으로 점차 분화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태어난 음악산업에는 청중이 자기주장을 별로 하지 않고 조용히 있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었다. ‘음악은 말할 수 없다……’라는 레토릭에는 다분히 19세기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있었던 셈이다. 1장에서도 시사했듯이 말을 초월한 음악 체험은 존재한다. 그러나 음악 속에서 특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추구할 때 어쩌면 우리는 전전세기의 사상에 여전히 얽매여 있는지도 모른다. 

음악은 언어를 초월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철두철미하게 언어적으로 영위하는 것이다.


유려한 음악은 사실 말로써 음미하고, 숙고하며, 수정을 거쳐 방향을 잡은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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