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맡겨놨던 무거운 짐을 챙겨가는 알렉스는 자동차로 데려다준다 해도 한사코 마다한다. 타인의 시간을 빼앗는 것보다 무거운 짐을 옮기는 것이 마음 가벼운 일이라는 걸 알아채지만, 혹시나 하고 다시 한번 제의한다. 그는 단호하게 다시 한번 거절한다. 지나친 호의는 자기도 모르게 타인을 길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한다. 

자식을 곁에 묶어두고 싶어 하는 부모의 잘못된 권력은 사랑, 희생, 가족주의라는 가면을 쓴다. 최고의 부모는 자식을 곁에 묶어두지 않는다. 자식을 키우는 순수한 목적은 자식에게 더 이상 부모가 필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현비가 학교에서 어떤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탐탁지 않은 결과를 듣고 실망한 내 표정을 읽은 현비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왜 엄마 인생인 것처럼 반응해?”


나는 갑자기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망도 현비 몫이므로 함부로 가로채서는 안 된다는, 그건 깨달음 이상의 각성이었다. 

“어제 밤에 현비를 픽업해줬는데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세 번 했어. 진심으로 감동했어.”


올비가 말한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다 아는 걸 가지고.”


내가 대꾸한다.


“다 아는 데서 새삼스러운 의미를 찾는 것, 미덕에 무심해지지 않는 것. 바로 그게 내 행복론이야.”


우리는 행운을 통제할 수 없지만 작은 요령은 부릴 수 있다. 이를테면, 다 아는 데서 새삼스러운 기쁨을 추출하고, 작고 사소한 즐거움에 무뎌지지 않는 능력을 키우는 기술, 우리에게 허락된 작은 기쁨과 행운을 발견해서 어쩔 수 없는 작고 큰 불행에 물 타기 하는 전략이 그것이다.

“너 아니? 사람들은 부탁하는 것만 해주라고 말해. 먼저 해줄 필요가 없다고. 한국말로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오지랖’이라고 해. 그런데 살면서 기분 좋은 사건은 말이지. 대부분 누군가의 오지랖 넘치는 행동 덕분이야.” 

“근데 너희 부모님은 1년에 동생과 올케한테 손주 학비로 엄청난 돈을 부쳐준다며? 올케한테 시어머니 참견 받기 싫으면 돈도 받지 말라고 해. 세상에 나가서 그 돈 번다고 생각해봐. 아마 상사 눈치 열배도 더 봐야 할걸.”


생각난 김에 덧붙인다.


“부모가 대주는 결혼 비용, 시부모님이 장만해주는 아파트 챙기면서 정신적 자유까지 누릴 수 있는 데 있으면 나한테도 좀 알려줘 봐.”

도움 주는 습관과 의존하는 습관은 한쌍으로 자란다. 본인이 스스로 산소호흡기를 착용해야 하는 규칙은 비행기 추락할 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물귀신처럼 같이 물에 빠져죽는 형국이지만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생각하는 혈연주의는 한국 부모의 유전자에 코딩이 된 것 같다.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면 부모로서 과업은 완성한 셈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생에서 배웠다. 부채 의식 없는 관계가 무릇 신성하다는 것도 말이다.

나는 시간을 쪼개는 것보다 시간을 보태는 것이 좋다. 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는 느긋하게 대화에 집중하고, 좋아하는 요리를 할 때는 색깔과 냄새, 요리하는 시간에 집중한다. 맛은 거기서 나온다. 인생도 비슷하다. 집중한다는 건, 현재의 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습관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외면 일기』에서 세 가지 질문에 대답했어.”


1. 나는 금주할 능력이 있는가? 있다.


2. 금주를 하기가 힘든가? 그렇다.


3. 금주를 해서 얻은 이득이 무엇인가? 없다.


올비는 나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미간에 힘주고 말한다.


“그래도 마시고 싶다는 생각과 싸워야 해.”


“근데 말이지. 내가 오늘, 이 한 잔을 안 마시고 잠자다가 죽으면 얼마나 후회할까?”


“아마 죽느라 후회할 틈이 없을 거야.”


“내가 아니라 이렇게 간절하게 마시고 싶은 한 잔 못 마시게 한 너 말이야. 너.”


내가 먼저 죽으면 와인 없는 소시송 신세가 될 남자는 뭐가 웃긴지 낄낄대며 웃는다. 

고장 날 염려 없고, 사용할 때마다 선물한 사람을 떠올리고, 가진 것을 계속 욕망하게 만든다면 성공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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