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훼손은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 생기는 일이 아닐까요. 세상은 잔인하고, 그런 세상에서 사람은 사람을 외면하고 버리고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도망칩니다. 사람은 남은 사람을 돕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위해 꺼리는 일도 합니다. 사람은 아파하면서도 버텨냅니다. 사람은 최악을 면하고도 훼손됩니다. 사람은 훼손되고도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딘가가 영영 망가진 대신, 무언가를 조금 더 이해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밝고 구김살 없이 자랐다, 티 없이 맑다, 같은 말들이 여성에게 칭찬으로 쓰일 때마다 칭찬은 비난을 포함하고 있다는 오래된 진실을 감지합니다. 그 칭찬엔 훼손된 여성에 대한 멸시가 들어 있어서,
이미 생겨버린 흉터를 개선하려면 거기에 다시 상처를 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어도 새로운 피부를 갖게 되니까요.
나는 훼손되는 동시에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똑돌이들은 동시대 한국 소설이 세계 고전에 비해 열등하다는 식의 확언을 즐겼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최근 한국 문학 내 흐름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오래전 수능을 준비할 즈음 읽었을 단편, 혹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소설이 자기가 가진 예시의 끝이라는 사실은 은폐했고……)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끊임없이 의견을 내고 싶어 했지만, 자기 시야의 한계와 당사자의 언어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했다. (대한민국에 대해 다 아는 듯 굴면서 여성인 내 현실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그들과 미술관이라도 함께 가는 날이면, 미술사적 개념이나 연보는 들을 수 있었지만, 해당 작품이 지금 여기, 그 자신 혹은 우리에게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선 들을 수 없었다.
학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조금 알 것 같아지는 순간들로 말미암아, 나는 각자 살면서 느끼고 간직해온 장면이 사람을 꽤 똑똑하게 만들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색색의 슬픔이나 길냥이의 울음, 영화의 장면같이 모호한 것들을 알고자 할 때 필요한 건 꼭 들어맞는 논리보다는 빈틈이 생기더라도 빗대고 포개어 볼 수 있는 각자의 기억이었다. 그런 기억을 가지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 다른 존재의 시야를 수용해보려는 시도, 몰라서 치솟는 감정과 그로 인해 행동하게 되는 찰나, 그리고 때론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도무지 타당하지 않을 순간에서야 잊지 못할 자기 기억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한번은 한 배운 남자가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내 말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감하는 겁니다. 그는 남자들의 폭력성을 다독이거나 키워주는 사회에 대해, 그 폭력성이 망가뜨리는 것들에 대해, 아니 그것들이 증명하는 이미 망가져 있는 남자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니까 남자인 네가 뭘 알아,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나는 아닌 척 가자미눈으로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윤리를 선취하려 드는 남자 중 도무지 믿음이 가는 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가 오래전 외국의 으슥한 골목에서 남자 여럿에게 성폭력을 당할 뻔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무력(無力)함과 무력(武力)을 이해한 사람 특유의 얼굴로 말했고, 그 얼굴은 나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조차 단번에 설득해버렸습니다. 그게 아니면 그의 불행이 나를 설득했는지도 모르죠.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듣고 보니 그가 썩 달라 보이더군요. 어떤 일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금 뭉클하게 연대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참으로 무시무시했는데, 그 후 종종 나는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 남자들을 전부 그 골목으로 보내고 싶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다 놀란 나머지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던 것입니다. 서로의 말을 이해한다는 건 정말 뭣 같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차라리 피해자가 되어버리길 바라는 마음과 나도 그 누구도 그딴 걸 모르면 좋겠는 마음, 피해자에 그만 이입하고 싶은 마음과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도 나서주길 바라는 마음, 그러면서도 피해 사실에 설득되는 마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그러진 마음들이죠.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던 내 마음과 싸우던 나는 이제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내 마음과 싸웁니다. 이상적인 여성상은 달라졌을 뿐 여전히 존재하고, 어떤 화장품과 옷을 고를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표정을 지을지 내 몸이 숱하게 훈련해온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내면화하려 듭니다. 가끔은 다정하게, 가끔은 뾰족하게, 가끔은 불행하게, 가끔은 있어 보이게.
인정하긴 싫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선한 의지란 정작 더 나은 삶으로 가고 싶어 하는 개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하니까요. 정말이지, 매번 화를 내지만 동시에 영원히 지속될 거 같은 분노는 내 안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패배도 그만하고 싶은데요. 가끔은 아예 그 마음들을 모른 척하고 싶은데요. 실은 내 삶이 혹사당하질 않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는데요. 강남에 살아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지만 강남, 살아보고 싶은데요. 근데 그러면서도 막상 강남 사는 놈이 그 따뜻하지만 힘없는 사람들의 모임 따위에 있었다면, 나나 기오성이나 술김에 외쳤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자격이 있느냐고, 너같이 배부른 놈에게 자격 같은 게, 씨발, 있느냐고.
이런 걸 생각하면 아무 데나 왁 소리 지르고 싶어지고 그걸 못 하니 으악거리며 웃는 거지요. 교육이 다 뭐랍니까. 정의감과 열패감이 원래 저들끼리 자주 엉킨다는 걸 내가 만난 선생 중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요. 좀 정의로워 보려고만 하면 자꾸 내 안의 열패감이 고개를 들어서. 얼굴이 화끈거려 급기야 가지고 있는 정의감을 통째로 내다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곤 합니다. 무겁긴 얼마나 무거운지 내다 버리지도 못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게 나쁜가요. 나를 포함해 내게 의미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곤궁함의 항상성에 대한 불만, 울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계속 울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 그런 걸 결코 누군가의 정체성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기, 이 모든 걸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내 무능 같은 게 반복되고 뒤섞일 때면 진절머리가 나는 걸 어떡합니까.
더도 덜도 아닌 적당한 선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 자신을 초과해볼 요량으로 장전해둔 최선을 억눌러야 했는데, 거기에는 인터넷쇼핑 중 최저가를 찾아 헤매다 오는 공허함 비슷한 게 있었다. 최저가 물건을 찾는 데 드는 시간처럼, 최선의 노력을 계량하는 데에도 품이 들었다. 할 만큼만 하는 데 드는 에너지는 꾸준히 그리고 놀랄 만큼 의욕을 빼앗아갔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사수는 가끔 참 잘한다고 격려해주었다. 큰 감흥은 없었다. 그 칭찬은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을지와는 무관했다. 오해를 살까 말하자면 사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고, 그가 내게 한 지적은 전혀 부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내내, 나의 최선이 저지른 실수는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뭘 하나 해도 최선을 다하렴. 항상 그게 중요한 거란다…….
그 시기 나는 피곤에 절은 엄마가 아침마다 최선을 다해 나를 격려할 때마다 정색을 일삼았다. 옛날 얘기 그만해. 평범한 이에게 함부로 최선을 요구하지 마.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최선은 그저 나를 소모하거나 바보로 만드는 일이야. 냉소적이고 재수 없게 인생의 진실을 꿰뚫고 있다는 듯 굴었다.
퇴근 후엔 엄마에게 한 말을 뉘우치며 언젠가 숨어들어 울었던 산책로를 찾아갔다. 산책로는 경사가 심한 대신 정상에서 뻥 뚫린 시야로 일몰을 볼 수 있었다. 퇴근 후 헉헉대면서 경사를 올랐다. 지친 몸을 쥐어짜 매일의 일몰에라도 온 힘을 다하면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아졌기 때문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엄마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했다. 최선을 다하는 일이 있다는 건 중요했다.
그러므로 실수가 내 안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건 단순히 내가 옹졸하거나 창피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실수로 인해 나는 평범한 이의 최선보다는 비범한 이의 평범한 방식이 중요한 사회의 원리를, 대체 가능한 일을 주어진 선만큼만 하면 되는 이의 슬픔을 깊게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