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죽음이 평등하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은 추위 같은 걸지도 몰랐다. 바꾸지는 못해도 조금 더 견디게 해주는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얼마 전에는 나조차 아침에 할머니에게 온 전화를 보고도 저녁에야 다시 걸었다. 이제는 부재중 전화가 할머니에게서 와 있어도 곧바로 전화하지 않는다. 몇 년째 입어온 코트가 너무 얇고 춥다고 느낀 날에, 잘 차려입고 나가야 하는데 옷장에 마땅한 겨울옷이 없다고 느낀 날에,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 어느 날에, 나는 할머니에게 보낼 생필품을 주문하며 잠깐 생각했다.
할머니, 언제 가?
혹시 할머니가 정말 죽으면, 나는 내가 했던 생각들을 뉘우치며 많이 울까. 할머니가 정말 죽으면, 할머니의 영혼은 내가 했던 생각들을 알아채고 많이 슬퍼할까. 무심코 삼켰던 말조차 이제는 돌이킬 수 없기에, 장례식장의 사람들은 그렇게 우나.
잘 모르겠다. 다만 비로소 주변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너무 거듭 각오하다 보면, 차라리 무언가가 그 각오를 끝내주길 바라게 되기도 한다는 것. 이제 나는 그들이 할머니가 죽기를 기다린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 더 어른이 된 것도 같다.
그러나 나른한 내 하루는 무척 튼튼해서 잘 무너지지 않는 것 같고, 어쩌면 그렇게 착각하는 방식으로만 이어질 만큼 연약한 것 같다. 그도 아니라면 일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픔을 몰래몰래 몰아서 잘 해치워온 것일 수도 있다. 설거지를 하다가, 아무도 없는 산책로를 걷다가, 빈 화면 앞에 앉아 있다가, 내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다가, 나는 몰아서 하늘을 보고, 몰아서 눈물을 쏟고, 몰아서 유감스러워하고, 몰아서 활짝 웃는다.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을 즈음 잠에 든다. 미리 해봤자 어차피 언제나 모자랄 것이다.
다만 수신되지 않는 전화를 아침저녁으로 걸었던 날들이 무색하리만큼, 요즈음엔 길에서 잘 울지 않는다. 거울에 얼핏 비친 내 얼굴은 영영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빚 앞의 채무자처럼 덤덤해 보였다.
늘 내가 속하고자 하는 세상에 잘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한 태도는 청소년기 우정에서는 비교적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에게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하라고, 사랑받는 존재이자 기쁨이 되라고 강권하는 사회에서는 충분히 문제적이다. 그럼에도 자기 안에 새겨진 관성을 처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무렵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던 친구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시부모에게 잘해야 하는 것보다도, 사랑하는 이와 그가 속한 세계에 잘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내가 밥을 차려주고 싶으면 어떡하지? 그의 집에 갔는데 내가 나서서 과일을 깎으면 어떡하지? 아이를 낳았는데 당연하다는 듯 내가 애를 떠맡으면 어떡하지? 걔를 사랑하느라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이의 세상에서 이 일이 반복되면 어떡하지?
나와 내 주변 여자들에게 고민의 공유는 중요했다. 그건 우리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자꾸 스스로를 잃을 만큼 타인을 헤아리려 들었던 것이다.
반면 남자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하긴커녕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초조하게 혹은 거칠게 물어왔다. 그래서 너는 명절에 너희 집부터 갈 거야? 우리 집에서 설거지 안 하고 과일 안 깎을 거야? 진짜 집안일 안 할 거야? 밥 안 차려줄 거야? 너 할 일 하겠다고 이기적으로 애를 버릴 거야?
이 산 이후로 나도 모르게 동거인의 밥을 챙기거나 집안일을 해치우려 든다. 동거인이 선을 그어줘도 동거인의 가족에게 무심코 다가가고야 만다. 거기엔 애정하는 이에게 환심을 사려드는 나의 버릇이, 타인의 기쁨이 되는 기쁨을 일찌감치 깨우친 나의 성향이, 무엇보다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옆집 할머니의 말이, 나를 통과한 숱한 맥락들이 겹겹이 존재한다. 동거인을 사랑하는 나의 방식엔 나를 훈련시킨 세상의 흔적들이 묻어 있다. 그것들은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 내게 언제나 가장 큰 의미라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괴롭혀왔다. 여전히 타인의 기쁨이 되어야만 하는 슬픔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나의 충동과 버릇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오염시키고, 타인을 너무 헤아리다 못해 나를 잃어버릴 거 같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타인의 기쁨이 되는 기쁨을, 내게 중요한 이에게 사랑받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오늘날 내가 원하는 여성상과 실제 나 사이에서 이렇듯 다툼이 벌어진다. 그럴 땐 여름날 시원찮은 에어컨을 바라보듯 거울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느끼는 게 과로인지 슬픔인지 혼동하면서. 그저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 느낌이 또렷한 신호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필요하다는, 그리고 중요하다는 신호.
그 후로도 이따금 그의 계정을 들여다봅니다. 올라오는 게시물의 무게에 이전처럼 망설이다가, 어떤 이야기든 그 이야기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국 ‘좋아요’를 누르면서요. 그럴 때마다 시간은 순간 느려지고 나는 느릿느릿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와 고인이 남긴 기록에 이유 없이 흐뭇했던 마음이 이제는 저려오는 일에 대해서. 화면 너머 먼 거리의 나에게까지 묻어날 정도인 슬픔의 규모, 그로 인해 그가 보내고 있을 무한히 느린 시간에 대해서. 눈 한 번 마주친 적 없고 몸짓 한 번 본 적 없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어느새 영향을 받고야 마는 일에 대해서.
거기엔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생겨난 무언가가 분명히 있고. 그게 작동하지 않을 때, 과연 나는 무엇일 수 있을지…….
나는 그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멀리에서나마 거기 답해보려 애쓰는 일이 관계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하는 것도요.
펜을 잡으면 쓸 것을 찾고, 청소기를 들고 있으면 청소를 하게 된다. 그때는 뾰족한 문장들,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는 말들을 쥐고 다녔다. 처음엔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20대 내내 나는 여성을 둘러싼 사회의 억압이나 나를 과녁으로 삼는 남자들로 인해 자주 취약해졌고, 그러면서 타인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궁금해하며 나 자신을 집요하게 밀어붙이곤 했다. 그러나 반대로 가끔은, 타인이 나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상대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런 것이야말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지 않을까?
타인에게서 나 자신의 밑바닥을 보는 걸로 더는 즐거워하지 않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그 사실이 놀랍다. 나는 지금의 기준에 맞추어 과거의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왜곡해버린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들에 맞추어 거기 걸맞지 않은 나의 부분을 망각해버린다.
임신중절한 여자에게, 누군가는 다그치듯 죄책감과 모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보아도 내 마음은 빈방 마냥 깨끗합니다. 그 방엔 어렴풋한 먼지만이 내려앉아 있고, 나로선 그게 조금 쓸쓸하게 느껴져요. 가끔은 스스로가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변에선 분명 내가 잘 무너지고 휩쓸리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나도 아이를 원했다면 품고 낳고 기르지 않았을까요. 그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아이가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았던 것을 곧장 사랑하는 방법은 모릅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일 역시 묘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