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람의 피부를 나무껍질 같다고 말한 이들은 오래된 사람을 만져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내 손 안에 놓인 부드러운 손. 그날 내내 쥐고 있었던 명재의 손은 꼭 봄날의 목련잎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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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느라 승강장 주변을 오랫동안 서성이는 노인들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앱으로 택시를 부르게 된 다음부터, 아파트 앞 택시 승강장은 자주 비어 있었다.


  늦어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죄송해요. 더 지체했다가는 아르바이트에 늦을 게 분명해 결국 나는 할머니의 손을 조심스럽게 뗀 채 인사를 하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코너를 돌면서 힐끗 보니 할머니와 경비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달렸다. 공터도, 파란불이 꺼지기 직전 횡단보도도 단번에 건넜다. 속력을 낼수록, 골목과 탄천을 지나 번화가와 역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그들은 작아져 점이 되다가 끝내 지워졌다.


  볕 좋은 날 동네의 풍경 앞에 서면 그날의 달음박질이 떠오른다. 하루하루 축소되는 어떤 세상이 작아지고 점이 되고 그렇게 지워져버릴까 봐 겁이 난다. 몸이 불편하고 오래된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어쩔 땐 안도하고 어쩔 땐 숨이 찬다. 명재의 손도 내가 떼어낸 할머니의 손도 꽃같이 부드러워서, 그것이 내 안에서 흐드러질 때마다 나는 그 위로 미끄러진다. 

고백하자면 나는 웃음을 참느라 살짝 끝이 떨리던 네 목소리가 좋았어. 네 고요를 좋아하던 만큼이나 내가 그 고요에 작은 파도를 낼 수 있어서 좋았어. 

남은 게 희미할수록 기억은 더 자세히 말하려 드니까. 윤아, 나는 내가 남기길 원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고, 늘 그런 생각을 해. 

뜬금없지만 나이가 더해주는 축복은 유한함을 배운다는 것 같아. 정리정돈과는 영 거리가 멀었던 내가 이제는 공간을 자주 정리한다. 집에 뭘 들일 때마다 영원히 곁에 둘 것을 고르듯 신중을 거듭해. 주어진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무엇을 어떻게 놓을지 선택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삶은 순식간에 비좁아지니까. 그렇다고 유용한 물건만 두진 않아. 이를테면 저쪽 구석에 세워둔 LP는 오래전 돌아가신 동거인의 할아버지 것이지. 이제 누구도 그걸 듣지 않아. 그렇지만 굳이 남겨둔 과거를 볼 때마다, 나는 나로선 알지 못할 그의 할아버지를 생각해. 동거인은 자신의 방식으로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고, 자그마한 이 공간을 좀더 아름답게 하는 건 그런 거라고. 

미디어 속 주체적이고 세련된 할머니에 열광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얼마나 드문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때, 다수의 노인은 소외되는 게 아닐까. 혼자서도 꼿꼿한 개인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세상은, 그렇지 못한 노인을 세상으로부터 끊어내는 게 아닐까. 늙음에 주체 같은 단어를 붙여가며 내가 보지 않고 미뤄오던 것들은 무엇인가. 늙음을 혐오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말하면서도, 늙음에 바라고 요구하고 지워내려던 것들은 또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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