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와 과학자의 공통분모
- 실제로 음악가와 의사는 과학정신과 인간을 돕고자 하는 욕구를 공유한다. 그들은 마법사가 질병의 성격을 고려하여 특정 선법과 화음을 구사해 만든 노래로 환자들을 고쳤다는 상고시대의 잔재 같은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아르헤리치의 아버지
- 가끔은 딸을 일터에도 데리고 갔다. 그러다 상사에게 심하게 질책을 당한 어느 날 이후 다시는 직장에 돌아가지 않았다.
아르헤리치의 어머니
- 후아니타는 가히 산을 옮기고 바다와 맞설 만한 사람이었다. 광신 수준의 열혈 좌파였고 예외를 용납지 않는 정의감의 소유자였다. 이 대단한 여자가 당신을 돕기로 작정한다면 당신은 두 발 뻗고 자도 된다.
- 자기 행동의 적절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딸의 눈부신 발전을 감시하고 주도하다니, 이 어머니의 기개란 얼마나 대단한가!
- 후아니타는 고작 열한 살에 한 손으로는 여동생 아이다를, 다른 한 손으로는 남동생 베냐미노를 꼭 붙들고 가족의 품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어린 시절
- 그녀의 생각은 늘 재미있고 예상에서 벗어나지만 상당히 논리적이었다. 그녀의 말은 잘 따라가면서 들어야 한다. 훗날 그녀의 손가락이 그렇듯, 그녀의 정신은 여간 날래지 않았다.
-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에는 어떤 부인이 와서 피아노로 어렵지 않은 노래나 자장가를 연주해주었다.
- 남자로 태어나려다 잘못 태어난 여자처럼 노골적으로 사내연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르타는 부모에게 여자는 연약하고 가녀린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은 적 없는 아이 같았다.
- 하루는 그 아이가 이렇게 나왔다. “넌 피아노 못 치지!” 새로운 내기에 발끈한 마르타는 당장 피아노가 있는 낮잠방으로 갔다. 그러고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점심시간 끝나면 늘 듣는 자장가의 멜로디를 손가락 하나만 요리조리 움직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연주했다. 마르타는 상대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여러 멜로디를 연달아 쳤기 때문에 원장에게 들키고 말았다. 원장은 놀라고 당황해서 낮잠방 문간에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누가 가르쳐줬니?” “아무도 안 가르쳐줬는데요.” 마르타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계속해보렴.” 아이는 당황하지도 않고 계속 한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들겼다. 모든 음이 정확했고, 리듬도 잘 탔으며, 머뭇대는 기색이 없었다. 원장은 영재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영재의 객관적 표시들을 알아챌 만큼의 경험과 연륜은 있었다. 꼬마 아르헤리치는 원래 영민했지만 이 일은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딸
- 후안 마누엘은 딸에게 유아용 피아노를 사주었다. 건반이 한 옥타브 반밖에 없는 장난감이었다. 마르타는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주고도 무시당한 데 화가 나서 이 모욕적인 장난감 피아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이는 선생님처럼 진짜 피아노를 갖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마르타를 꾸중하지 않고 딸내미의 반항을 확실히 접수했다. 몇 주 뒤, 좀 더 큰 아동용 피아노가 집에 들어왔다.
스승 그리고 어머니
- 빈센초 스카라무차는 천재적인 교육자였지만 공포 그 자체이기도 했다. “우리 어머니는 선생님이 어떤 남자아이를 회초리로 스무 대나 때리는 모습도 보셨지요.”
- 후아니타는 늘 딸을 레슨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이 피아노 선생의 사소한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노트에 깔끔한 글씨로 기록했다. 스카라무차는 이 어머니를 높이 평가했다. 하루는 이런 말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아르헤리치 부인께서 제 조교가 되셔도 될 것 같습니다.
- 후아니타는 음악에 문외한이었지만 의지와 지성의 힘으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만약 아들이 물리학자였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연구를 돕고도 남았을 여자였다.
- 스카라무차는 아무리 간단한 연습도 표현력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연습은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는 동안에나 가능하지, 체르니나 아농의 피아노 교본에 매달려봐야 가망이 없다
- 그는 한 음이 세 단계를 거쳐 연주된다는 것을 보여주곤 했다. 손가락 끝의 말랑한 살을 매개로 건반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 근육은 이완된다. 굴근이 수축하면서 손은 건반에서 튕겨 나오고 허공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 요령을 잘 알면 연주를 하면서 지치지 않는다.
- 스카라무차는 자연스러운 팔의 무게와 손목의 힘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고 이 두 힘이 정확하게 팔꿈치와 손목의 중간쯤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건반을 치는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려면 손, 아래팔, 위팔이 S자를 그려야 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낼 때에는 C자를 그려야 한다.
- 이 지엄한 스승조차도 마르타가 없는 자리에서 그녀가 “피아노를 치기 위한 손”을 타고났다고 말했다.
- 어린 피아노 명인은 절대로 울지 않았다.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 확실한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온 힘을 다해 선생님 콧날에 있는 무사마귀만 노려보면서 눈물이 솟을 것 같은 위기를 넘기곤 했다.
- 제자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 의식을 넓히는 반론의 기술은 사실 스승의 기분과 별 상관없었다. 그는 하루는 똑같은 부분을 손목을 높여서 치게 하고 다음 날은 반대로 손목을 떨어뜨리고 치게 했다. 제자가 스스로 이치를 터득하려는 노력 없이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미친 듯이 화를 냈다
- 대부분의 왕명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받들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경을 친다. 그러나 소수의 왕명은, 그대로 했다가는 왕을 실망시킬 위험이 더 크기 때문에 따르지 않아야 한다.
다시 어린 시절
- 수영 선생은 마르타가 선수로 대성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했다. 뭐, 놀랄 일은 아니다. 코르토도 말하지 않았던가. “피아니스트는 일단 체력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