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연주는 아무리 현란한 기교로 포장하더라도 그 순간에만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가 될 뿐, 오래 여운을 남기는 연주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흔적을 남기는 연주가 가져야 할 것은 결국 ‘목소리’이다.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목소리를 가지느냐이다. 여운을 남기는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걸 잊지 못하고 계속 그 소리를 찾아다니게 되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거둘 수 없는 의심이 찾아왔을 때 그 하나의 성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연주자에겐 자기 것에 대한 고집도 필요하지만 그에 대한 의심도 함께 필요하다.
생각해 보면, 살아오면서 나에게 실망을 안기는 온갖 것들을 마주해야 했다. 돈도, 사람도, 사랑도, 직장도 모든 것이 결국 끝에 가서는 나의 기대를 실망시켰다. 하지만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끝끝내 나에게 실망을 주지 않은 것은 음악 하나뿐이었다.
글렌 굴드가 “우리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연주자”라고 칭하고 20세기 최고의 거장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러시아의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에게는 가끔씩 공연 후에 행하는 특이한 루틴이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는 자신이 오늘 연주한 그 연주장 무대의 피아노로 돌아가서 연습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노년의 거장은 텅 빈 객석 앞의 무대에서 몇 시간이고 궁리했으리라. 오늘 이 연주장에서 내가 못한 것은 무엇인가, 다음 연주에서는 어떻게 하면 나아질까.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 불안할 때, 또는 내가 나의 일을 충분히 사랑하는지 혼란스러울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여보아야 한다. 이 일을 해서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세상이 주는 다양하고 황홀한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할 것인가. 대답이 예스라면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