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과 부조리를 미담으로 덮으려는 사회가 문제적이란데에 동의한다. 신사와 노숙인‘으로 대비되는 이미지가 자칫 후자를 온정에 감사해야 할 수혜자로 박제화할 수 있음도, 아름다운 한순간을 이렇게나 많이 기억하며, 우리가 어제와 다음 날의 서울역은 마치 없는 것인 양 착각할 가능성도, 문제의 원인을 치열하게 파고들어 투쟁해야 할 사안에서약자를 동정하는 데 그치게 만드는 ‘분노 없는 연민‘은, 문제의 원인으로 악인을 지목하고 그에게 분노를 터뜨림으로써손쉽게 정의감을 얻는 ‘연민 없는 분노와 동전의 양면을 이룰 것이다. 그럼에도 난 이 ‘미담‘에 냉소할 수 없었다. 선의가 하나 더해진 세상이 그것마저 제해진 세상에 비해 그 크기만큼은 나을 거라 생각해서다. 설령 이를 통해 부당하게가진 자들이 회개하거나 너무 많이 가진 자들이 호주머니를열거나 서울역 노숙인을 향한 시민들의 시선이 당장 바뀌는것은 아닐지라도 찰나의 선의는 그 자체로 귀하며,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 - P103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전히답은 모른다. 다만 그 질문을 지금, 여기서 다시 받게 된다면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통 받는 네가 되어줄 수 없는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라고, 대체 무슨 소리인가 되묻는다면, 이 시를 들려주고 싶다.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곳이 한 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선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두부 사세요 내 마음을 건넸다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내 마음을 받아 넣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아기에게 먹일 것이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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