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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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내용을 차치하고 문학사상사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수많은 비난에도 꿋꿋하게 책 표지를 전세계에서 가장 구리게 디자인 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세우더니, 이 책의 디자인은 나름 신경을 쓴 흔적이 여실하다.(독자들에게 결국 무릎을 꿇었다고 봐도 되겠다)

그렇다고 똥색에 가까운 누런 색의 바탕이 이뻐 보이는 건 아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삽화 따위를 난삽하게 그려놓은 이전의 책들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으니,

노력하는 출판사는 칭찬해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 닉 혼비도 칭찬해주어야 한다, 아니 닉 혼비의 매니지먼트를 하는 회사를 칭찬해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혼비는 한국에서 나 말고도 매니아 층이 두터운 편일텐데, 이전의 편집 행태에 군소리 없이 한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다. 내가 알기론 닉 혼비의 모든 책의 판권이 문학사상사에 있는 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책은 요즘 전세계의 화두이자 한국 내 화두가 되어버린 자살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 같다. 여기서 ‘…같다라고 한 것은 당연히 이 책이 자살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인데, 역시 내 입장에서는 자살하지 말고 딱 90일만이라도 잘 살아보세 라는 삶에 대한 의미 찾기의 과정이라는 굵은 메시지보다는 사이 사이 들어가 있는 팝의 역사가 더 재미났어서 그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하고 싶다.

역자는 친절하게 맨 뒷장에 나와 있는 음악가들에 대한 짧은 브리핑을 곁들어주고 있는데, 그 브리핑이 필요없을만큼 음악사적인 유명세가 뛰어난 그룹이 아닌 그룹들에 대한 혼비의 행간 멘트를 이건 주인공인 제이제이의 대사를 통해 툭툭 던져진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혼비 자신이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 장애아가 있어서 그 아픔을 아는 만큼, 이 세상에는 운명의 사슬이라고 불리워질만한 천형 같은 불행을 껴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불행 자랑(?) 습관에도 동요하지 않는 혼비 특유의 냉정한 유머가 곳곳에 스며 있음을 확인하는 건 또 다른 재미이다. 위에 말한 제이제이나 골칫덩이 십대인 제스처럼, 어떤 사람들은 남들에겐 별 것이 아닌 록 음악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거나 여자친구에게 채였다거나 남자친구에게 채인 일로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고 자살을 생각하는데 혼비가 이런 아픔에 대해 익살맞지만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는 방식이 역시 꽤 노련하다.

누가 누구에게 네 불행은 내 불행보다 좀 작으니까 내 앞에서 말도 하지마라고 하는 것만큼 부당하며 또한 일체의 소통을 막는 행위도 없다는 것을 네 명의 주인공을 통해서 역설하면서, 서서히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가는 따스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혼비의 모습은, 전작들과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유사하지 않다.

 

한마디로 그는 이제 늙었다.

속칭 꼰대가 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었다.

좋아하는 축구 팀에 대한 광적인 열성을 몇십년간 그대로 지니면서 어른스러운 연애 한번 못하던 그가(피버 피치), 우아한 백수로 살아가는 40대 솔로의 피터팬 식 가볍고 지루한 냉소(어바웃 어 보이)에서 고단한 사람들을 손 마사지로 어루만지는 굿 뉴스가 등장하는 따스함으로 옮아가더니(진짜 좋은게 뭐지?), 이제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소통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 더 선명하게 그릴 뿐 아니라, 그 방법을 자신이 유쾌하게 제시할 수 있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몰락하는 세상의 어지러움에 책임감을 느끼는 어른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그 덕에 책은 이전보다 칼칼한 재미가 덜해졌지만, 그래도 오만하지 않은 어른으로,아름답게 늙어가는 혼비씨에게 박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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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4-0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님이 혼비 씨를 참 좋아하는구나. 싶은 페이퍼인데요.
이렇게 어른이 되어도, 혹은 늙지 않겠다고 똥고집을 피워도.
실은 어느쪽이어도 조금씩 투덜대며 이 사람을 지지하고 응원했을 거란 생각.
문학사상사가 전반적으로 변화하는 건지. 아님 잠깐 다른 행보를 보인 건지는
이후의 책을 봐야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ㅎㅎ

치니 2007-04-09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 지지와 응원 때문에 별 셋에서 넷으로 막판 수정했어요. 헤헤.
사실 책 자체만으로는 전과 같은 아쌀한 재미가 떨어지거든요.(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문학사상사에 대한 판단 유보는, 저 역시 대공감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