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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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책은 이십대 시절 구절마다 밑줄을 긋고 싶었던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이 두 번째이다.

두 권의 책만 읽어놓고도, 알라딘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대해 적혀져있는 페이퍼나 리뷰들을 훑어보던 중 <우생학>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는 글귀가 있었으나 내가 아는 러셀이 그런 찬성을 했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했다 하더라도 전체의 우생학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의 논리에 공감한다는 뜻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우격다짐을 근거 없이 하고 싶을 만큼 이 사람에 대한 내 호의는 뿌리가 깊다.

 

철저한 탐색이나 조사 없이 이렇게 줄기차게 가지고 있는 호의와, 글로 표현되었을 뿐인 인간 러셀이 갖는 매력에 대한 동경은 그럼 어디서 나오는가.

살다보면 누구나 당차게 주장하고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역설할 수만은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타협했기 때문이다. 일정 부분 타협하지 않을 수 없는 무수한 핑곗거리들을 대면서

어느 시점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진실에 대한 의지도,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는 희망도, 거대 경제 논리에 밀려 사라지기가 일쑤다.

적어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라도 드는 정도의 논리라도 갖추고 있어 보이는, 나름 올곧은 자기주장 마저도, 주장을 위한 주장,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선의 표현, 들끓는 자기 안의 미해결 난제들의 무대뽀 적인 배설 등을 제외하고 나면 몇 개 남지 않는 현실에서,

문득 나를 돌아보면어설프게 주장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려고 잠시 들었던 손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게 무지한 것을 깨닫고 심히 창피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바쁘다. 바쁘니까, 논의하고 결정지어야 할 일들에 대한 숙고를 해보지 않아서 무지하고, 무지해서 별로 잘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무기력하고, 무기력한 와중에 이런 나를 밥먹여주는 사회에 그나마 노동으로 보상하려 하지만, 사회는 소비자 없는 노동이 되풀이되어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다시 숙고하지 않은 소비를 해야 하고 그 소비의 대가로 또 노동을 해야 한다. 악순환, 그 자체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은 물론, 개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을만한 일에 조차도 사유하지 않고 시니컬한 노예로 살아가며, 이들 노예에게는 애석하게도 사유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새가 없다.

조금만 더 달리면 숨이 차서 쓰러질 거 같을지라도,

사유하느라 고삐를 늦추면 이 세계에서 도태되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떨며 지낸다.

그 점에서 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러셀이 백여 년 전에 우려했던 것에서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못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러셀의 시대로 돌아가서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반복적으로 들이대는, '게으른' 시간을 만들어 보고 그 시간을 사유에 써보는 것은 조금도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소리를 해서, 매번 어이없다는 반응을 들어야 했다.

잠시라도 시간을 완전히 헛되이 쓰고 싶어, 정말 아.... 하지 않으면서!”

러셀처럼 똑똑하고 논리정연하게 말하지 못해서이지,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같은 맥락이었던 걸 영 몰라주니 원. 차라리 다음에는 철딱서니 없다, 나잇값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대신, 입 다물고 이 책을 슬며시 권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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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x in the snow 2007-01-2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생학문제는 확실히 긍정적인 입장이었요. 물론 히틀러처럼 우성인자와 열성인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자의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요. 어떤 면에서는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이야기인 것도 같아요. 지금도, 기형아검사를 하고 있고, DNA상에서 유전되지 말아야 할 형질들을 선택적으로 없애기도 하잖아요. 그런면에서 러셀은 미래학자죠.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지식인중 한명라고 생각해요. 촘스키나 제인구달이나 수잔손택처럼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치니 2007-01-2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ox in the snow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헤헤 동지를 만난 거 같은 기쁨이...
(사실 님과는 매번 그런 느낌이 들어요)
이 책은 러셀의 잡문이라면 잡문이라 할만한 글들도 꽤 있고, 여기저기 기고된 것들을 모아놓은 책이라, 한편으로는 너무 큰 주제를 짧은 글에 담은거같기도 하고 약간 어설퍼보이기도 해요. 그래도 탕탕 주저없이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말하는 러셀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