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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 파피루스에서 e-북, 그리고 그 이후
니콜 하워드 지음, 송대범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영어 단어를 뜯어보는 연습을 하는 중인데 이렇게 말을 뜯어서 보면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문화, 사고방식 같은 것을 훔쳐볼수 있어서 흥미롭다.
어제 facile 이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글자를 뜯어보니
fac- 는 do, make 즉 만들고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고 -ile이라는 꼬리는 able과 같이 어떤것이 가능한, 된다는 의미였다. 무엇을 만들수 있고, 할수 있게하니까 수월하고 단순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facility라고 하면 facile하게 하는 것이므로 설비나 시설을 말한다. 우리가 생활하기에 수월하도록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facility인 것이다.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놓겠다는 것을 수월하게 하는 것들은 연필과 종이 따위일테고, 점차 사람들의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크고 작은 시설 따위를 facility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금 생뚱맞다싶지만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facility 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는 인류가 어떻게 책이라는 것을 탄생시켰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해왔고, 앞으로는 어떤 형태로 변화할 것인지 이야기 하는 책이다. 초기의 책은 종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책 속의 내용은 전부 손으로 적어야 했다. 그런 수고가 들었기 때문에 같은 책이 지금처럼 수백 권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책 한권을 만들면 수도원이나 학교에 보관을 했는데 이 때에도 책상에 쇠줄로 책을 묶어놓았기 때문에 책을 빌려갈 수 없었다. 그리고 빈 종이에 글자와 그림을 넣어 책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은 잉크 등의 화학물질에서 유독한 성분을 감수했다고도 한다. 인쇄술이라고 하면 국사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라고 말하는 금속활자에 관한 내용도 등장할까 싶었지만 구텐베르크 할아버지만 등장해서 아쉬웠다. 종이가 중국에서부터 서양으로 진출했다는 것은 참 신기했다.
책의 진화사라고 하면 굉장히 광범위한 것들을 다룰수밖에 없다. 책은 인쇄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인쇄술은 책을 찍어내는 것 뿐 아니라 산업혁명과 종교혁명 같은 크고 작은 인류의 역사적 사건과 물려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저작권에 대해 염려했던 것도 흥미로웠고, 지금 우리가 인터넷 파급의 부작용을 걱정하듯이 당시에는 소수만이 향유했던 책이 대중에 널리 퍼지면서 그것에 대해 염려하는 모습도 인상깊다.
식민지에서 인쇄업이 낙후된 데는 책의 인쇄와 배포에 대한 지방 관료들의 강한 거부감도 한몫을 했다. 그들은 인쇄업자들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우리에겐 공짜 학교도 인쇄물도 없는 점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옵고, 앞으로도 수백 년간 그런 것들이 없게 하소서. 왜냐하면 배움이 불복종과 이단과 분파를 낳게 했고, 인쇄가 그런 불손한 것들과 훌륭한 정부를 비방하는 중상 모략을 퍼뜨렸기 때문이옵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이 두 가지를 멀리하게 하소서." (158쪽)
'페이퍼백 혁명'이라 불리는 현상에 대해 하비 스와도스는 책에 대한 대중의 급작스런 관심고조에 대한 의구심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중의 독서 습관의 이런 혁명이, 앞으로 우리 출판계가 대중의 기호를 더 타락시키는 쓰레기의 홍수로 범람하게 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저가 고전을 더 많이 갖게 된다는 의미인지는 우리 사회와 문화의 발달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다."(267)
최근에는 양장본이라거나 제본 형식에 따라 다양한 책이 유행하고 있는 중에 '페이퍼백'이라는 형식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페이퍼백으로 유명한 '펭귄북스'의 엘런 레인은 출범할 때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도 재미있다. 지난해에 펭귄북스 70주년 컬렉션으로 전집을 구입했었는데 이 문장을 읽고 감회가 새로웠달까^^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 시리즈로는 돈벌이가 안 될 거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전제가 옳고, 펭귄의 책들이 책을 빌려보는 사람들을 사는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수단이 된다면, 지난 몇 년간 서점의 대중화와 책의 판매 증가를 위해 노력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내가 얼마간 기여를 했다는 느낌이 들것이다." (264)
그리고 옛날에는 책을 소장한 사람이 적었기에 읽을 때는 옆 사람도 들을 수 있도록 소리내어 읽었는데 집에서 혼자 읽을 때에도 소리내어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리내지 않고 눈과 머리로 읽는 모습은 생소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곧 e-book 류가 더 발전하고 그것들이 우리와 구세대에게도 익숙해지는 날이 올것이다. 나도 종이 책이 더 친숙하지만 휴대폰 e-book 서비스를 이용해보니 책을 잊고 가지고 나오지 않았을 때에도 휴대폰으로 꺼내어 언제 어디서나 독서를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편리했고, 특히 밤에 불을 끄고 이불 위에서 읽다가 형광등을 끄러 일어나지 않고 바로 잠들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 책에서는 e-book은 나무를 적게 사용하는 등 친환경적인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e-book 덕분에 방이 좁은 사람도 책더미에 치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며 기뻐했다.
우리는 종종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것에 대해 생각없이 소모하고, 사용하곤 한다. 마치 맛있는 치킨을 먹을 때 치킨용으로 자라는 닭들과 직업적으로 닭을 도살해야하는 사람들, 도살되고 잘리는 닭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것과 같다. 신기하게도 그럴때 치킨은 날때부터 튀김옷을 입고 나온 치킨 그자체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책이라고 하면 말끔한 흰 종이에 검은 글씨들이 촘촘히 들어앉아있는 것을 떠올린다. 둘둘 말린 책이라든가 공중에 떠다니는 책표지 따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e-book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조금 웅성거렸다. 그리고는 곧 그것에 적응했다. 나는 지금의 젊은 내가 아닌 앞으로의 나를 상상해본다. 할머니가 된 나는 과연 지금처럼 신문명을 '치킨'처럼 대할 수 있을까? 아마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 아버지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것 같다. 손자와 마주 앉아 상상도 못할 '신문명'을 공유하기는 힘들것 같다.
책은 어떠한가. '책=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앞으로 종이 책은 소멸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믿고 싶지 않지만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책은 몽상가들이나 읽는 것 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미래에는 작은 칩이라거나 전기 충격이면 많은 정보를 뇌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TV가 나온 후에도 여전히 라디오가 존재하듯이 종이책이 존재하리라 믿고 싶다.
책은 '지식의 전달'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기능도 함께 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한국의 미래' 같은 책도 읽지만 '옥희는 왜 계란을 먹었나' 같은 책도 읽는다. 이는 정말 옥희가 왜 계란을 먹었나 궁금해서도 그렇겠지만 책을 읽는 것으로 하나의 감성적인 충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초기의 책이 종교적인 소재를 전달하거나 영토확장을 위해 쓰여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여러 종류의 것이 나오는 것처럼 앞으로도 분명 지금의 책의 역할을 하는 것은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세대차이'나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될지라도 밖에 나가면 집 밥이 그리워지듯 그렇게 각 세대마다의 책을 찾아다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