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이시다 이라 지음, 인단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이시다 이라, 소설 보다는 이름으로 먼저 알게 된 것이 유감이랄까. 책 욕심이 많다보니 어떤 신간이 나왔는가와 함께 어떤 작가의 글이 맛나다더라 하는 소문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가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신간을 훑어보며 읽어볼만한 것은 따로 제목을 적어두고, 동호회에 올라오는 서평을 읽으면서 괜찮다 싶은 것도 적어둔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보니 자연히 '이시다 이라'라는 이름도 여러번 듣게 되었다. 그러던 중 [렌트]를 읽게 되었는데 공연보기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기에 동명의 뮤지컬을 먼저 떠올리고는 소설도 그런 느낌이겠지 하고 짐작했다가 막상 읽어보고 전혀 다른 내용에 놀랐던적이 있다. '이시다 이라'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책 제목에서 생긴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나에게는 꽤 당혹스러운 소설이었기에 작가에 대한 기대치도 뚝 떨어지고 말았었다. 관심을 두던 것에 약간의 실망을 하다가도 자꾸만 눈이 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엔젤]이 나왔을 때에도 '별로'라고 외면하면서도 한쪽 귀와 눈은 그 쪽으로 돌리고 있었나보다. 결국 읽어버렸으니까.

 

 올해는 '서평은 짧게'를 모토로 하였으나 그래봐야 23일 정도 지났을 뿐인데도 책을 읽는 것이나 서평을 쓰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무의식의 힘이 이런것인가보다. 무엇이든 일장일단이 있다는데 책읽기 보다 서평 쓰는데 정력을 쏟던 작년까지와 달리 요즘은 어렵게나마 책 읽는 동안 열심히일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 들기도 하다. 이 책을 이틀 동안 아주 열심히 읽었는데 서평을 쓰기 힘들다는 엄살을 떠는 중인가;

 

 가케이 준이치는 한 투자기업에 일한다. 그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에서 밀려나게 되고 그 후 투자기업을 세워 일하다가 어느날 밤 살해당하고 땅에 파묻힌다. 육신은 죽었으나 영혼이 살아서 속세를 휘돌아 다니는데 그에게는 2년간의 기억이 없기에 자신이 왜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부터 그간의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다. 의문을 풀기 위해 가케이 준이치의 영혼이 사건을 파헤치는 동안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없다는 말이 딱 맞는달까. 한 많은 영혼은 천국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는데 한을 풀면 천국으로 돌아간다는 한국의 전설과 달리 소설에서는 영혼도 현세에서 (무의미하더라도) 떠돌아다니면서 계속 지낼 수 있고, 원한다면 이 한 몸(영혼) 던져서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고 작열히 전사(두번죽는)할 수 있다고 설정되어 있다. 한을 품은 그가 어떤식으로 복수를 하는지, 그가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태껏 보아온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것과 그리 다른것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드라마를 많이 보고, 일본 소설을 읽어서 그런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난번 [렌트]를 읽을 때 느꼈던 이질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어찌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소설을 읽고나니 이 작가의 상상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다음은 그가 쓴 로맨스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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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080114-080117
 
 엄마의 존재는 꽤 '여성적인 것'들이다. 어릴적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셔서 집을 비우곤 했지만 엄마는 늘 엄마라는 존재가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려고 노력했다. '돈버는 엄마'나 '돈버는 아빠'라면 빗겨갈 수 있는 일일지라도 내 엄마는 꼭 엄마의 의무를 다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늘 엄마 냄새가 났다. 빨래를 하고 난 후의 피존냄새, 밥솥에서 나는 수증기 냄새, 걸레와 속옷을 삶아낸 가스 냄새, 계란말이 하는 냄새 등등. (그밖에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라거나 찌개가 끓는 따위의 청각적인 것도.) 그래서 얼마간 바쁜 일과 때문에 저녁늦게까지 엄마가 집을 비우면 아파트 복도를 걸을 때 다른집에서 나는 요리냄새와 아이들 소리가 부럽고, 빈 집에 들어오기 싫은 때가 있었다. 요즘도 가끔 엄마가 외출을 하면 나머지 세 식구는 굉장히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사소한 말장난을 할 때 아빠는 '여기는 내 집이니깐'이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그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집문서의 주인이야 누구든 그 집은 이미 엄마의 집이다, 라고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다. (심지어 아빠조차도 말이다!)
 
 적어도 내 시야 안에서는 '엄마란 이런 것, 엄마의 삶이란 이렇게 여자다운 것'이라 정의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도를 넘어선 페미니즘이 종종 등장하는 요즘,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여자의 세계'에 사는 나는 못되게도 엄마만은 그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란 존재는 늘 내 곁에 혹은 집 안에 있었던 것이라, 한시라도 곁에서 떨어지면 불안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바꿔 생각해보면 주로 '바깥사람'인 아버지들의 소외를 다룬 아버지 신드롬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집'이라는 도발적(?)이고 약간 당혹스럽기도 한 제목을 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엄마의 집이라니, 인정할 수 없다. 엄마의 집이 곧 나의 집이고 우리집이라면 모를까. 엄마는 늘 나와 함께이고 단독일 수 없다. (이렇게 적고나니 뭔가 병적이다.) 어쨌거나 그런 일부 두려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은 생각한것 처럼 도발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기대한 만큼 엄마를 독립적으로 두지 않아 실망했다. (엄마를 '우리집'에 꽁꽁 묶어두고 싶지만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집'이라고 해서 그 소재에 상당한 관심 레이더를 곤두 세우고 읽었다.)
 
 엄마에게 애인이 생겨도, 엄마의 화장이 짙어져도, 엄마가 내가 아닌 애인 때문에 행복해하고 슬퍼해도, 엄마에게 나를 뺀 인생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그리 화가 나지 않는것을 보면 엄마는 어디에 두어도 엄마랄까. 아니면 이게 진짜 내 이야기가 아닌 '이건 소설 속 이야기야'라며 읽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가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에 넋을 놓고 한참 생각해보기도 했다.
엄마와 아저씨는 정말 사랑을 하는 것일까? 182
나 같은 인간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182
"누군가의 언니란 어떤 존재일까?" -192
이런 질문 부터 여기에는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이 엄청 많다. 하루아침에 답을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얼른 정신 차리고 다시 책을 읽었지만 한번 쯤 던져봐도 될 질문들이 꽤 있다.
 
 전경린이라는 이름, 엄마의 집이라는 제목. 이 두가지에 기대를 걸었던 책이었다. 직전에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을 읽어서 그런지 소설 초반에 자꾸 그 책이 겹쳐 떨어지지 않아서 혼났다. 뭔가 허무하기도 하고, 2% 부족한 것 같다. 왠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함께 읽어야 할 것 같은 소설이다. 그럼 2%가 채워지려나?
 
 '엄마의 집' 속의 집은 불완전한 엄마의 집이다. 라는 것이 나의 실망 중 하나인데 어쩌면 그 불완전한 면이 진짜 완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뭐가 뭔지 모를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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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북 - 젊은 독서가의 초상
마이클 더다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마이클 더다는 어떤 사람일까? 책이 나오고 궁금한 마음에 작가 소개란을 읽어보았다. 서평으로 퓰리처상을 받은자 라고 한다. 서평으로 상을 받아? 국내에도 크고 작은 수상기관이 있기는 하지만 '퓰리처'라는 이름만으로도 어떤 서평을 썼길래... 하는 궁금증이 앞섰다. 책을 읽고 난 후 서평을 남겨두는 사람 중 하나로서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서평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독을 했을것이고, 분명 안경을 쓰고 있을거야. 마이클 더다를 상상해 보았다. 나는 일단 책을 쥐면 먼저 작가와 역자의 프로필을 읽는다. 책을 막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런 사소한 습관 없이 책을 읽다가 프로필을 읽기도 하고, 아에 책 내용만 읽기도 했는데 지금은 거의 의무가 되다시피 프로필을 먼저 읽는다. (그 과정에서 '저자의 프로필을 먼저 읽는 것은 책 내용에 대해 편견을 가질 수 있다'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무사히 극복.) 맞네, 마이클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책만 읽었을 것 처럼 생겼지만 책 속에 빠져 꽉 막혀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이클은 생각하고 회상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느날 자신의 우울하고 아이러니를 좋아하는 성격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것이 책에 관한 이야기였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읽거나, 스쳐 지나간 책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쓴 책이 바로 이것이다.

 

 2006년 부터 읽는 책마다 서평을 남기고 있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기도 했기에 마이클 더디의 서평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 '그의 인생 전체에 대한 서평'과도 같다. 나를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취미로 서평을 쓰는 사람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도 궁금했다. 일단 마이클의 서평은 방대한 자료를 포괄적으로 끌어담는다. 책 한 권을 읽어도 그가 가진 잠재적 독서량을 바탕으로 여러 배경지식을 동원하여 '믿을 수 있는' 서평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책을 읽은 사람답게 하나의 이야기에 덧붙는 책 또한 여러가지이다. 책이 가지를 뻗어 다른 책을 불러오곤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글은 굉장히 재미있다. 사소한 수식어 하나 하나가 유머러스하고 정곡을 찌르는 표현들이다. 그의 엄마는 이벤트의 여왕이었는데 하루는 엄마가 마이클과 그의 여자형제 모두를 데리고 마트에 가서 세일 상품을 하나씩 지정해주고 매진되기 전에 사오도록 지령을 내렸다. 아이들이 각자 전달받은 임무완수를 위해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우리는 가게 안으로 쳐들어가 부챗살처럼 매장으로 퍼져 나갔다.'라고 표현했다. '부챗살처럼' 이 부분은 정말 익살스럽다.

 

 나는 서평(혹은 여타의 글)을 쓰면서 '좀 더 다양한 표현'과 '신선한 단어'에 목말라하곤 했다. 이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따로 노트를 만들 생각도 하고 있다. 평소에 나는 대화할 때에도 남들과는 조금 다른 단어나 표현법을 사용하는데 이것도 내가 원하는 서평을 완성하는데 일정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어쩌면 마이클 더다에게 찾아가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읍소하는 것이 빠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언급되는 책의 대부분은 내가 모르거나 읽지 않은 것들이다. 이 책을 서평을 잘 쓰는 사람의 '독서일기' 쯤으로 평가 절하할 수 없는 이유는 마이클이 자기가 읽은 책을 언급할 때 책 이야기 뿐만 아니라 거기 담긴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맛나게 덧입혀 놓은 때문이다.

 

 내가 서평을 쓰기로 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책을 읽고 나서 한참 후에는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한 권을 읽어도 어제와 오늘의 느낌이 다를 것이므로 훗날 '내가 그 날은 어떤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는지' 회상하기 위함이었다. [오픈 북]을 읽으며 돌이켜보니 어릴적에 읽은 책들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 첫 번 째 책이었던 '파랑새'와 '동물소개 책'은 잊을 수 없다. 아빠는 당신이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독서광이었음에도 빠듯한 살림 때문에 다른 집 아이 방에는 한 세트씩은 꼭 자리잡고 있던 어린이 전집 한 세트도 딸에게 선물할 수 없었다. 대신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서점에 데려가서 내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게 해주셨다. 네 식구가 사는 단칸방에는 내가 읽고 싶은 책으로만 한 권씩 모였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서 메칸더 V 주제가를 들으며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내 인생이 책과 함께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라면 그 강물엔 어떤 물고기들이 살고 있을까. 마이클 더다의 [오픈북]을 읽고 나니 읽기 전에 가졌던 '대단한 서평가'에 대한 장벽 같은 것은 사라지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마이클 더다를 알게 되었다.

 

 책 읽기를 좋아함에도 아직 안경을 끼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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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 - 제10회 소설 스바루 신인상 수상작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5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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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소설을 읽다가 보면 아시아권이라서 그런지 서쪽 소설을 읽을때보다 동질감이 많이 느껴진다. 다른 부분도 있겠지만 일본의 옛날과 현재는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생각보다 더 많은 농촌 남자들이 외국인 여자와 결혼한다고 한다. 30년 정도 흐르면 혼혈인 아이들이 자라서 그들만의 크고 작은 조직을 형성할 것이고, 매번 '단일민족'을 강조하던 기존의 한국인의 가치관과 부딪힐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한국 여성이 외국 남성과 결혼하는 사례도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우리도 이제 실질적인 민족 포용정책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도 시골 총각들은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하곤 하나보다. 소설 안에서 보이는 깡촌 풍경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것 같다.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시골'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룰루랄라~ 그런 신나는 것들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시골이 즐거운 것은 아마도 아이들에게만 그런걸까요?"
해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든다. 너, 나 할것 없이 우리들은 도시 생활에 물들어 있다. 어느날 애인이 "나와 같이 농촌에서 논 밭을 갈며 살지 않겠니?"라고 묻는다면 과연 얼씨구나 지화자를 외칠수 있을까. 

 [오기와라 히로시]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오기와라 히로시, 오기와라 히로시...라고 계속 말을 해보아도 자꾸 잊혀졌다. 프로필을 보고 알았다. 그가 [내일의 기억]의 작가라는 것을. '내일의 기억'은 엄마와 작은 홀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제목이다. 젊은 남자는 나름 잘나가는 회사원에, 예쁜 부인이 있는 가장이다. 그에게 찾아온 알츠하이머. 흔한 소재라면 그렇게 되겠지만 늘 보던 억지 눈물을 자아내는 기억상실 환자의 이야기가 아닌, 조금은 현실에 다가간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여서 엄마와 나는 감동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벽장 속의 치요]가 있는데 이로써 오기와라 히로시는 더 이상 낯설은 이름이 아니었다.

 '우시아나'라는 나이트 클럽 같은 이름을 가진 시골 마을 청년회는 마을을 부흥하기로 마음먹고 모여서 의논한다. 마을 최고의 인텔리인 신이치는 도쿄에서 대학 생활 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광고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 그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하며 도쿄로 출발한다. 신이치의 친구는 겉으로는 일을 잘 처리해줄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신이치는 그것이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조금 후에야 알았다.

신이치는 거의 잊을 뻔했던 도쿄 말의 활용법을 기억해냈다.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는 우시아나의 ‘어떻게든 내가 할게’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는 그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 혹은 사정에 따라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이고, ‘조만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날을 말하는 것이다. 말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꼭 똥오줌을 싼 채로 그냥 내버려두는 것과 같다. 여기는 우시아나가 아니다. 도쿄다. 82쪽

 여차저차해서 부도 직전의 광고회사와 계약에 성공하여 '마을 맹글기'를 하는데 그게 엉뚱하게도 '우시아나 괴물 출현'이라는 제목의 것이다. 마을 부흥을 하고자 하는 우시아나 사람들과 순전히 '업무상'으로 우시아나에 오게 된 도시의 광고회사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취재진들.

 괴물 소동으로 마을이 북적거리고 난 후 괴물이 가짜라고 판명나자 취재진들은 모두 발길을 돌린다. 한때라도 북적거림을 경험한 우시아나 사람들의 욕심이 점점 부풀었다. 괴물 소동을 다시 한번 써먹자는 마을 사람들의 요구를 따르다가 그 소동 자체가 가짜였다는 것이 들통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허황된 방법인 괴물 따위는 던져버리고 마을에서 나는 특산품을 이용한 사업을 벌이기 시작한다.

매스컴이 사라지는 순간 관광객들도 함께 사라졌다. 263쪽

뭐, 더 이상 누구한테 어떤 말을 들어도 무섭지 않아유. 나도 다른 사람들도 지나치게 욕심을 냈어유. 바깥사람들은 우리들보다 훨씬 좋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허구. 즐겁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허구. 그런데 별루 그런 것 같지도 않았고. 어쨌든 세상에다가 이쪽을 좀 봐달라고 한 건디, 막상 그들이 우리를 봐주니께, 하, 그레 참, 성가시데...... 284쪽

 하지만 도시의 사람들은 여전히 시골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았다. 도쿄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료코는 우시아나로 시집을 가는데 그녀가 쓰는 우시아나 생활 칼럼은 도시에서 인기 상승이다. 
가끔 TV에서 귀농에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의 이면을 보면 화려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앨리트가 대부분이다. 그들 중 '어쩔수 없이 귀농하게 된' 사람은 거의 없다. 귀농을 해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귀농 생활을 도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게끔 각색해 놓은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입이 씁쓸해진다. 그들이 추운 겨울에 오들오들 떨면서 지내야 한다거나, 채소는 유기농으로만 먹는다거나, 화장실 시설도 없이 지낸다는 것을 자랑처럼 말할 때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귀농 생활을 동경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농부가 아닌 '시골의 귀족'들이었으니까. 부자가 하루정도 가난한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생활이었다. 사람이란 동물은 정말로 요상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도시에 살면 전원을 그리고 시골에 살면 도시를 그린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심보인지, 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우리 엄마는 자주 말했어요. 뒷마당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은 어딜 가봤자 발견되지 않는다고.” 120쪽

 도쿄로 돌아온 광고회사의 세 사람은 우시아나에서 먹은 새고기가 '도도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도새는 지난번 미술관에 갔을 때 몇백년 전 그림 안에 있던 새여서 기억이 생생하다.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도도새는 그들에게 무자비하게 포획되어 그들의 안마당에 사육되었고, 엄청난 속도로 멸종되었다고 한다. 나는 늘 어릴적에 읽었던 '파랑새' 동화를 찾고 있다. 어쩌면 나의 파랑새는 도쿄의 그들이 우시아나에서 지천으로 먹을 수 있었던 곰배새처럼 내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 그걸 모르고 눈먼 장님처럼 파랑새를 찾아 더듬거리는 것인지도.

 이 책을 읽기 전 '여기엔 분명 도시엔 없는 시골의 냄새가 날거야'라고 잔뜩 기대를 했었지만 실제로는 기대했던 것 만큼은 구수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도시 사람으로 자란 나에게 시골이란 '배워서 얻은 가치관'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화 [내일의 기억]에서 오기와라 히로시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주인공의 모습보다 그 병을 감지하고, 부정하고, 받아들이기 까지의 과정에 집중했다. 주인공과 아내 사에에도 부부만이 가질수 있는 애틋함과 동시에 부부이기 전에 남남으로서 가족내에 환자가 있을 때 생길수 있는 분열의 조짐까지 그려냈다. 무작정 찾아온 불청객처럼 소리 없이, 불행은 우리에게 찾아온다. 나는 늘 예쁜 색을 입힌 불행만을 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껍질을 벗은 무자비한 불행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발가벗은 불행에 대해서 느낄수 없을정도로 조금씩 초연해질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이번에도 뿌연색을 입힌 유리를 씌웠다가 벗겨낸 시골과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오기와라 히로시는 그런 작가이다.

 우리 모두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다. 그것은 어딘가에 버려놓은 각자의 몬기치 인형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아직 버리지 않은 그것.


몬기치. 맞아, 소녀 시절 허세도 질투도 화장도 필요 없덨던 그 무렵 이쁘지 않다고 늘 뒤로 돌려 앉혀놓았던 인형이 몬기치였다.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직 버리지 않았다. 266쪽


 세상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우선 메리 크리스마스다. 존 레논이 말한 대로다.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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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 파피루스에서 e-북, 그리고 그 이후
니콜 하워드 지음, 송대범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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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어 단어를 뜯어보는 연습을 하는 중인데 이렇게 말을 뜯어서 보면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문화, 사고방식 같은 것을 훔쳐볼수 있어서 흥미롭다.
어제 facile 이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글자를 뜯어보니
fac- 는 do, make 즉 만들고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고 -ile이라는 꼬리는 able과 같이 어떤것이 가능한, 된다는 의미였다. 무엇을 만들수 있고, 할수 있게하니까 수월하고 단순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facility라고 하면 facile하게 하는 것이므로 설비나 시설을 말한다. 우리가 생활하기에 수월하도록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facility인 것이다.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놓겠다는 것을 수월하게 하는 것들은 연필과 종이 따위일테고, 점차 사람들의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크고 작은 시설 따위를 facility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금 생뚱맞다싶지만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facility 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는 인류가 어떻게 책이라는 것을 탄생시켰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해왔고, 앞으로는 어떤 형태로 변화할 것인지 이야기 하는 책이다. 초기의 책은 종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책 속의 내용은 전부 손으로 적어야 했다. 그런 수고가 들었기 때문에 같은 책이 지금처럼 수백 권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책 한권을 만들면 수도원이나 학교에 보관을 했는데 이 때에도 책상에 쇠줄로 책을 묶어놓았기 때문에 책을 빌려갈 수 없었다. 그리고 빈 종이에 글자와 그림을 넣어 책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은 잉크 등의 화학물질에서 유독한 성분을 감수했다고도 한다. 인쇄술이라고 하면 국사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라고 말하는 금속활자에 관한 내용도 등장할까 싶었지만 구텐베르크 할아버지만 등장해서 아쉬웠다. 종이가 중국에서부터 서양으로 진출했다는 것은 참 신기했다.  

 책의 진화사라고 하면 굉장히 광범위한 것들을 다룰수밖에 없다. 책은 인쇄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인쇄술은 책을 찍어내는 것 뿐 아니라 산업혁명과 종교혁명 같은 크고 작은 인류의 역사적 사건과 물려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저작권에 대해 염려했던 것도 흥미로웠고, 지금 우리가 인터넷 파급의 부작용을 걱정하듯이 당시에는 소수만이 향유했던 책이 대중에 널리 퍼지면서 그것에 대해 염려하는 모습도 인상깊다. 

 식민지에서 인쇄업이 낙후된 데는 책의 인쇄와 배포에 대한 지방 관료들의 강한 거부감도 한몫을 했다. 그들은 인쇄업자들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우리에겐 공짜 학교도 인쇄물도 없는 점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옵고, 앞으로도 수백 년간 그런 것들이 없게 하소서. 왜냐하면 배움이 불복종과 이단과 분파를 낳게 했고, 인쇄가 그런 불손한 것들과 훌륭한 정부를 비방하는 중상 모략을 퍼뜨렸기 때문이옵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이 두 가지를 멀리하게 하소서." (158쪽)


'페이퍼백 혁명'이라 불리는 현상에 대해 하비 스와도스는 책에 대한 대중의 급작스런 관심고조에 대한 의구심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중의 독서 습관의 이런 혁명이, 앞으로 우리 출판계가 대중의 기호를 더 타락시키는 쓰레기의 홍수로 범람하게 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저가 고전을 더 많이 갖게 된다는 의미인지는 우리 사회와 문화의 발달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다."(267)


최근에는 양장본이라거나 제본 형식에 따라 다양한 책이 유행하고 있는 중에 '페이퍼백'이라는 형식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페이퍼백으로 유명한 '펭귄북스'의 엘런 레인은 출범할 때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도 재미있다. 지난해에 펭귄북스 70주년 컬렉션으로 전집을 구입했었는데 이 문장을 읽고 감회가 새로웠달까^^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 시리즈로는 돈벌이가 안 될 거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전제가 옳고, 펭귄의 책들이 책을 빌려보는 사람들을 사는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수단이 된다면, 지난 몇 년간 서점의 대중화와 책의 판매 증가를 위해 노력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내가 얼마간 기여를 했다는 느낌이 들것이다." (264)

 그리고 옛날에는 책을 소장한 사람이 적었기에 읽을 때는 옆 사람도 들을 수 있도록 소리내어 읽었는데 집에서 혼자 읽을 때에도 소리내어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리내지 않고 눈과 머리로 읽는 모습은 생소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곧 e-book 류가 더 발전하고 그것들이 우리와 구세대에게도 익숙해지는 날이 올것이다. 나도 종이 책이 더 친숙하지만 휴대폰 e-book 서비스를 이용해보니 책을 잊고 가지고 나오지 않았을 때에도 휴대폰으로 꺼내어 언제 어디서나 독서를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편리했고, 특히 밤에 불을 끄고 이불 위에서 읽다가 형광등을 끄러 일어나지 않고 바로 잠들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 책에서는 e-book은 나무를 적게 사용하는 등 친환경적인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e-book 덕분에 방이 좁은 사람도 책더미에 치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며 기뻐했다.

 우리는 종종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것에 대해 생각없이 소모하고, 사용하곤 한다. 마치 맛있는 치킨을 먹을 때 치킨용으로 자라는 닭들과 직업적으로 닭을 도살해야하는 사람들, 도살되고 잘리는 닭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것과 같다. 신기하게도 그럴때 치킨은 날때부터 튀김옷을 입고 나온 치킨 그자체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책이라고 하면 말끔한 흰 종이에 검은 글씨들이 촘촘히 들어앉아있는 것을 떠올린다. 둘둘 말린 책이라든가 공중에 떠다니는 책표지 따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e-book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조금 웅성거렸다. 그리고는 곧 그것에 적응했다. 나는 지금의 젊은 내가 아닌 앞으로의 나를 상상해본다. 할머니가 된 나는 과연 지금처럼 신문명을 '치킨'처럼 대할 수 있을까? 아마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 아버지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것 같다. 손자와 마주 앉아 상상도 못할 '신문명'을 공유하기는 힘들것 같다. 

 책은 어떠한가. '책=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앞으로 종이 책은 소멸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믿고 싶지 않지만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책은 몽상가들이나 읽는 것 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미래에는 작은 칩이라거나 전기 충격이면 많은 정보를 뇌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TV가 나온 후에도 여전히 라디오가 존재하듯이 종이책이 존재하리라 믿고 싶다. 

 책은 '지식의 전달'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기능도 함께 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한국의 미래' 같은 책도 읽지만 '옥희는 왜 계란을 먹었나' 같은 책도 읽는다. 이는 정말 옥희가 왜 계란을 먹었나 궁금해서도 그렇겠지만 책을 읽는 것으로 하나의 감성적인 충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초기의 책이 종교적인 소재를 전달하거나 영토확장을 위해 쓰여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여러 종류의 것이 나오는 것처럼 앞으로도 분명 지금의 책의 역할을 하는 것은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세대차이'나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될지라도 밖에 나가면 집 밥이 그리워지듯 그렇게 각 세대마다의 책을 찾아다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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