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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러 갑니다
가쿠타 미쓰요 지음, 송현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죽이러 갑니다>는 7개의 단편 모음이다. 단편의 제목들 중에서 이 책 전반의 주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죽이러 갑니다'이다. 책은 7개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은 '죽음'과 관련된다. 죽음은 참으로 여러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첫 단편 하나를 읽고 나서 만약 내가 '죽음'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면 선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과 악하고 잔인한 표정을 지은 얼굴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그릴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려봐야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떠올리는 죽음의 이미지는 단조롭다. 검고 탁한 색, 우울하거나 무서운 것. 하지만 죽음은 수명을 다한 후의 죽음과 전쟁에서의 참혹한 죽음, 자살, 교통사고, 살인 등의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안에 몰래 숨어있는 것은 다름아닌 '악의'이다. 죽는다는 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단정지었을 때 그 죽음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죽음 또는 죽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증오와 분노의 악의가 죽음을 가져오는 것, 인간을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없게 만든 조물주, 단순히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만 생각하는 악의 등등. 모든것이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정말 죽일것인지 아니면 그저 농담에 불과한지 정도의 차이일 뿐.
죽이러 갑니다.
'당신에게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죽이고플 만큼 미운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같다니 아이러니하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창의 날을 겨누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창을 거두고 사라진다면 나머지 한 사람이 창을 들고 있는 의미가 희미해진다.
버스에서 졸던 주인공 구리코는 뒷좌석에 앉은 두 여자의 대화를 듣다가 그중 한명이 "저는 지금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라고 내뱉는 말에 잠이 확 달아난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있어서 '죽이고 싶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본다. 내가 그랬듯 구리코도 처음에는 한명 혹은 여러명의 밉상들을 골라냈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죽일만큼'은 밉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책 속의 내용에 빠져드느라 미처 죽일 대상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없었지만 구리코는 무의식적으로 내면에 기생하고 있던 기분나쁜 존재를 발견해낸다. 죽이고 말거야, 없애고 말거야, 라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증오의 대상. 그녀의 증오는 시간이 갈수록 한겹씩 두껍게 덮어지고 있어서 기억해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았지만 늘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사루야마라는 초등학생 때의 선생님에 대한 증오였다. 책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구리코가 사루야마를 죽이고 싶은 사람으로 결정할만한 요소는 없다. 어린 아이였던 구리코가 착하고 인기많던 선생님에게 받았던 이유없는 미움, 그에대한 충격, 그리고 졸업식날 일어난 일 등을 흐린 필름을 돌리듯이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인가' 하고 되묻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듯 누군가의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이란 시간이 갈수록 추상적으로 변하는게 아닌가 싶다. 돌아보면 '내가 왜 그 애를 미워했었지? 우리가 왜 그렇게 싸웠더라?'라고 의아해했던 일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구리코의 증오심도 분명 과거에는 실제했었지만 현재에는 커다란 먼지덩어리처럼 모호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병들어 쇠약해지고 가족에게서도 버림받은것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사는 사루야마 선생님을 찾아간 구리코는 사루야마에게 "당신은 쓸모 없는 사람이에요. 가족에게 까지 버림받았군요."라며 상처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사루야마 자신이 구리코에게 저지른 일을 기억하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루야마는 구리코를 기억하지 못했고, 교사 시절의 일도 엉뚱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사루야마를 보며 구리코는 묘한 분노를 느낀다. 이별 후에 우리가 연애의 달콤했던 추억과 동시에 쓰고 아팠던 기억도 끄집어내 과거를 음미하는 것처럼 구리코에게도 사루야마란 그런 존재였을까.
만약 처음의 질문에서 '있지, 있어'라고 대답했다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버스 안에서 여자가 했던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싸우러 간다, 결말을 짓는다, 그런 게 아니라 빼앗긴 것을 되돌려 받으러 간다는 의미는 아닐까. -31
스위트 칠리소스
미도리는 남편 아쓰시와 '평화적으로 서로를 미워하며' 살고 있다. 간을 세게 해서 음식을 먹는 남편 때문에 음식을 둘로 나누어 조리하는 미도리는 엄마를 떠올린다. 아빠가 급사한 후로 엄마는 음식 선택과 조리 방법에 집착한다. 야채는 유기농, 외식은 금지, 흡연, 음주도 몸서리치며 반대하던 엄마. 미도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여자를 관찰하며 독살에 대해 생각한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역시 구체적인 인물들의 심리는 표현하지 않고 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되도록이면 독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의도적으로 독을 넣어 음식을 먹이는 것만이 독살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사먹는 행위가 정상이 아닌것 같다고도 생각해보았다. 본래 사람은 채집, 수렵, 농경을 하며 자급자족하던 동물이 아닌가. 그것을 화학 가공처리해서 저 멀리의 아프리카 음식까지 동네의 슈퍼마켓에서 사먹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음식을 의심 없이, 꺼림칙하지 않게 먹었던 것이 떠올랐다. 의도하지 않은 독살. 내가 정성껏 만든 밥상 안에 나도 모르는 독이 들어있었다면? 그 독은 농약이나 방부제 등의 화학물질일수도 있고, 밥을 먹게 될 사람에 대한 나의 증오일수도 있다.
십 엔짜리 동전으로든 저주로든 사람을 죽이는 일은 가능하다고 시게하루는 확신한다. 손톱깎이나 귀이개나 쏜에 든 어떤 물건이든 아무리 바보 같은 도구일지아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죽이는 것은 그 작은 물건이 아니니까. 그것을 손에 든 사람의 마음이니까. -176 (하늘의 도는 관람차 中)
잘 자, 나쁜 꿈 꾸지 말고
라로리-는 말은 '잘 자, 나쁜 꿈 꾸지 말고'라는 뜻이란다. 유난히 친하고 마음이 통했던 동생과 늘 잠들기 전에 휴대폰 문자로 라로리-라고 말한 후 잠드는 주인공. 조금 사귀다 헤어진 남자아이는 학교 화장실에 변태같은 유언비어를 도배해놓는데 전교의 학생들은 그 말을 장난 반으로 믿어버렸다. 배신감, 수치스러움에 복수를 결심하고 동생의 코치(?)로 몸을 만드는 주인공의 이야기.
그리고 방에 틀어 박혀 히키코모리가 된 뚱뚱한 딸과 지내는 주인공의 이야기인 <아름다운 딸>, 부인에게 외도를 들키고나서 떠나는 남자에게 '저주할거야'라고 퍼부었던 애인과 자기를 저주하고 있을거라 생각되는 부인 사이에서 정말로 저주를 받는게 아닌가 전전긍긍하는 남자의 이야기 <하늘을 도는 관람차>, '로리'라고 이름 붙인 자기 아이를 중절하고 새 애인과 살면서 키우는 개를 '로리'라고 부르는 여자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맑은 날 개를 태우고>와 마지막 이야기인 <우리의 도망>이 이어진다.
각각의 단편은 '착한결말'로 마무리 되고 있다.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 없고, 죽이더라도 달라지는 없을 것이라 깨닫는다는 평범하고 착한 결말은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 안의 분노를 대리해소 해줄 책이 아닐까 하는 기대에 못 미쳤다. <죽이러 갑니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에 어울리는 결말은 아닌 것 같다. 소설은 소설이니까 가끔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결말을 만들어서 독자를 대리만족 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작가가 '나쁜 결말'을 선택했다면 나는 과연 속이 후련했을까? 아마도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잔혹극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작가가 선택한 결말을 이해할수 있을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