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인단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놀랐다. 읽는 내내 놀랍고 궁금하고 기가 막혔다.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라는 재미있는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사신치바> <오듀본의 기도> <사막> <마왕> 등의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최신번역작이다. 법학부를 졸업한 이사카는 이번 작품에서 세 명의 중심인물 사이에 깍두기 처럼 끼어서 관찰자가 되는 '시나'로 둔갑했던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마 이사카 스스로도 '시나'가 되어 극중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쪽이 훨씬 신나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

 

 300페이지를 넘어가는 책을 고를 때는 재미를 우선으로 꼽는 나는 사실 이번에 좀 고민을 많이 했다. <사신치바>로 맨 처음 만난 이사카의 소설은 음식으로 치면 양념이 특이해서 흥미로웠지만 계속 먹고나면 양념맛 밖에 기억나지 않는달까. 하루키와 시게사토씨의 <소울 메이트(꿈에서 만나요)>에 나오는 단편 내용을 빌려오자면 '화려한 카펫에 가려진 다다미' 또는 '돈가스에 가려진 밥'의 느낌. 그래서 이번에도 양념만 잔뜩 뿌려 나온게 아닐까 의심했다. 게다가 400페이지가 넘는 두께. 일단 피하고 볼 일이었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디자인이 눈에 띄는 책이기도 하다. 인터넷에 올라온 신간 광고 페이지에서 이 책을 처음 보았는데 금새 반해버렸다. 이사카 코타로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이 책은 일단 재미가 있다. 전반적으로 '2년전 이야기'와 '현재 이야기'로 나뉘어 두 시점이 서로 번갈아가며 전개되는 형식인데 처음 시작할 때 부터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다. 결말을 치닫고 있을 무렵 잠시 책 읽는 것을 멈추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 두꺼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라고 되새겨보고 있자니 막상 정리되는건 간단했다. 동네의 애완동물들이 무참히 죽여진다. 세 명의 젊은이에 의해서 심심풀이로 자행되는 일이었는데 노숙을 하는 개와 고양이로 만족하지 않고 펫샵에서 파는 개와 고양이 등등 죄의식 없이 데려다가 차로 치어 죽이고 사지를 동강내서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세 명의 주인공 중 한명인 고토미는 펫샵 점원으로 부탄 사람인 도르지와 우연히 동물살해범들과 마주친다. 동물살해와 살해범, 그리고 주인공들간의 스토리는 그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말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래서 뭐?'라고 되물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연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추리소설도 잔혹극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청춘소설이냐? 그것도 아니다. 이 책은 단순하고, 재미있고, 사람을 궁금하게 하는 힘이 있으면서도 스토리가 복잡하지 않고 무겁지도 않다. 머리아프게 왜 그랬을까, 이 사람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따지지 않아도 되는 소설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비하면 심플한 스토리랄까. 하지만 어떤요소를 빼버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소설이다. 이 부분은 좀 지루하잖아, 라든지 왜 이렇게 질질 끄는거야,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사실 앞서 말했듯 나는 3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은 미리부터 '두렵다'고 낙인찍고 읽기를 시작해서 읽는 속도가 의지와는 상관 없이 느려진다. 이 책을 읽기전에도 분명 일주일은 넘게 걸릴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어제 잠들기 전부터 읽기 시작해서 눈이 아프도록 읽다가 잠들고 오늘 오후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똑바로 앉아서 다 읽어치웠다. 읽기 쉽고, 잘 넘어가고, 재미있는 책이다.

 

 일본 소설은 가볍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난해할 때가 많지만 표면적으로 보이는 내용은 정말 가볍다. 가끔은 그런 가벼움에 정신이 아찔해질 때가 있다. 너무 가벼워서 속이 울렁거린달까. 일본 소설을 몇 권에 걸쳐서 한꺼번에 읽으면 카페인 과다복용 직후 처럼 어지럽다. 비슷한 분위기와 비슷한 주제, 비슷하게 뭉뚱그려진 알듯 말듯한 대사들. 이 책에도 어김없이 일본작가와 올드 팝(마치 하루키와 재즈처럼), 가벼움이 녹아있지만 있던 울렁증도 앗아가버릴 정도로 산뜻하다. 아 개운해.

 

 확실히 <사신치바>보다 좋다. 훨씬. <사신치바>에서의 첫인상 때문에 이사카의 작품 모두에 등을 돌리려고 했던 것에 대해 그에게 진지하게 사과하고 싶을 정도이다. 여전히 그의 소설은 가볍지만 이 책에는 인정할만한 균형감이 있어서 좋다. 

 

 이 책에서 내가 찾은 반전은 두 가지이다. 그 중 하나는 미리 짐작했던 것이었고 부탄인이 부탄인이 아니었음은 예상하지 못했다. (스포일러?) 그 순간은 두 사람 모두를 번갈아가며 이해하려 노력했다. 부탄인과 또 다른 사람. 아참, 부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나라인지는 몰랐던 나라. 이사카는 왜 부탄이라는 나라를 골라다가 썼을까, 했던 궁금증은 책을 읽으면서 풀렸다. 그리고 부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실제로 내친김에 인터넷 검색도 좀 했다.) 책에서 하도 부탄인이 일본인과 닮았다고 해서 검색해보니 정말 그래서 놀랐다.(옷도 비슷한데?) 부탄에 여행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부탄은 외국인이 여행가면 하루에 300달러를 꼭 써야 한다고 한다. 정말일까?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나라. 부탄에 가려면 인도에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데 재미있다는 점에서 인도와 닮아있나.

 

 역자 후기를 읽으면서 의자에서 15cm정도 튀어올랐다. 역자인 인단비씨의 프로필을 읽고 단번에 이 사람 어쩌면 둘러 둘러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괜히 친근감을 느끼긴 했는데 후기에서 그녀(여자가 맞다면)는 가와사키가 나오는 꿈에 그가 '오다기리 죠(일본의 연예인)'로 등장했다고 했다. 게다가 가와사키 보다는 어쩌면 도르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과 똑같아서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유쾌하다고 할까. 꼬리가 휜 고양이 이름을 '꼬리끝동글말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의 낙천성. 이 책은 덤블링 같다. 튕겨 오르는 것이 가벼워서 날아오를 듯 하지만 바닥에 닿는 잠깐동안 무거워지는 그런 책. 이사카 코타로만의 유머감각도 살짝 살짝 음미하며 키득거려도 좋을듯 하다. 웰컴 투 이사카 월드.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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냠냠왕자 2007-06-2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보고갑니다
리뷰 담아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죽이러 갑니다
가쿠타 미쓰요 지음, 송현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죽이러 갑니다>는 7개의 단편 모음이다. 단편의 제목들 중에서 이 책 전반의 주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죽이러 갑니다'이다. 책은 7개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은 '죽음'과 관련된다. 죽음은 참으로 여러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첫 단편 하나를 읽고 나서 만약 내가 '죽음'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면 선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과 악하고 잔인한 표정을 지은 얼굴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그릴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려봐야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떠올리는 죽음의 이미지는 단조롭다. 검고 탁한 색, 우울하거나 무서운 것. 하지만 죽음은 수명을 다한 후의 죽음과 전쟁에서의 참혹한 죽음, 자살, 교통사고, 살인 등의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안에 몰래 숨어있는 것은 다름아닌 '악의'이다. 죽는다는 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단정지었을 때 그 죽음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죽음 또는 죽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증오와 분노의 악의가 죽음을 가져오는 것, 인간을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없게 만든 조물주, 단순히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만 생각하는 악의 등등. 모든것이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정말 죽일것인지 아니면 그저 농담에 불과한지 정도의 차이일 뿐.

 

죽이러 갑니다.

 '당신에게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죽이고플 만큼 미운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같다니 아이러니하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창의 날을 겨누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창을 거두고 사라진다면 나머지 한 사람이 창을 들고 있는 의미가 희미해진다.

 

 버스에서 졸던 주인공 구리코는 뒷좌석에 앉은 두 여자의 대화를 듣다가 그중 한명이 "저는 지금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라고 내뱉는 말에 잠이 확 달아난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있어서 '죽이고 싶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본다. 내가 그랬듯 구리코도 처음에는 한명 혹은 여러명의 밉상들을 골라냈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죽일만큼'은 밉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책 속의 내용에 빠져드느라 미처 죽일 대상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없었지만 구리코는 무의식적으로 내면에 기생하고 있던 기분나쁜 존재를 발견해낸다. 죽이고 말거야, 없애고 말거야, 라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증오의 대상. 그녀의 증오는 시간이 갈수록 한겹씩 두껍게 덮어지고 있어서 기억해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았지만 늘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사루야마라는 초등학생 때의 선생님에 대한 증오였다. 책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구리코가 사루야마를 죽이고 싶은 사람으로 결정할만한 요소는 없다. 어린 아이였던 구리코가 착하고 인기많던 선생님에게 받았던 이유없는 미움, 그에대한 충격, 그리고 졸업식날 일어난 일 등을 흐린 필름을 돌리듯이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인가' 하고 되묻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듯 누군가의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이란 시간이 갈수록 추상적으로 변하는게 아닌가 싶다. 돌아보면 '내가 왜 그 애를 미워했었지? 우리가 왜 그렇게 싸웠더라?'라고 의아해했던 일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구리코의 증오심도 분명 과거에는 실제했었지만 현재에는 커다란 먼지덩어리처럼 모호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병들어 쇠약해지고 가족에게서도 버림받은것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사는 사루야마 선생님을 찾아간 구리코는 사루야마에게 "당신은 쓸모 없는 사람이에요. 가족에게 까지 버림받았군요."라며 상처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사루야마 자신이 구리코에게 저지른 일을 기억하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루야마는 구리코를 기억하지 못했고, 교사 시절의 일도 엉뚱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사루야마를 보며 구리코는 묘한 분노를 느낀다. 이별 후에 우리가 연애의 달콤했던 추억과 동시에 쓰고 아팠던 기억도 끄집어내 과거를 음미하는 것처럼 구리코에게도 사루야마란 그런 존재였을까.

 

 만약 처음의 질문에서 '있지, 있어'라고 대답했다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버스 안에서 여자가 했던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싸우러 간다, 결말을 짓는다, 그런 게 아니라 빼앗긴 것을 되돌려 받으러 간다는 의미는 아닐까. -31

 

스위트 칠리소스

 미도리는 남편 아쓰시와 '평화적으로 서로를 미워하며' 살고 있다. 간을 세게 해서 음식을 먹는 남편 때문에 음식을 둘로 나누어 조리하는 미도리는 엄마를 떠올린다. 아빠가 급사한 후로 엄마는 음식 선택과 조리 방법에 집착한다. 야채는 유기농, 외식은 금지, 흡연, 음주도 몸서리치며 반대하던 엄마. 미도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여자를 관찰하며 독살에 대해 생각한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역시 구체적인 인물들의 심리는 표현하지 않고 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되도록이면 독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의도적으로 독을 넣어 음식을 먹이는 것만이 독살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사먹는 행위가 정상이 아닌것 같다고도 생각해보았다. 본래 사람은 채집, 수렵, 농경을 하며 자급자족하던 동물이 아닌가. 그것을 화학 가공처리해서 저 멀리의 아프리카 음식까지 동네의 슈퍼마켓에서 사먹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음식을 의심 없이, 꺼림칙하지 않게 먹었던 것이 떠올랐다. 의도하지 않은 독살. 내가 정성껏 만든 밥상 안에 나도 모르는 독이 들어있었다면? 그 독은 농약이나 방부제 등의 화학물질일수도 있고, 밥을 먹게 될 사람에 대한 나의 증오일수도 있다.

 

 십 엔짜리 동전으로든 저주로든 사람을 죽이는 일은 가능하다고 시게하루는 확신한다. 손톱깎이나 귀이개나 쏜에 든 어떤 물건이든 아무리 바보 같은 도구일지아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죽이는 것은 그 작은 물건이 아니니까. 그것을 손에 든 사람의 마음이니까. -176 (하늘의 도는 관람차 中)

 

잘 자, 나쁜 꿈 꾸지 말고

 라로리-는 말은 '잘 자, 나쁜 꿈 꾸지 말고'라는 뜻이란다. 유난히 친하고 마음이 통했던 동생과 늘 잠들기 전에 휴대폰 문자로 라로리-라고 말한 후 잠드는 주인공. 조금 사귀다 헤어진 남자아이는 학교 화장실에 변태같은 유언비어를 도배해놓는데 전교의 학생들은 그 말을 장난 반으로 믿어버렸다. 배신감, 수치스러움에 복수를 결심하고 동생의 코치(?)로 몸을 만드는 주인공의 이야기.

 

 그리고 방에 틀어 박혀 히키코모리가 된 뚱뚱한 딸과 지내는 주인공의 이야기인 <아름다운 딸>, 부인에게 외도를 들키고나서 떠나는 남자에게 '저주할거야'라고 퍼부었던 애인과 자기를 저주하고 있을거라 생각되는 부인 사이에서 정말로 저주를 받는게 아닌가 전전긍긍하는 남자의 이야기 <하늘을 도는 관람차>, '로리'라고 이름 붙인 자기 아이를 중절하고 새 애인과 살면서 키우는 개를 '로리'라고 부르는 여자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맑은 날 개를 태우고>와 마지막 이야기인 <우리의 도망>이 이어진다.

 

 각각의 단편은 '착한결말'로 마무리 되고 있다.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 없고, 죽이더라도 달라지는 없을 것이라 깨닫는다는 평범하고 착한 결말은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 안의 분노를 대리해소 해줄 책이 아닐까 하는 기대에 못 미쳤다. <죽이러 갑니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에 어울리는 결말은 아닌 것 같다. 소설은 소설이니까 가끔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결말을 만들어서 독자를 대리만족 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작가가 '나쁜 결말'을 선택했다면 나는 과연 속이 후련했을까? 아마도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잔혹극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작가가 선택한 결말을 이해할수 있을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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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는 강가에서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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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깊은 밤.

나는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었고 눈은 염증과 건조증으로 그냥 뜨고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TV나 컴퓨터 모니터, 책 보는 것은 당분간 멀리하세요."

안과 의사는 항생제 안약과 네불라이져를 할 때 쓰는 물약이 들어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플라스틱 앰플형 건조증 약을 처방해주었다. 종일 책을 봐야하는 사람에게 의사의 말은 죽으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늦게까지 전공책을 붙잡고 있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눈을 감고 일단 누웠다. 10를 넘긴 시간이라 이대로 잠드는 것은 아무래도 아깝다 싶어서 머리맡에 둔 책을 들었다.

<굽이치는 강가에서>.

지난 2월 카페의 회원들께 온다리쿠의 소설을 추천받아 구입한 책이다. 흰색 바탕에 초록의 숲, 파자마를 입은 소녀들이 뺑 둘러서 마치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몸을 내 맡기고 빙빙 돌기라도 하는 듯 한 일러스트가 책을 두른 진분홍의 띠지와 잘 어울렸다. 온다리쿠의 책은 한번도 읽지 않았지만 그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도 막연하게 이름만 아는 정도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서늘한 숲의 밤바람'이 떠올랐다. 읽기도 전에 떠올렸던 그 이미지가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아서 '와 정말 서늘한 바람이군' 하고 놀라기도 했다. 그녀의 책은 왠지 마츠모토 시오리의 그림과 닮아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날 밤 이불 위에 엎드려서 읽기 시작한 책을 1/3 이상 읽을 때까지 놓지 못했다. 뻑뻑해질대로 거칠어진 안구를 토닥여가며 읽기를 한시간.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잠잘 시간 앞에서는 다음날로 미루곤 하는데 이 책은 책장을 덮기가 망설여져 계속 읽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어제 새벽에 읽은 다음의 내용과 결말이 궁금해 죽겠어서 한쪽엔 거울(눈에 안약을 조준하기 위해)과 안약을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자후기에서 언급했듯 확실히 이 책은 어느장르라고 표현하기 힘들다. '소설'이라고만 분류할 뿐 이것이 성장소설인지 추리소설인지 스릴러인지 콕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앞서 말한 장르가 총망라된 책이라고 하기에도 설명이 부족한듯하다. 그래서 더욱 처음에 그랬듯 마지막까지 책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옛 기억을 더듬어야하는 장소로 초대받은 마리코, 그녀를 초대한 아름다운 가스미, 가스미와 떨어질 수 없는 요시노, 애정과 죄책감과 호기심을 가득 안고 찾아온 쓰키히코, 어린시절 누나를 잃은 아키오미, 그리고 마리코의 자리를 채우는 제 3자인 마오코. 모두 그저 평범하거나 조금 튀는 정도의 10대 고등학생이다. 아이답게 때묻지 않았고 새침하지만 알듯 말듯 비밀을 만들고, 그 비밀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그들. 무겁게 깔려 정체되어있는 늦 여름 밤의 공기가 곧 있을 차가운 가을 바람을 몰고오는 듯 그들은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쓰러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누군가 <"네 맘을 이해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 또한 서로의 상처를 자기만의 눈으로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서로 위안을 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그렇구나, 하고 인정했다.

 

 책을 읽고 난 후 이 안의 내용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여운이 짙은 소설이라 마치 모호하게 남아버린 거대한 웅덩이 같다. 굉장히 집중해서 읽었지만 나는 아직도 소녀와 소년들이 있던 그 자리에 홀로 서 있는듯한 느낌이다. 꿈에서 깨어난듯 '너희들 다 어디로 간거야?' 라며 나 혼자 그 집 안에 있는 듯하다.

 '운명'. 나는그렇게 생각해보았다. 이 거대한 웅덩이를 운명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다면 그렇게 표현해보기로.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이 아이들은 서로를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때론 동경하고 때론 경멸하면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가스미의 집에서 합숙을 한 후로 그들은 한 덩어리처럼 움직였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것 처럼. 어린 시절 아주 짧은 순간 옷깃을 스치듯이 얽혔던 그들의 이야기를 결론지으며 '이것은 운명'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하고도 책의 결말이 자꾸 나를 붙잡아서 나는 내내 그들이 있던 곳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 오늘밤은 '사라반드'라도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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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산 고양이 집 나가다
전지영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날씨 따땃하고 맑으며 가끔 흐리고, 가끔 비옴.


내 인생 최대의 고비였으며 자아상실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던 그날(언제게?).
바로 집으로 가기는 민망스럽기도 하고 책으로 구원받는 영혼이라 종로에가서 책을 골랐다.
암흑기였던 당시 그 정신으로 책을 고를 여유가 있었을까 싶다.
암흑기를 끝내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작정하고 있던 그때 내가 고른 책은 당연히 여행서였다.
지금도 그닥 가고싶은 곳은 아닌 뉴욕이 왜 그때는 그리도 가고 싶었을까.
그래. 알록달록한 색을 하고 있는 일러스트가 독특한 책 <뉴욕, 매혹당할 확률 104%>을 읽은 건 그날이었지.
S역으로 와서 스타벅스에 앉아 책 한권을 다 읽도록 일어서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카페 안 조명에 눈이 침침해지면 함께 사온 500원짜리 작은사이즈의 노트에 이제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끄적였다.
처음 만난 탄산 고양이.
처음 마신 핑크 레모네이드.
처음 겪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한해 하고 반년 후 인 5월초.
싸늘했던 겨울도, 새침했던 봄도 다 가버리는 듯 맑은날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이 하얗게 질리더니 비를 토해낸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맑은 날씨의 한줄기 비처럼
그날 스타벅스에서의 계획들과 뉴욕은 어디로 간걸까.
한결같은 나의 생활에도 무언가 상콤하게 변화를 주고싶은 요즘, 나는 여행서를 골라들었다.

<탄산고양이 집 나가다>

탄산고양이 전지영님의 이력은 독특하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다가(봐라봐라, 여기 솔깃하는 사람 많다.) 얼마 안되어서 관두고 대충 일러스트 그리면서 여행이나 다니면서 고양이나 키우면서 살고 있다.
자주 결혼압박을 받는 나이가 되었고 탄산고양이 답게 톡톡튀는 여행기를 쓸줄 안다. (물론 여기서 '대충'이란 보는 관점에 달려있다.)

그해 늦가을 스타벅스에서 만난 탄산고양이는 나의 우상.
'그래 나도!' 라고 소리치며 박수를 보내고 싶은 그녀의 당돌함과 씩씩함, 엉뚱함...
역시 세월이 변하면서 사람도 변하나보다.
겨우 한살 반 더먹었을 뿐인데도 여행기 속의 그녀가 달리보인다.
(시간상으로 볼 때 이 책이 뉴욕, 매혹당할 확률 104%보다 일찍 출판되었다. 그리고 나는 거꾸로 이 책을 나중에 읽었다.)
지금은 마흔을 바라보고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발랄하게 살고 있을 탄산고양이를 생각하니 왠지 이질적이다.
점점 '나도 별수없는 인간이다'라고 느낄 때가 바로 이럴때다.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회피하고, 젊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1년 반 전에 만났을 때와 달리 많은 공감을 할 수 없었던 것도 그 이유일까.

일주일 넘게 책을 붙잡고 있었지만 진도가 안나간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서'라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일기쓰듯 써내려간 것이라서 특별히 귀한 정보를 얻기에도, 다른 성향의 사람이 공감하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가끔 노처녀의 푸념과 상실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내용에 피식하긴 하지만 그것도 이미 '너무 오버했다'싶을 정도.
나 너무 매말랐나봐ㅠㅠ

'도쿄'여행편에서는 도대체 도쿄가서 뭐한거야? 싶어서 책을 덮어버릴까 했고
'뉴질랜드'여행편에서는 그나마 트래킹 하는 여정이 볼만했지만 결국에는 '뭐야 이게 끝이야?' 하고 마는 결말없는 드라마같은 느낌이다.
맨 뒤에 실린 'Friends-길에서 만난 친구들'에 실린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진과 '에필로그'의 글이야말로 이 책이 왜 쓰여졌는지 보여주는 글인것 같다.
그 앞의 250쪽에 달하는 여행기는 맨 뒤의 10페이지를 위해 있는 글 같달까.

'영어도 못하는 동양인 여자가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이라는 주제로 볼 때 탄산고양이의 여행이 순탄치 않았을 것은 이해가 된다.
나 또한 외국 여행가서 외국인과 대화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조선족이 하는 민박집에서는 왁자지껄한 한국인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당시에는 외국 가서 한국인 민박 하는 것에 대해 일찌감치 불만?이 있었음.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웃기는거지만;)
하지만 여행기를 쓸 정도의 여행이라면 최소한 자신의 여행기를 읽을 독자를 좀 배려하면 안되겠니?
아니면 정말로 일기로 혼자만 가지고 있던가.
혼자 트래킹 씩이나 했으면서 통성명을 한 사람은 손에 꼽고
숙소에서도 입을 거의 다물고 있고 주로 '관찰'만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이건 여행이 아니라 관광(see라는 의미에서)이나 공간이동 정도나 될까.

뉴질랜드에 다녀온 친구들의 여행담 때문에 '뉴질랜드'하면 꿈의 파라다이스를 떠올리던 나는 이 책 때문에 도리어 사이다에 탄산이 팍 빠진 느낌이다.
여행기를 읽을 때마다 생기는 '여행가고싶어 병'을 유발하지 않는 책이었음에 감사해야하는 것일까.

그나마 책을 읽은 일주일에 대해 위안이 되는 것은 마지막 다섯 장의 사진들(앞의 내용들을 상기 시키며 혼자 웃었다ㅋ)과 에필로그.

그리고 그녀가 중얼대듯 말했던 밑줄 그을만한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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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8-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이런 걸 출판할 용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문장력이나 내용이 형편없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저 역시 "상당히" 실망하면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런 개인적인 일기 수준의 책도 출판해 줄 정도로 대한민국 출판사의 문이 확 열려 있는 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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