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초한지 강의
이중텐 지음, 강주형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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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이문열 편역의 <삼국지>를 읽고 사족이 너무 많아 삼국지 속 인물들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나관중의 삼국지가 아닌 이문열의 소설 삼국지를 읽는 듯했으니. 그러다 황석영의 <삼국지>는 월북작가 박태원의 <삼국지>와 모본(모륜, 모종강 부자가 나본을 바탕으로 쓴 것을 말함)이 아닌 나본(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를 말함)을 참고했다고 해서 이 책으로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황석영의 <삼국지>를 구매하고 난 뒤 우연히 삼국지보다 한 시대 앞선 <초한지 강의>가 눈에 들어왔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각 시대의 영웅호걸들을 어떻게 표현했을까도 읽기를 재촉했다. 무엇보다 중국 내에서도 초한지에 대한 역사적 사료가 부족하고 국내에서는 소개된 책 역시 전무한 상태라 이 책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나 항우와 유방 그리고 한신과 소하 나아가 장량, 조참과 진평 등 한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이들을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생각에 책읽기를 앞당겼다.

그러나 <초한지 강의>를 읽어나가는 순간부터 이 책의 분야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인문 역사서로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교보문고에서 인문분야에 진열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경제경영서와 처세 쪽 분야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번역자의 약력에 눈이 갔다. 이 책을 번역한 번역자는 중국어를 전공했고, 중어중문대학원에 재학중이었지만, 역시나 경제경영서를 주로 번역한 번역자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방해가 되었던 번역자의 역사적 지식의 부족에서 오는 적절치 못한 단어 선택들과 거친 번역문, 그리고 협소한 어휘력과 격이 떨어지는 문장의 표현들이 '초한지'를 번역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특히나 대화체의 번역은 아동물과 청소년물을 연상케 할 정도여서 혹시 청소년용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품게도 했다.

"유방! 전란이 그치지 않는 건 다 우리 둘 때문이 아닌가? 이 전쟁은 우리끼리의 문제가 아니냔 말이다! 네가 정년 대장부라면 이리 나와라! 한번 맞붙어 보자고! 더 이상 애먼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말고 우리 둘이서 대결해 보자!"(108쪽)

"됐소, 됐어! 일어나시오. 죄 없는 승상을 하옥했으니 짐은 정말 나쁜 황제요. 짐이 승상을 투옥한 것도 다 '죄 없는 승상을 투옥한 나쁜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소. 됐소, 됐어.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지읍시다."(127쪽)

같은 책이라 해도 그 책이 놓여 있는 분야에 맞춰 요구하는 어휘력이 다르다고 본다. 경제경영서와 역사서가 다르듯 문체 또한 달라야 하지 않을까. 이런 면에서 이 책을 어느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로 혼란은 지속되었다. 

<초한지 강의>의 띠지문안처럼 " '초한지' 논쟁에 마침표를 찍은 걸작을 만나다!" "영웅들의 수수께끼 같은 역사적 사건이 이 한 권의 책으로 통쾌하게 풀린다!"라는 문안을 진정 살리고 싶었다면 번역자를 중국역사 학자가 번역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큰 책이라 하겠다.

물론 진나라에서 한나라로 넘어가는 과정에 역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의 면면을 엿볼 수 있어 좋은 면도 있었지만, 이 책의 저자 이중톈의 객관적 평가보다는 주관적 평가로 일관하고 있는 듯하여 과연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인물들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지에 대한 혼란만 가중되었다.

예를 든다면 이중톈은 주요 인물들을 평할 때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중심이 되어 설명되어야 함에도 유교와 도교의 개인적 선호도에 치중해서(저자는 유교보다 도교를 높이 평가하는 것을 자주 언급함(182쪽~183쪽 참조 이외 다수)) 인물들을 평가하고 있어 설득력을 잃고 있다. 게다가 인물과 인물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처세에 능한 사람은 옹호를 하고 그 반대인 사람은 비하하는 양상을 띠고 있어 인물들의 재조명이라는 말이 안타까웠다.(186쪽 참조 이외 다수)

저자의 이러한 경향은 이중톈의 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학자가 아닌 문학자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동녘출판사에서 출간된 비 역사학자인 조여항의 <광해군과 정인홍>도 이 책 <초한지 강의>에서 보여 주는 억측과 엉성한 구성을 담고 있듯이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 역사에 근거한 사실에 입각한 논리적 기술보다는 스토리텔링 형식의 야사식 추측성 서술이 난무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깊이보다는 재미와 흥미 위주의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말이 엉킹다고 할까. 한 단락에서 벌어지는 동어반복되는 구절도 장해물을 제공해 주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107쪽의 "~ 유방은 수레가 너무 느리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을 수레 밖으로 밀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후영은 말을 멈추고 수레에서 내려 아이들을 안고 수레에 탔습니다. 얼마쯤 가자 유방은 수레가 너무느리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밀어 버렸습니다.~" 116쪽에서는 "유방의 첫 번째 인재 활용법은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리더십을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로, 평소에 흔히들 쓰지만 제대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것'은 우선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선결된 후에 적재적소에 쓸 수 있습니다."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 책 <초한지 강의>는 초한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겠지만 야사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다른 책을 참고하여 객관성을 살려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을 계기로 초한지에 대해 다른 책을 더 읽어 보고자 정비석의 <초한지>를 구매했고, 그 앞선 시대인 풍몽룡의 <열국지>도 함께 구매했다.

관련 도서 묶어 읽기를 주로 하는 나로서는 한 나라의 역사의 줄기를 세워 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준 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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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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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 때 적극적이고 능동적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내 판단 기준으로 저 사람 책을 제대로 아는군 하는 이로부터 권해 받은 책을 수동적으로 넘겨 받을 때가 있다. 이번에 읽은 책 <남쪽으로 튀어!>는 주로 인문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읽는 후배로부터 그리고 선배로부터 동시에 권유를 받았다. 

"이거 읽어 봐, 죽여 줘~"

얼마나 죽여 주길래 머뭇거림도 없이 거의 강권으로 책을 안기나. 나는 그저 즐거운 불쾌감으로 거만하게 읽어 주기로 했다. 만화책 읽을 때처럼 책장이 넘어갔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이 책 정말 죽여 주는 책이었다. 

읽는 내내 일본의 사회주의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상당히 엘리트적 냄새가 풍기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꿈꿨다면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은 위로부터의 혁명을 꿈꿔온 온 듯한 느낌이었다.

두 권에 적지 않은 분량에 자칫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이 책은 출퇴근과 주말 하루 총 나흘 동안 산뜻하게 다 읽어 주었다. 정말이지 가독성이 죽여 주게 뛰어난 책이었다. 그리고 이 가독성이 마지막 휘슬이 울리는 그 순간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에 대단한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바로 이 책의 참맛이 아닌가 싶다.

시종일관 가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까? 

첫 번째 손가락을 꼽으면, 치고 빠지는 기술이다. 지로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나쁜 가쓰 녀석 따위가 대수겠냐!), 우에하라 이치로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내게도 이런 아비가 있었더라면), 우에하라 사쿠라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애증적 일들(많이 부러웠던 대목, 특히 돈 많은 외가가 어느날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났다!)이 교묘하게 치고 빠지기를 엉킴 없이 그리고 쉼없이 사이좋게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가독성 유지의 이유 두 번째 손가락을 꼽아 보자. 이 요주의 인물들이 마냥 문제만 일으키고 있지 않다는 것. 조용히 다음 단계를 아무런 고민 없이 뛰어넘는 나만의 해결사 역할들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즐겁고 고마운 것은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 기다려지고 시종 어떻게 될까에 조급증을 발병시켜, 책장을 넘기는 손이 눈의 속도를 참지 못하고 다음 장을 어서 빨리 넘기려 매만짐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 행동에 작가는 한 페이지 끝 단락에 다음을  기다리는 독자에 대한 작가의 예의를 슬쩍 끼어 넣었다고나 할까. 그런 배려성 문장이 곳곳에 숨어 있음을 보았다. 이 역시 가독성이란 차에 더욱 잘 달릴 수 있도록 휘발유를 뿌려 준 셈이다.

세 번째 손가락을 꼽는다. 오쿠다는 분명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자를 오타쿠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인물이다. 서서히 오타쿠로 만들어 가니 어찌 그의 책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소냐. 헤어나오기 더욱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가독성의 윤활유격인 휘발유에 엄청난 화력의 불까지 덤으로 언저 주었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어 가면서 우에하라 이치로라는 인물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세컨드로 난 유독 무카이가 마음에 들었다. 어린 녀석이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세월의 냄새가 났다. 세월이 묻어나는 어휘과 세월이 감겨 있는 문장력, 세월과 함께 달린 사고가 음 뭐랄까 달관자가 쉬 내뱉는 말들이라고나 할까. 또 유머는 어떻고. 지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카이 이 녀석 정말 열한 살, 맞아?" 이다. 

당연히 날마다 가야 하는 학교를 "왜 날이면 날마다 사서 고생이냐?" "하루씩 걸러서 다녀도 괜찮아"라는 지로의 아버지이자 지난 시대의 영웅, 우에하라 이치로. 이 대목도 마음에 들었다. 사회 제도를 거부하고 교육을 거부하고, 아니 모든 것을 거부한다기 보다 개인의 선택권과 자유보장권이 우선시해야 한다는 지로 아버님의 말씀에 공감 삼천만 배다!

그렇다면 나도 아나키스트? 아~ 그건 아니지만 때로는 나도 나라를 거부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고, 왜 이렇게 의무가 많냐를 외치면서 너희들한테 떨어진 책임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렸냐!를 외치고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아무튼 몸통은 못 되어도 깃털 정도는 되어 불끈불끈 해 보고 싶은 욕구가 종종 때때로 어쩌다가 가끔 발동이 되길 바랄 뿐이다.

언제나 방바닥을 가까이 하고 사는 우에하라 이치로, 그런 그를 자식들은 달갑게 보지 않는다. 큰딸 요코, 아들 지로, 막내딸 모모코. 이들은 뒹굴기를 직업이자 취미로 여기는 하늘이 점지해 준 아버지라는 관계에 강한 부정을 던지고 싶어한다. "엄마, 왜 아버지랑 결혼했어!"라는 말로.

하지만 이 세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과격파 운동권 출신임을 알기 전까지 그저 무능하고 마누라를 생활전선에 떠밀어 놓고 가끔 삥땅 뜯는 앵벌이 정도의 실업자 애비 정도로만 여긴다. 하지만 키 186에 건장한 체구와 지붕이 들썩들썩할 정도의 목소리를 가진 이치로에게도 취미이자 낙이 있었다. 바로 국가 공무원들, 즉 그가 그토록 부르짓는 소위 "국가의 개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날 가차없이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 공무원들은 우에하라 이치로에게 진정한 적수가 되지 못한다. 자로 잰 듯한 논리적 말들, 화수분 같은 풍부한 지식들, 신이 내린 풍채, 그리고 우러~엉 찬 목소리를 그 누가 이길소냐~~~ 그렇기 때문에 싱겁게도 언제나 늘 이치로의 KO승이다.

그런 이치로가 도쿄에 남겠다는 큰딸 요코만 남겨 두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이리오모테라는 남쪽에 있는 섬으로 간다. 그곳에서 지로는 전혀 다른 자신의 아버지를 보게 된다. 아버지가 일을 하는 것이다. 언제나 누워 있던 아버지에 익숙한 지로는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왠지 낯설지만 듬직하고 멋져 보인다.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 오기 얼마 전에 아버지의 이력을 친구 무카이의 도움으로 알게 된 지로는 이곳 섬에서 확인을 하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하게 경쾌한 웃음만을 선사하는 책이 아니다. 분명한 초등학교 6학년의 성장소설이지만, 그 속에 현재 사회에 지배층과 중간 관리층이 되어 있는 운동권 출신들의 딜레마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시민단체들의 권력지향적 운동에도 일침을 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치로가 말한 것처럼 조직이 커지면 그 안에서는 순수성보다 권력 다툼으로 얼룩이 진다는 그 말이 현재 우리 사회에 널려 있는 시민단체가 한번쯤 되새겨 봤으면 하는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면 <남쪽으로 튀어!>는 여러모로 유익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쯤 읽어 보길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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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쉽게 하기 - 기초 드로잉 -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배운다! 스케치 쉽게 하기 2
김충원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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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파서 단단하게 다지고 그 다진 땅 위에 주춧돌을 놓아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얻는다. 이 책이 나아가는 순서다.

누구나 한번쯤은 4B연필을 들고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멋들어진 스케치를 해 보길 꿈꾼다. 손목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따라 연필선은 때로는 굵고 때로는 가늘게 그리고 진하고 흐리게를 반복하면서 한껏 뽑낼 수 있기를 바란다. 

정말 손 쉽게 스케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텍스트와 예제 그림을 번갈아 가며 눈길을 주면서 때로는 나도 모르게 한쪽 손이 마치 4B연필을 쥐고 있는양 스케치의 손놀림을 하고 있었다. 그림의 구도와 각도를 잡아 가면서.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책에 시선을 꽂았다.

이 책의 부록격인 기초 드로잉 연습장을 빼면 65쪽의 분량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수영 속성반에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에 숨쉬기와 발동작, 물속에서 구르기를 하고, 다음날은 키판 들고 발차기를 하면서 수영장 왕복 턴하기를 배우는 것과 같이, 이 책 역시 적게는 4쪽에서 많게는 8쪽으로 스케치의 기술적인 부분을 빠르게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케치를 하기 전에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저자는 시종일관 강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잘못된 옛 관념과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다. 세밀한 비판적 관찰을 뒤로 하고 실제와 다르게 사람의 머리를 크게 그린는 등의 자세는 관찰자적 스케치를 방해하고 실력향상을 저해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이는 어릴 적에나 있어야지 이성이 자리잡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존재한다면 그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스케치 배우기를 포기하란다. 이해를 돋우기 위해 예를 들어 보자면 인물 스케치를 할 때 분명 모델은 장동건인데 결과물은 짱구인 것이다. 이해가 갈런지. 

동양화를 그리기 전에 선 연습을 많이 하고, 붓으로 글씨의 첫 자를 쓰기 전에 선 연습을 많이 하듯이 스케치 역시 선이 생명이니 선 연습이 필수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다. 다양한 직선이 존재하고(왼쪽에서 시작되는 선, 오른쪽에서 시작되는 선, 위에서 혹은 아래에서, 그리고 사선으로 시작되는 선), 다양한 곡선이 존재하고, 다양한 짧은 선이 존재하듯이 그 연습부터 시작하라고 한다. 

어떤 사물을 놓고 스케치를 할 때 무수히 많은 선들이, 무수히 다양한 선들이 사용되기 때문에 당연한 잔소리가 아닐 수 없다. 저자 역시 선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을 외면하고 당장 사람을 앞에 앉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스케치가 아닌 그냥 단순한 모양 혹은 형태로 존재하는 그림(?)으로 머무르는 사단을 방지하자는 차원이니 친절 그 자체의 저자인 것이다. 

이 책의 순서대로, 그리고 일러 주는 잔소리대로 한다면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스케치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든다. 그만큼 많은 양의 연습이 따라야만 나오는 결과이겠지만 이 책이 일러 주는 대로 한다면 가능하리라 본다. 쉬운 설명과 친절한 스케치 예제들이 한껏 이해를 돋워 주기 때문에. 

이 책을 접하고 고마움을 표한다면 구도와 각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단지 차이점이라면 나 같은 경우는 그림을 거의 다 그린 시점에서 구도가 나오고 각도는 그려가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구도와 각도는 처음부터 정확하게 잡아야 함을 알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 같이 스케치에 기초는 없고, 유화 그림은 취미로 그리는 이들이 갖는 단점인 스케치할 때 그 어떤 방법으로 해도 선이 뭉게지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대를 많이 한 것이 연필을 세워도 눕혀도 선이 뭉게지는 나 같은 사람들, 그리고 연필선이 선명하지 못하고 새로 막 깎은 연필로 스케치를 해도 선이 명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팁이 없었다는 것이 좀 아쉬웠다. 아무래도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미술학원으로 가 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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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 사랑의 여섯 가지 이름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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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색의 설탕이 온전히 달콤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거친 손길과 기억하기 싫은 공정 과정, 그리고 원치 않는 단장을 거쳐야 한다. 오롯이 원하는 그 맛, 달콤함을 남기기까지 고통은 물론 자존심과 수치심까지 내던져야 하는 것이다.

사랑,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로맨틱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안다. 그러다가도 세상을 바라보던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아무도 감지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면 그 누구보다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고 갈망한다. 어릴 때 한번쯤 기다려 봤을 백마탄 왕자님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분좋은 감상도 감았던 두 눈을 다시 뜨게 되면 꿈은 단지 꿈일 뿐이라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하루에 수도 없이 이성과 감성 사이를 오간다.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것이 함께 따라붙는 사랑. 눈에 보이지도 잡을 수도 없지만, 사랑은 그 무엇보다 강렬한 효과를 주는 환각제로 현실적 이성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러다 그 사랑에 자신의 삶이 인생이 담보가 되고, 되돌릴 수 없는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 때 사랑의 맛은 달지만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마치 덜 고통스러웠고 덜 수치스러웠던 그리고 단맛도 덜한 흑설탕보다 많은 고통과 수모를 당한 백설탕처럼 말이다.

사랑의 새로운 길을 열어 준 아지즈 네신, 그는 사랑에 대한 환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순수한 사랑 따윈 동화에서나 등장한다는 듯, 사랑을 선택한 이들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지독하게 가슴 시린 사랑, 가슴 쓰린 사랑, 죽어서도 아물지 않는 사랑, 깊은 상처로 패인 사랑. 네신은 무서운 냉정과 냉혹한 이성을 잃지 않으면서 지극히 부드러우면서 직설적인 말로 이야기한다.

마치 아버지가 잘못된 사랑에 눈이 먼 딸아이한테 말하듯이,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은 그리 달콤한 것만은 아니란다. 사랑에는 많은 상처와 아픔이 따른다는 걸 너는 알아야 한다."라며, "잊지 말아라, 내 딸아. 사랑도 현실이라는 것을"이라며 중저음의 근엄한 목소리로 우리 사랑을 갈망하는 독자들에게 들려 준다. 꽃 같고 솜사탕 같은 사랑일지라도 현실은 현실이고, 속일 수도 없고 온전한 사랑의 대가로 내 줘야 할 것이 많음을 때때로 혹은 자주 인식시킨다. 

그리고 네신은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과 양보 그리고 찾을 수 없는 분실물들이 많음 또한 상기시켜 준다. 낭만적인 사랑은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오직 파라다이스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현실을 알라고.

네신은 사랑이 흑설탕 같기를 바란다. 흰백의 설탕보다 단맛은 덜하더라도 모양이 보기 좋지 않더라도 빛이 탁하더라도 흑설탕 같은 사랑을 하길 바란다.

<독수리와 물고기의 사랑의 춤>은 숭고한 사랑, 사랑빛 그 자체다. 하늘과 물속이라는 삶의 터전이 서로 달랐지만, 독수리는 자신의 공간을 박차고 드넓은 바다 위의 하늘을 선택한다. 사랑하는 그녀를 보기 위해서. 익투스도 자신의 몸이 지칠 때까지 하늘 위로 뛰어오른다. 사랑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이들은 그 사랑의 영원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생을 마감한다.

<참나무와 인형의 사랑의 고통>과 <담쟁이덩굴의 사랑의 열망>은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랑의 감정을 애절하게 그린다. 참나무와 인형의 사랑은 믿음의 부족이 불러온 사랑의 불행을, 담쟁이덩굴의 사랑은 희생이 부족한 사랑의 안타까움을 보여 준다.

<대리석 조각 남녀의 사랑의 외침>과 <나비, 시인, 그리고 여자>는 비록 몸을 섞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긴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안다. 대리석 조각 남녀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할 운명임을 깨닫는다. 나비의 사랑과 여자의 사랑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에 목적을 둔다. 이성과의 사랑보다 또 다른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목말라 한다.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은 사랑하는 여인 튤슈를 찾기 위해 한 남자가 일생을 보낸다. 그토록 찾아헤맨 튤슈와 우연한 만남을 가졌지만 곧 그녀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여섯 가지 시선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이 책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은 책을 포장하고 있는 동화적 감각을 훨씬 뛰어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로망스를 생각하고 이 책을 펼쳤다가 마음 무거움을 느끼기도 했고, 소름끼치도록 현실의 사랑을 절감하기도 했다. 어쩌면 현실은 이보다 더 냉혹할 수도 있겠다고. 그러면서 네신이 풀어가는 사랑 방식에 때때로 놀라움도 함께 했다. 책을 읽어 가면 갈수록 사랑에 대한 환상보다 냉혹한 생각을 갖게 해 주었으니.

왜 이렇게 아지즈는 사랑에 대해 매몰찼을까? 사랑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젊은이들에게 들려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진정한 사랑을 알려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사랑은 혼자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의 문장은 설명조였고, 설득조였으며, 충분한 이해를 가미한 충고조였다.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사랑, 사랑을 많이 해 보길 권한다. 그래야 사랑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가 확립될 수 있으니. 어쩌면 이는 네신도 권하는 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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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 아버스 -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
퍼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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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크기와 두께만큼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책의 질량의 부담은 한 사람이 살다간 인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사람이 사회에 미친 영향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수를 생각한다면 크기와 두께, 그리고 무게가 한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는 다이앤 아버스의 명작을 볼 기회를 전혀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이앤의 사진을 접하면서 텍스트가 매울 수 없는 부분을 만회할 기회와 다이앤의 사진철학의 이해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의 텍스트가 다이앤의 진정한 사진 세계를 왜곡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웠다. 낯선 독자와의 거리를 친밀하게 만들지 못하고 넓혀 놓았다는 생각이다.

 “좋아요!”
“모델처럼 안 보여요.”

 다이앤은 한 초보 모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도입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두 줄의 말이 이 책을 다 읽은 지금에 와서 그녀의 삶을 대변해 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상적인 사람들도 정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특히 시각적 권력과 물질적 권력을 가진 이들도 그 면면에서 흘러 넘치는 영혼의 상처와 빈곤한 정신의 소유자일 뿐이라는 것을 다이앤은 보려 애썼고, 보여 주려 애썼다. 외모에서 풍기는 혐오와 물질 부족에서 오는 비정상인들보다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비참하리만큼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끄집어내고자 했다. 그랬기에 “모델처럼 안 보여요.”가 “당신은 정상이 아니에요.”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 가슴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때론 다이앤과 함께 우울증을 앓아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되어 가는 동안 클라이맥스라고는 없었던 삶을 산 다이앤 아버스. 금지된 세계의 탐험가로 치러야 했던 대가가 인생의 빠른 종결의 독촉이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다이앤이 그녀의 부모로부터 금지된 세계의 철저한 단절을 요구받아 왔듯이 독자에게도 철저히 그녀의 작업세계, 사진 세계를 그녀의 책으로의 만남을 금지시켰다.

 “아기일 때에도 다이앤은 사람을 그냥 보지 않았어요. 보며 생각했어요.”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이란 걸 모르고 자란 그녀에게 유일한 부족함과 벗어날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다.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부족함과 눈앞에 존재하는 가족이 언제나 껍질뿐이었다는 것이 그녀 안에 채울 수 공허함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어린시절 그녀의 숨통을 트여 주고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사랑하는 유모와의 이별은 평생을 고독과 외로움과 우울증과의 사투를 벌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은 다이앤을 더욱 수줍고 얌전하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행한 결과물을 끊임없이 확인하도록 하는 성격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의 야심을 깊이 인지시켰고, 자기 안에 있는 아주 특별한 무엇이 밖으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자각시키기도 했다. 그것이 금지된 경험, 거침없는 솔직함의 사진으로 대체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두려움은 그녀를 일깨우고 ‘느끼게’ 만들었으며, 나른함과 우울을 깨뜨렸다. 무서움을 극복함으로써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 않은 용기를 발달시켰다. 그녀의 최고의 사진들은 전복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많은 것에서 이러함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그녀가 금지된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왔다. 부모가 보여준 거짓으로 세련되고 위선적인 모습과 강요된 금지 등이 그녀로 하여금 더욱 금지된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녀의 학창시절 친구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이앤은 조금 과감하고 위험한 일들을 언제나 앞장서서 ‘맨 처음 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다이앤은 에티컬 컬처 스쿨에서 가장 대담한 축에 속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두려웠다‘고 믿었다.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고, 무척 흥분하고 겁에 질렸더라도‘ 애써 용감해지려고 했다.”

 부모로부터 강요되고 억압되었던 자신의 일상을 집 밖에서 분출시키는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다이앤의 행동은 좁고 작은 사람의 세계에서 넓고 큰 세계로의 입문을 예고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그녀는 서서히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숨겨진 것들의 발견을 향한 욕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인간 사회에서 제명 당한 이들을 자신의 어린 시절과 동일시하는 경향은 책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선명하지 않았던 어렸을 때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겼으며, 성인이 되어 아니 이미 어린 시절에 정체성과 주체성이 확립된 자신이 성인이 된 뒤에 다소 잊혀졌던 흐릿해진 기억의 영상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이끌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다이앤이 학생 때 유일하게 친구로 여긴 소녀가 말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바로 “믿을 만한 위대하고 슬픈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고 소망한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다이앤이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고등학교 렌로 선생의 사무실 문에 붙어 있던 비극적인 이미지의 아프리카 탈 사진의 영향이 컸다. 그 사진은 크고, 보기 흉하고, 기괴했다고 한다.

 적나라한 무일푼의 현실 앞에서 다이앤은 궁핍한 살림의 타계책으로 16살에 만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알렌과 함께 패션 잡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기형인들을 찍기 전에 시작했던 패션 잡지 사진은 아름다워야 했고, 이상 세계를 그려야 했고, 누구보다 무엇보다 화려함을 잃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다이앤은 이 일에 갈수록 매력을 잃었다. 술수와 중상모략, 배신과 매춘이 판치고 의도된 패션 사진에 실증과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유한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했던 그녀이기에 패션 잡지 일만큼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끊을 수가 없었다.

 패션 잡지에서도 발굴의 실력을 보여 주어 사진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녀는, 동료들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피사체들에 더욱 빠져들게 된다. 난쟁이와 거인 괴짜 등 극단적인 사람들을 인간애가 넘치면서 그 누구보다 더욱 따뜻한 애정의 시선으로 사진에 담아 놓았으며,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의 위엄을 보이고자 했다. 그녀는 이상하고 슬픈 사람들의 고립과 고독이 낯설지 않았다고 말한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유명세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과는 대조적이었다. 다이앤은 유명인의 내면과 외면에서 존재하는 자기과시와 모순, 즉 양면성을 탐색한 결과물만 끔찍하게 남겨 놓을 뿐이었다.

 다이앤은 기형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에 더욱 고통스러워했고, 무엇이 동물적이고 무엇이 인간적인가에 자신의 삶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를 놓고 자신의 삶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고, 이 모든 고통과 실험과 고민에 대한 결론은 없었으며 확신도 없음을 인정했다.

 다이앤의 영원한 아군이었던 알렉스가 다이앤에게 처음 했다는 말은 “제대로 보면 모든 형태가 아름답다.”는 괴테 인용문이었다. 이 말은 그녀를 모호성과 모순에 사로잡히게 했으며, 세상을 해석하기보다는 검사하게 만든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바로 고등학교 졸업앨범 다이앤의 사진 밑에 적혀 있었던 “다이앤 네메로브. 생명의 나무를 흔들어 들어 보지 못한 열매를 딸 것이다.”는 마치 다이앤의 운명을 예언한 듯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의 사진 세계는 기만적으로 단순하고, 독특한 접근법으로 모든 촬영대상을 그들이 누구든지에 상관없이 평준화시키고, 기형인이나 정상인이나 어떤 의미에서 똑같아진 것이라고 했다. ‘기형’이니 ‘정상’이니 하는 용어는 그녀의 문맥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다이앤은 그 두 부류를 애써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함 때문에 다이앤은 돈은 거의 못 벌었지만, 초상 사진에 유령 같은 심리적 진실을 가감 없이 담아내는 사진가로 잡지 아트디렉터들 사이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다만 아이러니 한 것은 죽기 전까지 기형인을 찍어 왔던 그녀가 전형적인 사람들을 찍는 문제를 고려했다는 것이다. 기형인 전문 사진가라는 꼬리표를 떼려고, 평소에 찍고 싶던 우아한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이앤의 이러한 행동은 지속적인 자기 부정에 불과할 뿐이었다.

 한 시대의 상류사회와 하류사회를 모두 경험한 그녀이기에 그 어떤 부분도 떨쳐버리기 힘들었으리라 본다. 상류층이 갖는 풍요로움을 경험했고, 때론 버릴 수 없는 동경으로 그녀는 가끔 자신의 처지를 혼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결에 하류 그것도 금지된 인간계의 동굴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 들어가 정체성의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에서 그녀가 남긴 업적은 인간계의 편협함이 아닌 풍성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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