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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ㅣ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게는 그다지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전 카페인처럼 밤잠을 설치게 하는 자극적인 것을 너무나 좋아하므로. 몇 달 전에 조카에게 물었지요. '이번에 무슨 책을 사줄까?', 대학생인 조카가 <냉정과 열정사이>를 언급하였을 때, 20대 초반의 그 풋풋함을 훔쳐보고 싶었기 때문에 읽었답니다.
책이 오던 날, 소포를 풀다 만 채 냉장고 옆에 등을 기대고 그 기계의 차갑고도 둔중한 진동음을 벗삼아 아오이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책의 겉표지에 둘러 있는 띠지에 찍혀 있는 아마 작가의 사진이라 여겨지는, 입끝이 뾰족하고 목선이 길고 고와서 슬픈 여인을 아오이라 생각하며 읽었지요. 그다지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여자의 결이 고운 내면을 따라 들어가면 세상은 너무나 고요했고 시간은 정지해 있었습니다.
10년 전의 사랑은 정지한 채 그녀의 속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녀 역시 그 사랑과 함께 정지해버렸답니다. 목욕탕의 거품과 작고 이쁜 인형의 발과 책 속에서 시간을 멈추어버린 그녀, 그녀의 닫힌 문을 열 열쇠는 단지 쥰세이란 한 남자뿐. 그런 그녀의 내면 속에서 한참동안 독자인 나 역시 공감하며 조금씩 공명하였지만, 책을 다 읽고 걸어나온 나의 세계는 부엌과 아이들과 음식 냄새, 떠들썩함이 존재하였답니다. 세상이 달랐답니다. '아, 나와 아오이는 다른 사람이구나'.
그런 아오이의 남자가 궁금해져 질투하듯 또 다른 사랑의 반쪽을 읽었습니다. 남자란 그런 것일까. 훨씬 더 소리가 있고 미움과 질투가 있었지만 읽는내내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녕 쥰세이는 아오이를 사랑하고 있는것일까라고.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고 쥰세이는 아오이를 찾지만 그런 결론은 어쩜 당연한 것이겠지요.
아오이의 세계는 따뜻합니다. 무관심한 듯 하여도 상처 입히기를 원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틴과 같은 사람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쥰세이의 세계는 버림받고 버리는 차가운 공간이더군요. 쥰세이의 아버지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어머니같던 화방의 스승도 배신하고 옆에는 역시 부모에게 버림받은 같은 처지의 매미가 있을 뿐이랍니다. 아마 쥰세이는 아오이에게서 잃어버린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다고 추측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일치하지만 전혀 별개인 두 소설을 다 읽고 나니 허전하더군요. 너무나 아오이의 세계와 저는 멀리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이국적인 풍경과 태국인 가정부를 두고 있는 부유한 미국인 마틴, 안틱 보석을 다루는 공방, 이쁘게 치장되어 있는 세상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그 점에선 쥰세이의 부분에선 고미술복원이란 특이한 직업을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답니다.
왠지 치열함이 없는 노련한 글쓰기에 농락당한 것은 아닌지. 남녀 작가가 반반씩 나누어 썼다는 그런 소설 외적 상황이 제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닌지. <키친>과 <도마뱀>에서 보여준, 같은 일본 작가인 요시모토 바나나의 가볍고 서툴지만 신선한 접근방식이 제게는 더 좋다란 생각을 하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