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95년인가 96년인가 그 어름, 그 겨울 취업시험을 치고 돌아온 날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과 귤 한 봉지를 사들고 들어와 무작정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자취방 옆 보일러실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고 두터운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세상과 나를 차단시켰다. '시험'이란 단어를 말끔히 내 머릿속에 지웠다. 오랫만에 방은 따뜻했다. 그 온기에 몸 전체를 의지하고 그렇게 읽었다.

책장을 펼치자 자취방도 보일러에 물끓는 소리도 사라졌다. 다만 소설의 무대인 통영, 그 곳이 펼쳐졌다. 댓숲에서 바람이 서걱거리며 운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서걱대며 운다. 갯내가 물씬한 바닷가와 어장, 경상도 사투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그리고 김약국의 딸들. 소설은 너무도 재미있었다. 여주인공들의 삶을 가닥가닥 쫓아가면서 밤은 깊었다.

나는 주목한다. 너무나 아름답기에 비극적인 용란의 삶. 어머니가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고 사위에게 죽는 장면에서 숨이 멎었다. 또 너무나 착하기에 순해서 슬픈 용옥의 삶. 남편을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 바닷속에 아기를 업고 그대로 죽어버린 그녀의 삶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눈이 붓도록 울었다, 나는 그리 눈물이 흔하지 않은 사람인데도. 보일러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방이 천천히 식어갈 때, 나비무늬의 표지가 화사해서 더욱 슬픈 소설 책 한 권을 잡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취업 시험을. 딱히 다른 삶의 길을 찾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내 눈에 보이는 게 그 길 뿐이었기에, 남들 하듯이 시험을 쳤고 그리고 그 시험에서 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삶의 막막함. 그 막막함과 용빈이 천천히 물이 새듯 침몰하는 집안을 쳐다보는 것과 같았을까. 누가 삶을 자기 뜻대로 살 수 있는가. 아니 치열하게 준비하지 않았기에 내 삶의 막막함은 용빈의 것보다 못하리라. 다만 삶이 뜻하지 않게 흘러갈 때 그 방향이 어딘지 몰라서 마냥 길잃은 아이처럼 무서울 때, 한번쯤 소리내어 우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

그 뒤 몇번이나 시험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겨울 삶의 쓴맛을 미리 맛보았기에 더이상 울 수 없었다. 오래도록 그 날 내가 소설을 보면서 울어야 했던 삶의 쓴맛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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