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가 망설이는 진짜 이유가 뭘까? 평생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단번에 집어삼키고는 질려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 어쩌면, 넌 내게 끼니 같은 사람이 아니라, 외로울 때 꺼내서 야금야금 마시는 술이거나, 비 오는 날 창가에 서서 마시는 커피거나,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 먹는 아이스크림콘 같은 사람이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술이나 커피, 아이스크림만 평생 먹으면서 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런 걸 바로 중독이라고 하는 것일 테니까. 지금 내가 망설이는 건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2. 벌써 물리기 시작한 음식을, 나만 아직 좋다고 계속 같이 먹자고 우길 생각은 없다. 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어줄 누군가를 내일 새로 만날 수도 있다. 가볍게 생각하고 싶다. 일생이 무너져내린다거나, 너 없으면 죽을 것 같다거나, 다시는 사랑 같은 것 못 할지도 모르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그건 거짓말이다. 이제 설거지를 해야 할 시간이다. 싫은 걸 나중으로 미룰 수는 있지만 안 할 수는 없다. 결국은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음악을 틀고, 팔을 걷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쌓여 있는 그릇들을 씻기 시작했다.
#3. 습관이 되어버린다는 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멈추어질 때, 그것도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닌 일상적인 일들이 더이상 계속되지 않을 때의 공허감이 어떤 것인지를,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 지속된 연애가 끝난 후 비로소 알게 되었다.
#4. 사람들은 실연을 당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다. 혼자서 견뎌도 보고, 찾아가서 설득도 해보고,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러지 않는 경우는 그럴 가치가 없거나 그래도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실연을 완료시키는 것밖에 없다.
이제 너는 나와 상관없고, 나는 혼자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5. 남자의 '사랑해'는 사랑의 시작이고 여자의 '사랑해'는 사랑의 완성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남자에게도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남자는 이 여자면 되겠다 싶은 어느 선만 넘으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여자는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되는 어느 선에 도달하면 비로소 사랑한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두 사람이 헤어지는 이유는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것은 사랑한 적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거나,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경우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한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지 않고 함께 가는 것이다.
#6. 사랑을, 이를테면 요리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성급하게 요리할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본래의 그 맛을 느끼고 아는 게 먼저다. 이건 무슨 맛일 거야, 라고 기대하고 그 방향으로 끌고 간다면 재료의 참맛을 충분히 살릴 수 없다. 요리에 신경을 써야 할 때는 본격적으로 연애가 시작되는 시점부터이다. 처음 데이트 약속을 정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배려도 하면서 서로를 조절해나가야 한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맛을 보고 간을 맞추는 그 시점에, 상만 차려서 내면 되는 바로 그때, 나는 다 된 요리를 망쳐버린 건 아니었을까. 혼자 끓어서 넘치도록 멍하니 있었거나, 다 끓지도 않았는데 속은 안 익고 겉만 익었는데 성급히 불에서 내려놓은 건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요리솜씨를 발휘해야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멍하니 있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나는 너무 늦되다.
#7.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요리를 한다. 폼나게 푸짐하게 재깍재깍 신나게 요리하는 이도 있고, 별로 어렵지 않게 간단한 재료를 써서 손쉽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쓱싹 요리를 만들어내는 이도 있고, 차곡차곡 준비해서 라면 하나를 끓여도 그릇까지 제대로 세팅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도 있고, 요리하는 모습이 못 미덥고 완성된 요리도 그럴싸해 보이지는 않지만 먹어보면 의외로 참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이도 있고, 계란프라이도 겨우 하면서 영양을 꼼꼼히 따져 만드는 이유식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도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에 어울리는 인생이 있는 것처럼 요리도 그렇다. 무엇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다.
#8. 사랑도 요리처럼 절대적이면 좋겠다. 요리는 잘하고 못하고 맛이 없고가 확연하다. 내 입맛에 딱 맞는, 그래서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먹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그 하나, 똑같은 재료로 요리해도 날마다 새로운 그 하나를 나는 제대로 선택하고 온전히 가질 수 있을까. 이제 내 선택은 예전처럼 무작위도 광범위하지도 않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고르는 일이 한 가지를 가질 것인가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보다는 쉽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완전히 버릴 이유도 없다. 어떤 재료를 무슨 요리에 쓸 것인가를 결정하고 나면 다른 재료는 또다른 요리에 쓰면 된다. 익숙한 재료로, 늘 하던 대로 요리하는 건 재미없지 않은가. 어쩌면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일 수도 있다. 재료의 선택, 방법의 선택, 순서의 선택, 시간의 선택......
#9. 요리는 갖가지 재료의 조화와 적절한 시간의 안배, 그리고 만만치 않은 정성이라는, 생각보다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요리가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고, 너무너무 '있어 보이는' 요리도 사실 만들어보면 별게 아닐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운 요리가 나한테는 쉬울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해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하다보면 어느새 내가 원하는 요리가 신기하리만치 맛있게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사랑 또한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10. 연애도 사랑도 인생도 요리처럼 레시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재료는 무엇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만약 재료 중에 없는 게 있으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도 되지만 이것이 빠지면 요리가 안된다는 걸 명심하고, 처음에는 어떻게 해놓았다가 시간이 얼마쯤 지나면 어떻게 하고, 불 높이는 이렇게 조절하고, 재료는 이것부터 넣어야 하며, 뚜껑을 덮어둘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조리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며,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고,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서 내고, 먹을 때 이렇게 하면 더 맛있다,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