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진은 물끄러미 밥상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사기 밥그릇에 소복하게 담긴 감자 섞인 밥에서 윤기가 흘렀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냉이를 넣고 끓인 냉이토장국이 그 곁에 놓여 있다. 달래 속에 채 썬 무를 섞어 초간장으로 무친 달래무침과 고들빼기와 데친 푸른 두릅과 무생채와 묵은 김치 그리고 달걀옷을 입은 쑥전이 밥상 위에 놓여 있다. 대부분 봄이 온 땅에서 얻어진 것들이었다.
리진은 밥을 숟가락으로 퍼서 냉이토장국에 말았다. 여태 가만있더니 갑자기 밥을 서둘러 국에 퍽퍽 말고 있는 리진을 강연이 낯설게 바라보았다. 한 숟갈 떠서 먹어보던 리진이 밥이 목으로 다 넘어가기도 전에 또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서씨와 강연도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다가 잠시 리진을 응시했다. 리진이 밥을 떠먹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천천히 먹어라그러다가 체하겠다, 라는 말을 뒤로 하고 서씨가 일어섰다. -한 그릇 더 떠오마입 안에 가득 냉이토장국과 밥이 들어 있어 리진이 말리지도 못한 사이 서씨는 벌써 방문을 열고 나갔다. 강연이 제 앞에 놓여 있던 국그릇을 리진 앞으로 옮겨놓았다. 그제야 리진은 입 안에 잔뜩 들어 있던 밥을 마저 삼키고 숟가락을 상에 내려놓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2. 지금부터 나의 말을 잘 들으세요.
당신은 나에게 친절했습니다.
나에게 성실하였고 어쩌든 나를 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나에게 했던 약속들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괴로워도 말고 스스로 열정이 식었다 하여 자책도 마세요. 여태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 옛날 당신은 이미 왕께서 허락한 나를 오래 기다려주었습니다. 내 몸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런 시간들이 필요 없었겠으나 당신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어요. 항상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견디기 힘들어질 때면 나는 당신의 그 기다림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떠나는 당신에게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에게 애착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갈 길이 다른 당신을 붙잡아 길을 막으면 우리는 여기에서 고인 물이 된다 여겼습니다.
나는 당신의 나라에서 ‘소인’이 아니라 ‘나’로 살았으며 행복했습니다. 에펠탑을 잊어도 루브르 박물관을 잊어도 나는 파리 대로변의 활기차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겁니다. 뱅상이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보는 것, 수다스런 잔느가 사랑을 이루는 것을 보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플라사르 부인의 호의와 모파상 씨의 좌절과 냉소를 동시에 겪으며 나는 당신의 나라를 비로소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박애가 무엇인지, 나의 자유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궁에서 지냈습니다. 나를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들을 깨뜨리고 나를 느끼는 일은 설레지만 두렵고 심장이 뜨거워질 만큼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길린,나를 당신에게서 내려놓으세요. 사랑하는지 아닌지 이젠 알 수 없어졌다는 당신의 말을 나는 이해합니다. 오해하지 않습니다. 서운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나를 버릴 수는 없다, 고 했던 당신의 갈등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랬는걸요.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면서도 당신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땐 내가 '소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떠나면서 내 머리를 빗겨주고 싶어했던 것을 거절한 것을 많이 후회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미련을 가질까봐 그랬지만 그 정도의 미련도 없다면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왜 그때는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어리석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신은 그리 많은 것을 내게 주었는데 나는 끝내 인색했습니다. 당신을 강자라 생각했고 나는 약자라 여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은 프랑스이고 나는 조선이라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우리는 남자와 여자였을 뿐이었는데.
길린,
나, 리진을 내려놓고 모쪼록 자유로우세요.
그래야 나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해도 이따금 당신의 후두염이 염려되겠지요.
당신도 나를 만나지 못해도 이따금 내 머리를 빗기고 싶겠지요.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여깁니다.
1895년 6월 3일
조선에서 리진.
#3. 잠이 든 네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꿈결 같다.
블랑 주교님을 따라 이 집에 처음 왔던 날이 생각난다.
궁의 나인 등에 업혀집에 돌아오다가 블랑 주교님과 나를 보고 커졌던 너의 눈.
잊었을까. 이 집에서 어머니가 물항아리에 더운 물을 붓고 목욕을 시켜주었지. 그 게 이 집에서의 첫 날이었어. 네가 있어서 다시 길을 떠나는 불랑 주교님을 따라가지 못했다.
네가 그랬지. 여기 살아......라고.
그때부터 여태 여기 살아......라고 말했던 너의 목소리를 품고 살았다.
늘 무엇엔가 쫓겨다니듯 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마을의 연못에 아버지가 빠져 죽은 후 내겐 아버지가 남긴 피리만 들려 있었어. 그때는 날이 어두워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날마다 찾아오는 밤을 어디서 보내야 하는지 몰랐어. 어느 집 짚더미가 쌓인 헛간이나 불기가 남아 있는 아궁이 옆에서 잘 수 있는 날은 그나마 좋은 날이었지.
그런 내게 너는 그랬어. 여기 살아......라고
은방울,어젯밤으로 나는......되었다. 모든 것이 되었어. 곁에서 네 일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안타까울 뿐. 네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어도 네 곁에 있으려 했지만 바닷길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뿐이냐, 다시 조선에 돌아온 너를 지켜줄 힘도 없었다. 그것이 사무칠 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대금을 불어주는 일뿐이었다.
은방울, 이보다 더 힘들었던 날들을 견주어 생각해보며 살아갈 힘을 얻길 고대한다. 한 가지, 어떤 이야기가 들려도 나를 찾아나서려고 하지 마라. 나는 청국에 가는 것이니. 나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마라. 어렵겠지만 꼭 그렇게 해주어. 그것이 나를 위한 길이니.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 들면 들수록 나는 나빠질 뿐이니.
#4. 혼자 있는 사람의 뒷모습엔 하지 못한 말이 씌어 있다.
희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희망을 갖는 일보다 더 힘겹다.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투쟁이다.
그리운 것은 눈을 감아야만 보인다.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디에다 견주려 하나 그래볼수록 이 세상이 좁아 마땅히 견줄 수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