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기,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 있네.
엄마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날 때 할머니가 꿈을 꾸었다네. 누런 털이 빛나는 암소가 막 무릎을 펴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네. 소가 힘을 쓰며 막 일어서려는 참에 태어난 아이이니 얼마나 기운이 넘치겠느냐며 이 아이 때문에 웃을 일이 많을 것이니 잘 거두라 했다네.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2. 이젠 당신을 놔줄 테요. 당신은 내 비밀이었네. 누구라도 나를 생각할 때 짐작조차 못할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네. 아무도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다고 알지 못해도 당신은 급물살 때마다 뗏목을 가져와 내가 그 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이였재. 나는 당신이 있어 좋았소. 행복할 때보다 불안할 때 당신을 찾아갈 수 있어서 나는 내 인생을 건너올 수 있었다는 그 말을 하려고 왔소. ……나는 이제 갈라요.

#3. 네가 울어대니 네 친할머니가 네 엄마보고 아기 운다고 빨리 젖을 물리라고 하더구나. 나오지도 않는 빈 젖을 물리는 니 에미를 보며 내가 신생아인 널 향해 눈을 흘겼어. 네 친할머니를 얼른 돌려보내고 네 에미 품에서 너를 뺏듯이 안아들고 네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리기까지 했재. 아기가 울면 친할머니는 아기 운다. 어서 젖 물려라, 하고, 외할머니는 저 애는 에미 힘들게 왜 저리 울어댄다냐……한다더니 나도 다를 게 없었단다.
배울 만큼 배우고 남이 부러워하는 능력도 가진 네가 왜 그리 꼬질꼬질 살고 있는지 보고 싶지가 않았고나. 착한 내 딸! 너는 닥친 상황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네가 왜 그러고 사는지 때로 화가 날 때가 있었고나. 이제 걸음마를 뗀 막내까지 세 아이를 길러야 할 너를, 네 인생을. 그럴 때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김치를 담가 부쳐주는 거밖에 없다는 게 참 미련스럽게 느껴지곤 했다아. 네가 아이를 안고 시골집에 왔을 때, 신발을 벗으면서 어마, 내가 양말을 짝짝이로 신었네, 하고 웃을 적에 이 에민 가슴이 미어졌어야. 얼마나 정신없이 살면 그 깔끔하던 네가 양말도 제대로 짝 맞춰 신을 시간이 없나 싶어서.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라. 엄마는 네가 있어 기쁜 날이 많았으니
 

#4. 말이란 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나는 평생 니 엄마한테 말을 안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겄거니 하며 살었고나.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

#5. 당신은 아내가 당신보다 더 오래 살기를 바라던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를 이제야 깨닫는다. 그 마음이 아내가 깊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바깥일을 보고 돌아오면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아내가 사실은 눈을 뜨기조차 힘들 만큼 머리가 아파 눈을 감고 있는 것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부턴가 아내가 개밥을 주러 간다면서 개집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우물가로 향한다는 것을, 어딘가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는 대문간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도로 방으로 돌아오기 일쑤라는 것을 당신은 알았다. 당신은 기진맥진한 듯 아내가 방으로 기다시피 들어와 겨우 베개를 찾아 베고 이마를 찡그린 채 드러눕는 것을 보기만 했다. 언제나 아픈 사람은 당신이었고 그런 당신을 보살피는 사람이 아내였다. 어쩌다가 아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당신은 나는 허리가 아프다고 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아프면 아내는 이마를 짚어보고 배를 쓸어보고 약국에서 약을 사오고 녹두죽을 끓이고 하였으나 당신은 약 지어다 먹으라고 하곤 그만이었다. 당신은 이제야 아내가 장에 탈이 나 며칠씩 입에 곡기를 끊을 때조차 따뜻한 물 한 대접 아내 앞에 가져다줘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6. 열일곱의 아내와 결혼한 이후로 오십년 동안 젊어서는 젊은 아내보다 늙어서는 늙은 아내보다 앞서 걸었던 당신이 그 빠른 걸음 때문에 일생이 어딘가로 굴러가 처박혀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젊은날부터 아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 어딘가 함께 갈 때면 항상 걸음이 늦어 뒤처지곤 하던 아내는 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 당신을 뒤따르며 좀 천천히 가먼 좋겄네, 함께 가먼 좋겄네……무슨 급한 일 있소? 뒤에서 구시렁대었다. 마지못해 당신이 기다려주면 아내는 민망한지 웃으며 내 걸음이 너무 늦지라오? 했다.
미안한디……그래도 남들이 보믄 뭐라고 하겄소.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한 사람은 저만치 앞서서 가고 한 사람은 저 뒤에서 오믄 저이들은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서로 싫은 가비다 할 것 아니요. 남들한티 그리 보여서 좋을 거 뭐 있다요. 손잡고 가자고는 안할 것잉게 좀 천천히 가잖게요. 그러다가 나 잃어 버리믄 어짤라 그러시우.
당신은 아내가 마치 이리될 것을 알고나 한 소리처럼 여겨졌다. 스무살에 만나 오십년이 흘러 이 나이가 되는 동안 아내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게 좀 천천히 가자는 말이었다. 평생을 아내로부터 천천히 좀 가자는 말을 드으면서도 어째 그리 천천히 가주지 않았을까. 저 앞에 먼저 가서 기다려주는 일은 있었어도 아내가 원한 것, 서로 얘기를 나누며 나란히 걷는 것을 당신은 아내와 함께해본 적이 없었다.

당신은 아내를 잃고 나서 자신의 빠른 걸음걸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했다.

#7. 마당의 불을 켜고 얼른 헛간 평상 쪽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거기 누워 있었다. 마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뛰어내려가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는 낮에 그랬던 것처럼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손을 이마에 얹고 잠들어 있었다. 
 맨발이었다. 추운지 열 발가락이 안으로 오므라들어 있었다.
소박한 밥상을 차려 저녁을 먹은 시간과 엄마와 함께 집을 사이에 두고 마당을 돌며 나눈 얘기들이 산산조각나는 느낌이었다. 11월의 새벽이었다. 이불을 가져와 엄마에게 덮어 주었다. 양말을 꺼내와 맨발에 신겨주었다. 그리고 엄마가 정신이 들 때까지 엄마 옆에 앉아 있었다.

#8. 니가 나한테 처음 해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 게 나한티는 새세상인디. 너는 내게 뭐든 처음 해보게 했잖어. 배가 그리 부른 것도 처음이었구 젖도 처음 물려봤구. 너를 낳았을 때 내 나이가 꼭 지금 너였다. 눈도 안 뜨고 땀에 젖은 붉은 네 얼굴을 첨 봤을 적에……넘들은 첫애 낳구선 다들 놀랍구 기뻤다던디 난 슬펐던 것 같어. 이 갓난애를 내가 낳았나……이제 어째야 하나……왈칵 두렵기도 해서 첨엔 고물고물한 네 손가락을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어야. 그렇게나 작은 손을 어찌나 꼭 쥐고 있던지. 하나하나 펴주면 방싯방싯 웃는 것이……하두 작아 자꾸 만지면 없어질 것두 같구. 내가 뭘 알았어야 말이지. 난중엔 나날이 니 손가락이 커지고 발가락이 커지는디 참 기뻤어야. 고단헐 때면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 있는 니 작은 손가락을 펼쳐보군 했어. 발가락도 맨져보고. 그러구 나면 힘이 나곤 했어. 신발을 처음 신길 때 정말 신바람이 났었다. 니가 아장아장 걸어서 나한티 올 땐 어찌나 웃음이 터지는지 금은보화를 내 앞에 쏟아놔도 그같이 웃진 않았을 게다.

#9. 엄마는 상식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종내엔 자식들의 집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거야.
 나는 엄마에게 좋은 딸이었나? 나는 내 아이들에게 엄마가 내게 해준 것처럼 할 수 있나. 한 가지는 알아. 나는 엄마같이 못해. 할 수도 없어. 나는 내 아이들 밥 먹이면서도 자주자주 귀찮아. 아이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거 같이 느껴져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
이런 나를 깨달을 때마다 엄마는 어떻게 그리할 수 있었는지 엄마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가 우리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엄마 상황에서 그렇다고 쳐. 그런데 우리까지도 어떻게 엄마를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으로 여기며 지냈을까. 내가 엄마로 살면서도 이렇게 내 꿈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을, 나의 소녀시절을, 나의 처녀시절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데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까. 엄마는 꿈을 펼쳐볼 기회도 없이 시대가 엄마 손에 쥐여준 가난하고 슬프고 혼자서 모든 것과 맞서고, 그리고 꼭 이겨나갈밖에 다른 길이 없는 아주 나쁜 패를 들고서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일생이었는데. 난 어떻게 엄마의 꿈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을까.
나는 엄마처럼 못 사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엄마가 옆에 있을 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딸인 내가 이 지경이었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오로지 희생만 해야 했다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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