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주
한소진 지음 / 해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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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글 창제의 '진짜' 이야기,
스스로 역사에 이름을 숨긴 한글 창제 일등 공신을 살려내다!

 
한글 창제와 관련된 몇 가지 '설' 중에 내가 들은 것에는 이런 것이 있다. "한글의 모양은 세종대왕이 우연히 본 '격자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사실은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인데 세종대왕이 만든 것으로 포장되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은 따로 있음을 밝힌 <정의공주>는 내가 아는 모든 '설'들이 허무맹랑한 풍문을 넘어 검은 음모였음을 알게 해주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 "하늘 천, 따 지"를 외우거나, 식민지의 잔재로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사용하거나, 아예 세계 공용어로 통하는 영문으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사하게도, 세종대왕께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우리 소리를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만들어주셨다. 사대주의에 쩔어 있는 무리는 우리글을 '우리 것'이라 하여 멸시했지만, 한글은 누구나(한국 사람이라면) 쉽게 익힐 수 있는 '과학적'인 글이며, "기본자를 이용해 소리를 담아내는 그릇이 무궁무진하게 변형될 수 있는"(310) 놀라운 글이며, 세계도 그 우수성을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우리글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랑스럽고 놀라운 '한글' 창제에 숨은 공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놀랍게도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가 아버지 세종의 꿈을 완성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한글 창제에 세종대왕의 둘째 딸이 깊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작가는 우리 역사의 숨은 '비화'를 찾아내었다.

 "주상전하께서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흠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음을 다 끝내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셨다. 하지만 모두 풀어내지 못하였다. 결국은 차녀 정의공주에게 부탁하자 그녀가 곧 풀어 바쳤다. 주상께서는 무릎을 치며 크게 기뻐하시고 칭찬하여 큰 상을 내리셨다"(337).

<죽산안씨대동보>에 전해져 오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죽산 안씨는 정의공주의 시가이다. 뿐만 아니라, <몽유야담>의 '창조문자'라는 항목에도 "우리나라 언서(한글)는 세종 조에 연창공주가 지은 것이다"(337)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한글 창제의 진짜 공신을 알리는 역사적 기록이 이렇게 버젖이 남아있는데도 우리는 왜 그동안 역사적 진실을 몰랐던 것일까.


"그들은 새 문자를 '암클'이라 했다. 암클. 여자가 만들었으니 여자들이나 써야 할 글자라는 뜻이었다"(325).

작가는 역사적 진실 대신 알려진 '암클'이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사실을 유추해내었다. "한글은 '큰 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긴 세월 동안 암클이라 폄하된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왜 하필 큰 글을 암클이라 했을까요? 혹 여자가 개입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정의공주가 한글 창제에 큰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작가의 열정과 노력이 역사에서 지워져버린 '공주'를 살려내었다.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로 태어나 누구보다 총명했으며 배우고자 하는 갈증으로 늘 목말라 했던 정의공주의 삶과 한글 창제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잃어버릴 게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개혁을 두려워한다. 한 곳에 생각이 매인 사람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중국의 것에 기대에 관직에 오른 학사들은 '우리글'을 만들자는 세종대왕의 꿈에 반발했다. 세종대왕을 존경해마지 않는 학자들도 한글 창제만은 반대했다. 모화 사상에 성리학에 얽매인 관리들은 '우리글'을 만들려는 시도를 불경하게 보았고 중국을 두려워했다. <정의공주>는 이러한 반발 때문에 한글 창제는 세종대왕이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오랜 세월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소수의 사람들은 바로 세종대왕의 가족, 공주와 왕자들이었다.


"우리가 만일 우리만의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면 단군 시대의 혼과 정신이 담긴 글자를 채택해야 할 듯하다. 우리에게는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던 전자(篆字)가 있었느니라. 이를 '가림토 문자'라 한다. 과인은 우리 백성이 썼던 문자로 새 글자를 만들 것이라는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갖고 있단다. 왜(倭) 문자는 중국 문자를 토대로 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혼을 이어야 할 것이야"(45).

<정의공주>를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사실은 우리 백성이 오랫동안 써오던 '가림토'라는 문자라는 것이다. 학식 높은 배운 사람들이 중국의 것에 몰두하고 있을 때, 우리 백성들은 고유한 우리 문자를 사용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얼러러디야, 상사로다. 우리 부모 농사일로 '기욱 자'로 등 휘셨네. 역병으로 죽은 아우 한술의 '미음'이 전부였네. '니운 자'로 나무 그늘에 기대에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 어허라 상사디여......"(117)그 문자는 '천한' 백성들 사이에 노래로 전해졌고, 주막의 장부를 통해 소통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헌에 기록된 문자의 소리를 찾아낸 이는 바로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던 '정의공주'라는 것이다.

여자인 자신이 관련 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소중한 우리글이 천대받지는 않을까 하여 스스로 역사에서 몸을 숨긴 '정의공주', 이 책을 통해 공주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가림토 문자를 다시금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존이며 자주이니라"(46) 했던 세종대왕의 위대함이 피부로 느껴지고, 한글은 물론 함께 한글 창제에 몰두했던 "왕자들을 푸르고 거대하게 가꾸기 위해 기어코 퇴비로 남으려"(326) 했던 정의공주의 깊고 숭고한 마음에 고개가 숙여진다. 

정의공주의 일생을 복원한 <정의공주>는 글과 구성이 그리 촘촘하지는 않다. 그러나 다소 성긴 구성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몰입하여 읽을 수 있을 만큼 재미있다. "바람은 산들산들 불고, 세월은 흐르고, 젊음은 가고, 나이는 먹고, 냇물은 졸졸 흐르고, 눈물은 줄줄 흐른다"고 표현하는 우리 말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다. 무엇보다 역사에서 지워져버린 한글 창제의 진실을 살려내고, 스스로 이름을 숨긴 '정의공주'를 우리에게 다시 찾아주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읽어야 할 이유가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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