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으로 만든 선인장
전경환 지음 / 도서출판 be(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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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선인장은 건조한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다른 존재를 배려하지 않는다. 지독한 외로움에 떨면서도 텅빈 하늘을 향하여 날카로운 가시를 휘두르고 있다. 뜨거운 환경을 거부하듯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생존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하다는 변명조차 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런데 납으로 만든 선인장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차갑다 못해 무거운 덩어리를 안고 있는 그 존재는 가시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허공을 항햐여 절규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가슴에 납으로 만든 선인장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5)

세상은 점차 사막화 되고 있다고 한다. 그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탐욕스럽게 물을 빨아올려 저장하고 또 저장하는 선인장, 그게 지금 우리 마음일까? 돌아보자. 관찰해보자. 객관화시켜 생각해보자. 우리 마음에 다른 존재를 배려하지 않는 선인장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독한 외로움에 떨면서도 텅빈 하늘을 향하여 날카로운 가시를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꿈을 꾸고, 이상을 노래하던 우리의 뜨거운 가슴이 언제부터 납처럼 차갑게 식어버렸을까? 

<납으로 만든 선인장>의 저자 전경환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차갑게 얼어 있다. 그가 보는 세상은 빛을 잃은 흑백 세상이다. 초록 생명도, 뜨거운 영혼도 잃어버린 금속성의 세상이다. 세상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있는 그는 철저히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 그는 관찰자의 시점을 갖는다. 그는 세상과 섞여들지 못하는 타인인 것이다.


선인장은 환경을 비웃는 존재이다. 바람은 먼지가 없으면 일어나지도 않으며, 태양은 평소와는 다르게 가까이 다가온 후에야 얼굴을 내미는 곳, 물이 적어서 메마른 곳이 선인장이 터전이다. 태양이 바람을 일으켜 시원함을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런 곳에서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선인장이다. 그런 이유로,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게 날카로운 잎으로 하늘을 찌르고, 태양을 찌르고, 땅과 자신을 찌른다.

"인간미를 상실한 현실을 그는 냉정하게 이미 생명이 꺼져가는 상황"이라고 정의한다. 흙에서 나왔다는 인간은 언젠부터인가 흙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흙을 대신한 콘크리트 숲에서 호흡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선인장이 되었는가? 선인장은 환경을 비웃는다지만 환경에 영향을 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키우며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다. 


몸의 대부분이 생존을 위한 아가리로 채워진 선인장은 스스로 차가운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타(他)를 배려하지 않는 그 날카로움을 단죄할 수는 없다. 가장 가까운 존재까지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외로움으로 충분히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땅을 향하고, 마음은 욕심을 향하고, 영혼은 이미 추락한 망상이 된다(25). <납으로 만든 선인장>은 그렇게 스스로 차가운 존재가 되어버린 우리의 삶의 단상을 정밀하게 포착해주고 있다. 저자는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어쭙잖은 감상이나 막연한 희망마저 단호히 거부한다. 미세한 세포를 관찰하듯 현미경을 들이대고 추락하는 세상의 공허함을 잘 보이게 확대해주고 있다. 고통스러운 통증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세상 가득하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차가워지고, 다른 존재를 배려하지 않는 인간은 외로움이라는 지독한 형벌을 받고 있다. 살기 위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면서도 그 외로움 때문에 죽어가는 인간, 누가,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인간은 납으로 된 선인장을 품고 있다. 인간이 선인장과 다른 점은 태양과의 관계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허공을 향하여 내지르는 어리석음의 가시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환경을 집어삼키는 욕망의 존재이다.

철학을 전공했다는 저자는 철학과 심리학을 접목시켜 독자적인 생(生)의 이론을 구축해왔다고 한다. 그의 글을 읽으니 신경이 곤두선다. 현실 고발적인 그의 사진 속에서, 납처럼 차가운 그의 글 속에서 추락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니 현기증이 일어난다. 나는 욕망덩어리가 된다. 내가 디디고 서 있는 메마른 땅, 내가 꿈꿔왔던 것은 신기루였던가? 길바닥에 방치된 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그렇게 나의 존재는 모욕 속에 스러져간다.

지독한 저자이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는 매트릭스 안에 갇힌 진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 원하는 것 같다. <납으로 만든 선인장>은 묻는다. 우리가 아직도 인간(人間)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징표는 무엇인가? 인간미를 잃어버린 인간을 여전히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가 "아직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부분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매트릭스 안에서 깨어나는 것이 행복일까, 거짓된 꿈이라도 꾸며 사는 것이 행복일까? 내 마음 안에 계속 자라고 있는 선인장이 오늘도 나를 찌르고, 서로를 찔렀지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자각하는 이 ’앎’이라는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갈지 막연한 기대를 품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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