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스호퍼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사카 고타로, 그가 왔다! 

작가에 대한 엄청한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만으로도 설레였다. 이사카 고타로, 저자 프로필에 나와 있는 소개글을 빌어 잠깐 그에 대한 명성을 확인하면 이렇다. "일본 최고 권위의 나오키상에 다섯 번이나 후보로 선정, 최초로 일본 서점대상에 5년 연속 후보에 오르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작가로 일컬어진다. 기발한 상상력과 정교한 구성, 재치 넘치는 대화로 평단은 물론 젊은 세대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런 그가 스스로 "작가로서 가장 큰 성취감을 준 작품"이 바로 이 책, <그래스호퍼>(GRASSHOPPER)라고 하니 읽기도 전에 책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이 책은 목차가 없다. 3인의 등장인물이 차례로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스즈키, 구지라, 세미. 각각 독립되어 있는 세 개의 퍼즐처럼,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세 명의 이야기가 차츰 거리를 좁혀오며 후반부에서 세 개의 퍼즐이 만나 완성된 그림을 보여준다.

스즈키. 2년 전 억울하게 죽은 아내의 복수를 위해 실마리를 좇다가 ’프로이라인’(독일어로 영애(令愛)뜻을 가진)이라는 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한지 한 달이 되었다. 복수의 대상은 그 회사 두목의 망나니 아들이다. 그 망나니 아들에게 다가갈 기회를 얻기 위해 불법영업을 일삼는 조직에 몸을 담았다. 그런데 그의 정체를 의심한 회사의 실험대 위에 막 올라선 위기의 순간에, 두목의 아들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분명히 누군가 두목의 아들을 차도로 밀었다! 스즈키는 현장을 급히 빠져나가는 한 남자를 목격하고 뒤를 밟는다. 범인(밀치기)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조직, 그 범인의 소재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스즈키, 복수할 기회를 빼앗아가버린 범인의 정체, 그들의 숨막히는 (심리) 게임이 펼쳐진다. 

구지라. 자신은 ’누구나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을 도와줄 뿐’이라는 중년의 ’자살 유도 킬러’. 격투기 선수처럼 위압감을 주는 체격에 이 바닦에서 최고의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딱 한 번의 과오, 그 10년 전의 기억이 상처로 남아 있다. 그것을 청산하고 싶다. 그런데 자꾸만 그에 의해 자살을 한 사람들의 환영이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세미. 일가족 몰살이 특기인 피도 눈물도 없는 청년 ’칼잡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지만, 딱 한 사람 자신의 상사인 ’이와니시’에게 매여 꼭두각시 인형 노릇을 하고 있는 듯한 자신의 생활이 불만이다. 자신은 ’이와니시’의 인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


"어떤 동물이든 밀집해서 살면 변종이 생기게 마련 아니오. 색이 변하기도 하고 안달하게 되면서 성질이 난폭해지지. 메뚜기 뗴의 습격이라고, 들어봤소?"(213)

작가는 도시에 군집해 서로 부딪히고 밀치며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이 포유류가 아니라, 곤충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렇게 개체와 개체가 근접해서 생활하는 동물은 보기 드물지. 인간은 포유류가 아니라 오히려 곤충에 가까워."(7) 이렇게 보니 구지라와 세미의 이름이 재밌다. 구지라는 포유류에 속하는 ’고래’라는 뜻의 이름이고, 세미는 곤충에 속하는 ’매미’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래스호퍼>에서 대결을 펼치는 세 명의 난폭해진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변종일 것이다. 밀도 높은 도시에서 서로 부딪히며 살다 보니, 어처구니 없는 교통사고도 발생하고, ’밀쳐서’ 사람을 죽이는 ’밀치기’라는 킬러도 탄생하는 것이다. 도시가 아니라면 밀치기가 칼잡이나 자살 유도 킬러에 맞서는 일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세 명의 킬러 중에 가장 약한 공격 기술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밀치기, 그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스즈키의 목소리를 빌어 등장하는 ’밀치기’의 정체는 베일에 쌓여 있다. 어쩌면 언뜻 평온한 가정의 가장으로 보이는 ’밀치기’는, 평범한 수학 교사로 살아왔으나 어이없는 사고로 아내를 잃고 복수를 꿈꾸는 스즈키가 만들어낸 (상징적인) ’변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이, 그거 아나 몰라. 인간의 지혜나 과학은 인간한테만 도움이 된다는 거. 다른 어떤 개체도 세상에 인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런 생각은 안 한다, 그거야."(356)

이 책을 읽으며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모든 생명체에게 미안해진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계의 청지기 사명을 맡겼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본분을 잊고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가. 그런데 조금 엉뚱하지만 이 대사를 패러디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이렇게 말이다. "그거 아나 몰라. 정치인의 지혜나 활동이 정치인에게만 도움이 된다는 거. 어떤 국민도 세상에 정치인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런 생각은 안 한다, 그거야." 특별히 이 책을 읽다 보면, 잔혹한 킬러에게는 오히려 동정심이 생기는 반면, 야비한 정치인에게 더 큰 거부감과 반감이 생긴다. 정치와 투표에 관하여 명언으로 꼽을 만한 작가의 촌철살인 풍자가 돋보인다. 


"당신,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어?"(442)

도시 사회의 변종, 킬러들의 흥미진진한 한판 승부,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그러나 무엇을 위한 승부이고, 또 승패를 가려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목숨 걸고 덤벼들듯 치열하게 살았지만, 지나고 보면 대개의 경우 부질 없는 것들이었음을 새삼 새삼 깨닫는다. 스즈키의 아내가 뷔페 식당에서 음식 하나 하나와 대결을 벌여 접시에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잔뜩 쌓아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생(生)에 대한 생각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생(生)에 대한 의욕이 사라진다. 밀려오는 허탈감은 모든 투지를 삼켜버린다.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깨닫고 분노할수록 결국은 맞설 마음을 잃어버리고 흘러가는 대로 살게 되는 무기력한 타협처럼 말이다. 그러나 작가 이사카 고타로는 <그래스호퍼>를 통해 그렇게 부질 없는 대결이라고 해도 ’죽은 듯이 사는 것’ 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듯 하다. 어째든 태어났으니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그렇게 축 처져 있지 말고 무모한 도전이라도 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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