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 사랑의 여러 빛깔, 개정판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바실리 악쇼노프 외 지음, 이문열 엮음, 장경렬 외 옮김 / 무블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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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여러 빛깔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여러 형태로 우리 삶에 기능한다. 높게는 우리 영혼을 천상과 초월로 인도하고 낮게는 타락과 파멸로 이끈다. 삶에 눈뜨게 하고, 열정과 야망을 불 지피며, 분노와 질투로 미치게 하고 때로는 자기부정에까지 이르게 한다. 다른 가치에 패배하기도 하고 하지만 또한 다른 가치를 짓밟기도 하고, 더러는 자기희생으로 결합하여 더욱 높은 단계로 승화하기도 한다"(451).

<사랑의 여러 빛깔>은 주제별로 세계 각국의 단편들을 정리한 <이문열 세계문학산책> 중 '사랑'을 주제로 한 단편 선집입니다.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속에 다양하면서도 잘 정리된 전범(典範)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 아래 기획되었고, 1996년 초판되었다가 2020년 개정판이 다시 나왔습니다. 그중 <사랑의 여러 빛깔>에 수록된 11편의 작품들은 "문학의 프리즘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여러 빛깔"(22)을 보여주는데, 젊은 시절의 이문열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세계 각국의 거장들의 작품들이라는 점에서도 저에게는 흥미를 가질 만한 단편 선집이었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을 제외하면 처음 접해보는 작품들이었는데, <사랑의 여러 빛깔>을 읽으며 사랑은 하나의 감정,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사랑의 여러 빛깔>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은 본디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 하나의 빛깔로 보여지는 사랑도 사실은 그 안에 전혀 상반되는 속성을 품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순수의 절정 같은 어떤 사랑은 너무나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에 도리어 어리석어 보이고(달로 가는 도중에), 애달프고 처철한 어떤 사랑은 상대방이 가학적일수록 그 빛깔이 더 숭고해보이고(슌킨 이야기), "가벼운 살갗의 스침조차 없는" 어떤 사랑은 관념성으로 금기를 초월해 거룩함에 이르며(르네), 이루지 못한 사랑이지만 그 고독한 낙인으로 세상의 한 살이를 견디었기에 그 사랑이 형벌이었는지 축복이었는지 알 수 없으며(임멘 호수),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재진행형인 사랑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었기에 한 사랑이 끝났을 때 끊임없이 사랑의 대상을 바꾸었던 사랑스러운 여인의 삶은 기구하다 할 수 없었으며(사랑스러운 여인), 쉽고 가벼운 천박한 사랑에 맞서는 한 여인의 지조는 너무 견고해서 전율과 소름 사이를 오가고(에밀리를 위한 장미), 사랑에 눈 뜰 때 우리의 눈은 멀며(환상을 좇는 여인), 사랑을 꿈꾸지만 깨어나야 하며(별), 사랑은 달콤할수록 잔인하며(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나를 구원한 그 사랑만이 나를 배신할 수 있으며(바니나 바니니), 영원한 맹세는 잊히기 쉽니다(잊힌 결혼식).

우리가 그처럼 사랑에 속기 쉬운 것은 사랑의 이중성, 사랑의 양면성 때문인 듯합니다. 순수는 어리석음과 함께하고, 가학이 있어야 숭고함이 존재하고, 금기는 거룩과 붙어 다니고, 사랑은 형벌이면서 동시에 축복이고, 이별이 있어야 만남이 있으며, 황홀한 전율은 언제든 소름(공포)으로 바뀔 수 있으며, 사랑에 눈을 뜰 때 사랑은 우리 눈을 멀게 하고, 사랑은 꿈과 현실, 달콤함과 잔인함, 구원과 배신, 영원한 맹세와 잊혀짐 속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사랑은 이렇듯 기만적이니 조심해야겠습니다.

누군가는 사랑에 풍덩 빠져 들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서서히 물들어갔다고도 했으며, 어떤 이는 교통사고를 당한듯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사랑을 귀로 전해 듣기만 했지 빠져 들어보지도, 물들어 보지도, 쿵-하고 사고를 당해보지도 않은 저에게는 여전히 이상 속의 그 무엇이면서 동시에 환멸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평생 이렇게 사랑을 책으로만 배우고 있는 건, 현실에서 경험되는 사랑의 빛깔이 너무 천박한 탓이라고 변명을 해보고 싶습니다. 사랑이 이처럼 다채로운 빛깔인 것은, 타락으로 사랑의 원형을 잃어버린 우리의 계속되는 시행착오가 아닐까요. 사랑에 속아 더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사랑의 여러 빛깔을 간접 경험해보며 나의 사랑도 여기에 대입해보면서 시행착오를 줄여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그렇게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도 여전히 배우지 못하는 한 가지는 사랑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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