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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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의 음들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연습 중인 곡을 들을 때 자주 그랬듯이. 애덤은 그걸 "에어 첼로"라고 불렀다. 늘 애덤은 듀엣으로 한번 연주해보자고 졸랐다. 애덤은 에어 기타를, 나는 에어 첼로를. "연주가 끝나면 우리의 에어 악기를 박살내버리는 거야." 애덤은 그렇게 농담하곤 했다. "너도 하고 싶잖아."
나는 그 생각에만 집중하며 연주했다. 차의 마지막 생명이, 그리고 음악이 그 생명과 함께 다할 때까지.
곧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25쪽

"제발 죽지마. 죽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 이렇게 생각해봐. 네가 죽잖아, 그러면 학교에서 다이애나 비 때처럼 느끼한 추도식 같은 걸 할 거 아냐. 다들 꽃하고 촛불하고 쪽지 따위를 네 사물함 옆에 갖다 놓고 말야." 킴은 자신을 배신하며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넌 그런 거 딱 질색하잖아."-77쪽

"의사나 간호사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벽에 늘어선 의료 기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이가 주인공이죠. 아이는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러니 얘기하세요. 시간이 걸려도 좋다고, 하지만 꼭 돌아오라고요. 기다리고 계시다고요."-91쪽

"괜찮아. 네가 떠나고 싶다고 해도. 다들 네가 남아주길 바라지만. 나는 살면서 이보다 더 간절하게 원한 것은 없었단다. 할아버지는 네가 남아주면 좋겠구나." 감정이 북받친 듯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잠깐 목청을 가다듬고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바람이고. 네가 다른 걸 바란다 해도 난 이해할 거란다. 네가 떠나고 싶다고 해도, 이해한다고 그냥 말하고 싶었다. 네가 꼭 우릴 떠나야 한다면, 괜찮아. 이제 그만 싸우고 싶다 해도 괜찮아."-196쪽

애덤이 무언가 읊조리고 있었다. 낮은 소리로. 몇 번이고 말하고 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마침내 말을 멈춘 애덤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발, 미아." 애덤이 애원했다. "내가 곡을 쓰게 만들지 마."-215쪽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 킴이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대기실에만 스무 명쯤 있다구. 몇몇은 친척이고 몇몇은 아니야. 하지만 우린 모두 네 가족이야."
킴은 이제 말이 없다. 킴이 내 위로 몸을 숙이는 바람에 킴의 머리칼 몇 가닥이 내 얼굴을 간질였다. 킴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너에겐 아직 가족이 있어." 킴이 속삭였다.-237쪽

"남아줘." 그 한마디를 내뱉으며 애덤은 울먹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이었다. "너한테 일어난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어. 좋게 생각해볼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하지만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있어.
.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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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하고 얘기했는데,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는 건 너한테 너무 고통스러울 거래, 우릴 지워버리는 게 너한테 더 쉬울 거라더라. 그건 정말 싫지만 그래도 할 거야. 내가 오늘 널 잃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널 잃는 건 할 수 있어. 널 보내줄게. 네가 남아주기만 한다면."
이제 다 내려놓은 건 애덤이었다.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그의 흐느낌은 쓰라린 상처에 주먹질을 하는 것 같다.-247~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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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무정 2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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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고원의 포수는 어려서부터 소리를 소리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소리를 만드는 사물이나 상황을 상상하지 않고 소리를 소리로만 품었다. 상상을 멈추면 소리에서 비롯되는 공포도 사라졌다.-26쪽

개마고원에서 나고 자란 포수들에겐 나침반도 수첩도 필요 없었다. 아무리 작고 복잡한 길이라도, 한 번 지나간 길은 한 달 아니 1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해냈다. 나무, 바위, 물소리, 먼 산을 한꺼번에 머리에 집어넣었다.-167쪽

창경원. 1909년 11월 1일, 세계에서 서른여섯 번째 아시아에서 일곱 번째로 개원한 근대 동물원. 치타는 달리지 못하고 원숭이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다니지 못하고 두더지는 땅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새는 하늘로 날지 못하는 곳. 낮잠에 취한 야행성 동물들을 대낮부터 깨워대는 곳. 산이 가장 증오하는 곳.-174쪽

자발적이고 이타적인 슬픔이었다. 산은 7년 동안 흰머리를 쫓으면서 흰머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들을 적지 않게 만났다. 그들이 흰머리에게 품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광활한 벌판과 까마득한 고산(高山)의 지배자! 사냥으로 삶을 이어가는 포식자 중의 포식자! 산이 개마고원에서 주홍과 어울렸을 때, 그미가 흰머리를 아끼고 걱정하는 것조차 낯설었다. 왕대를 제집 강아지처럼 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중략)… 달리고 부딪치며 살기를 내뿜는 호랑이의 광폭함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그러고도 쏟아지는 이 슬픔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이상한 사실은 산 자신도 가슴 저 깊은 곳이 뭉클거리며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살기에는 살기로만 맞서온 산으로서는 낯선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출렁임은 도대체 무엇인가?-226쪽

- 생명을 끊는 일은 쉽게 정해선 안 된다. 사냥 전에는 반드시 혼자 총을 정비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라. 짐승을 쏠 땐 한 번 묻고 호랑이를 쏠 땐 열 번 묻고 사람을 쏠 땐 백 번 물어야 한다. 이 길밖에 없는지-274쪽

저물녘 눈 내려 세상이 고요할 무렵이면, 풀숲에 숨어 쉬던 호랑이도 가끔 가장 높은 바위에 우뚝 서서, 홀로 겨울 바람 맞으며 스스로를 뽐냈다. 산 아래 티끌처럼 모여 사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우러러보며, 호랑이야말로 좋은 날이든 궂은 날이든 산을 지키는 신령이라고 칭송했다.-381쪽

밀림은 본디 정이 없다. 산도 들도 계곡도 나무도 새도 꽃도 호랑이도 정을 주고받는다면 죽고 죽이며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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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무정 1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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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바람이다. 한살이(一生) 전부를 떠돌아다니는 높바람. 생후 한 달 만에 어미호랑이를 따라 굴 밖으로 나선 후로는 정착을 모르고 이동한다. 수놈은 1,000제곱킬로미터, 암놈도 400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세력권을 돌고 돌고 또 돈다. 멈추면 소멸되는 광풍, 호랑이.-14쪽

백(白)! 검은색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비밀스런 빛깔이라면, 흰색은 모든 것을 보여주고도 거리낌 없는 당당한 빛깔이다. 압도적으로 강하거나 빠르지 않다면, 야생에서 흰 빛깔을 뿜으며 생존하기란 어렵다. 세상의 빛깔이 계절에 따라 낮밤을 쫓아 쉼없이 탈바꿈할 때, 백색 포식자는 단 한 점도 자신을 바꾸지 않는다. 눈 덮인 겨울 평원과 설산(雪山)이 뿜는 광활한 기운이 깃든 탓일까. 놈은 늑대처럼 시끄럽게 울부짖지도 않고 곰처럼 두 발을 들어 위용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백색 포식자가 믿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어떤 악조건도 단숨에 뛰어넘는 자신감이 희색에 가득하다. 달아날 테면 달아나보라. 덤빌 테면 덤벼보라. 아득히 깊은 동굴도 대낮처럼 환하다. 백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안식이란 없다.-26쪽

최고의 포수는 밤 사냥을 즐긴다. 어둠 속에서 포식자는 먹잇감을 찾아 걷고 구르고 뛰고 멈춘다. 눈이 쏟아지는 겨울밤엔 더더욱 필사적이다. 한번 사냥에 실패하면 며칠을 굶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포식자가 먹이에 집중하는 동안 포수는 포식자에게 집중한다. 여유도 유희도 몽상도 안락도 없다. 죽고 죽이려는 팽팽한 긴장만이 가득한 비밀스런 시공간, 밤의 숲. 달리는 산.-84~85쪽

일찍이 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쳤다.
- 최대한 관대해라. 가족 중 누군가가 사냥 도중 목숨을 빼앗기더라도 복수 운운하며 그 맹수를 쫓지 마라. 승부가 공정했다면 살고 죽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다. 허나 제 집을 침범한 짐승과는 목숨을 걸고 맞서라! 세상 끝까지 추격하여 급습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라.-128쪽

- 발자국이나 배설물이 없을 때 갈림길을 만난 적은 없나요?
- 있소.
- 그럴 땐 어떻게 하죠?
- 그냥, 아오.
- 그냥 알다뇨?
- 내가 호랑이라면 어느 쪽을 택할까 짐작하는 거지.
- 호랑이의 마음으로 말인가요?
- 그렇소. 호랑이의 혼으로.-135쪽

- 호랑이만 그리나요? 사람 그린 거 없어요? 그 솜씨로 초상화를 그리면 꽤 멋질 건데……. 포수가 그림은 왜 그리는 건가요?
.
.
(중략)
.
.
- 잘 죽이려고! 단번에 목숨 줄을 끊으려면 놈을 알아야 하니까.-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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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채선
이정규 지음 / 밝은세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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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법이니라. 왜 그런지 이치를 아느냐?"
언젠가 대원군이 하늘을 나는 새를 가리키며 물었다.
채선이 잠자코 있자 대원군이 말했다.
"새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 한마디가 채선의 폐부를 아프게 찔렀다.
‘뒤돌아보지 마라!’
모든 의미를 함축한 그 한마디에 채선은 깊은 절망을 느꼈다.
채선은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바람이 원하는 곳으로 불 듯 새 또한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냐고. 한낱 새 같은 미물도 그러할진대 사람이라면 진정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59쪽

대원군이 함초롬히 피어난 난초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난초들도 우리 인간처럼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아느냐?"
채선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대원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초들은 짝을 이루고 싶은 상대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고자 하지. 우리 인간들보다 난초의 짝짓기 행위는 더욱 처절하고 눈물겹다 할 수 있느니라. 난초들에게는 짝짓기 행위 자체가 투쟁이기 때문이야.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건 난초들이 치러낸 힘겨운 투쟁의 결과라 할 수 있느니라. 난초들은 우리 인간들이 보고 즐기라는 뜻으로 꽃을 피우는 게 아니야."-60쪽

그 때 문득 신재효의 귀에 낮에 광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녀는 유별해도 소리는 공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재효는 천석꾼 부자였지만 중인인 탓에 양반들에게 수많은 설움을 받았다. 그런 까닭에 늘 마음속으로나마 차별 없는 세상, 소리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신재효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소리의 잣대가 아니라 신분의 잣대로 채선을 재단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85쪽

"이슬털이 목이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는지요? 선생님께서 손수 이름을 지으셨습니까?"
"누가 이름을 지은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소리는 그리 멀리 있지 않느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대하는 사물들에는 모두 소리가 있지. 솔숲에 이는 바람소리, 풀잎들의 떨리는 몸짓 속에……. 소리꾼은 작은 소리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고 따라 해보아야 하느니라."-96쪽

"사람에게 사랑도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지만 소리만큼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길이 전해질 것이야.…(중략)."-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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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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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무조건 관찰해. 의미는 생각할 필요 없어.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어. 그러면 네 머리는 고스란히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거야."-127쪽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열아홉 살 꼬맹이는 그것을 이해할 만큼 똑똑하지 못했다.-156쪽

밑바닥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겉보기에는 험상궂지만 의리가 있어, 나는 그들이 싫지 않다.-284~285쪽

"자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자기는 자살을 굉장히 싫어한다면서요."
"아아, 그랬지. 자살은 저질이고 최악이야."
"그럼 당신도 저질이고 최악이네요. 당신이 하는 일은 자살 행위니까요.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에요. 그런 자들을 찾아가는 건 자살하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억지야. 자살이나 자살 행위하고는 본질적으로 달라."
"다르지 않아요! 목숨을 소홀히 여기는 건 마찬가지예요!"-348쪽

"모든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당신이 더 이상한 거지. 나는 좀 특별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특별한지 아닌지는 살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뛰어난 사람을 보고, 자기는 도저히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패한 거야.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인간만이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자격이 있지. 나는 살아 있는 한 뭐든지 해볼 생각이야 .내일 죽더라도 오늘 할 일은 해야지.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게 간단히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구. 포기하는 건,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늦지 않잖아. 그때까진 나하고 즐겁게 살아보자구."-505~506쪽

꽃을 보고 싶은 녀석은 꽃을 보며 신나게 떠들면 된다. 인생에는 그런 계절도 있다.
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금도 벚나무는 살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물든 벚나무 이파리는 찬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5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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