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무정 2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구판절판


개마고원의 포수는 어려서부터 소리를 소리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소리를 만드는 사물이나 상황을 상상하지 않고 소리를 소리로만 품었다. 상상을 멈추면 소리에서 비롯되는 공포도 사라졌다.-26쪽

개마고원에서 나고 자란 포수들에겐 나침반도 수첩도 필요 없었다. 아무리 작고 복잡한 길이라도, 한 번 지나간 길은 한 달 아니 1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해냈다. 나무, 바위, 물소리, 먼 산을 한꺼번에 머리에 집어넣었다.-167쪽

창경원. 1909년 11월 1일, 세계에서 서른여섯 번째 아시아에서 일곱 번째로 개원한 근대 동물원. 치타는 달리지 못하고 원숭이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다니지 못하고 두더지는 땅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새는 하늘로 날지 못하는 곳. 낮잠에 취한 야행성 동물들을 대낮부터 깨워대는 곳. 산이 가장 증오하는 곳.-174쪽

자발적이고 이타적인 슬픔이었다. 산은 7년 동안 흰머리를 쫓으면서 흰머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들을 적지 않게 만났다. 그들이 흰머리에게 품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광활한 벌판과 까마득한 고산(高山)의 지배자! 사냥으로 삶을 이어가는 포식자 중의 포식자! 산이 개마고원에서 주홍과 어울렸을 때, 그미가 흰머리를 아끼고 걱정하는 것조차 낯설었다. 왕대를 제집 강아지처럼 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중략)… 달리고 부딪치며 살기를 내뿜는 호랑이의 광폭함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그러고도 쏟아지는 이 슬픔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이상한 사실은 산 자신도 가슴 저 깊은 곳이 뭉클거리며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살기에는 살기로만 맞서온 산으로서는 낯선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출렁임은 도대체 무엇인가?-226쪽

- 생명을 끊는 일은 쉽게 정해선 안 된다. 사냥 전에는 반드시 혼자 총을 정비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라. 짐승을 쏠 땐 한 번 묻고 호랑이를 쏠 땐 열 번 묻고 사람을 쏠 땐 백 번 물어야 한다. 이 길밖에 없는지-274쪽

저물녘 눈 내려 세상이 고요할 무렵이면, 풀숲에 숨어 쉬던 호랑이도 가끔 가장 높은 바위에 우뚝 서서, 홀로 겨울 바람 맞으며 스스로를 뽐냈다. 산 아래 티끌처럼 모여 사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우러러보며, 호랑이야말로 좋은 날이든 궂은 날이든 산을 지키는 신령이라고 칭송했다.-381쪽

밀림은 본디 정이 없다. 산도 들도 계곡도 나무도 새도 꽃도 호랑이도 정을 주고받는다면 죽고 죽이며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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