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무정 1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구판절판


호랑이는 바람이다. 한살이(一生) 전부를 떠돌아다니는 높바람. 생후 한 달 만에 어미호랑이를 따라 굴 밖으로 나선 후로는 정착을 모르고 이동한다. 수놈은 1,000제곱킬로미터, 암놈도 400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세력권을 돌고 돌고 또 돈다. 멈추면 소멸되는 광풍, 호랑이.-14쪽

백(白)! 검은색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비밀스런 빛깔이라면, 흰색은 모든 것을 보여주고도 거리낌 없는 당당한 빛깔이다. 압도적으로 강하거나 빠르지 않다면, 야생에서 흰 빛깔을 뿜으며 생존하기란 어렵다. 세상의 빛깔이 계절에 따라 낮밤을 쫓아 쉼없이 탈바꿈할 때, 백색 포식자는 단 한 점도 자신을 바꾸지 않는다. 눈 덮인 겨울 평원과 설산(雪山)이 뿜는 광활한 기운이 깃든 탓일까. 놈은 늑대처럼 시끄럽게 울부짖지도 않고 곰처럼 두 발을 들어 위용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백색 포식자가 믿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어떤 악조건도 단숨에 뛰어넘는 자신감이 희색에 가득하다. 달아날 테면 달아나보라. 덤빌 테면 덤벼보라. 아득히 깊은 동굴도 대낮처럼 환하다. 백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안식이란 없다.-26쪽

최고의 포수는 밤 사냥을 즐긴다. 어둠 속에서 포식자는 먹잇감을 찾아 걷고 구르고 뛰고 멈춘다. 눈이 쏟아지는 겨울밤엔 더더욱 필사적이다. 한번 사냥에 실패하면 며칠을 굶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포식자가 먹이에 집중하는 동안 포수는 포식자에게 집중한다. 여유도 유희도 몽상도 안락도 없다. 죽고 죽이려는 팽팽한 긴장만이 가득한 비밀스런 시공간, 밤의 숲. 달리는 산.-84~85쪽

일찍이 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쳤다.
- 최대한 관대해라. 가족 중 누군가가 사냥 도중 목숨을 빼앗기더라도 복수 운운하며 그 맹수를 쫓지 마라. 승부가 공정했다면 살고 죽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다. 허나 제 집을 침범한 짐승과는 목숨을 걸고 맞서라! 세상 끝까지 추격하여 급습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라.-128쪽

- 발자국이나 배설물이 없을 때 갈림길을 만난 적은 없나요?
- 있소.
- 그럴 땐 어떻게 하죠?
- 그냥, 아오.
- 그냥 알다뇨?
- 내가 호랑이라면 어느 쪽을 택할까 짐작하는 거지.
- 호랑이의 마음으로 말인가요?
- 그렇소. 호랑이의 혼으로.-135쪽

- 호랑이만 그리나요? 사람 그린 거 없어요? 그 솜씨로 초상화를 그리면 꽤 멋질 건데……. 포수가 그림은 왜 그리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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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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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죽이려고! 단번에 목숨 줄을 끊으려면 놈을 알아야 하니까.-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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