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좀, 거창한 제목이 됐네요.^^;;

알고 계십니까? 혹은 알고 싶습니까?

제가 궁금증을 해결하거나 검증해 드리겠단 건 아니고, 사실은 어제 우연히 본 EBS <토론카페>의 제목입니다. 아주 재밌게 봤거든요.

그래서 안 보신 분들은 다시 보기로 한번 보십사 권해드립니다.

토론자들의 이야기도 균형잡혀 있지만, 무엇보다 이 토론과 더불어 함께 고민할 접점과 그 공론화의 필요성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더군요.  

어제도 밤늦게 들어와 12시엔 자려고 했는데 이 토론프로 때문에 또 늦게 잤네요.(저는 아침형이라..)

암튼 바빠서 저는 이만, 설 연휴 잘 보내세요. 

(<토론카페> 홈피에 들어가보니 아직은 다시보기가 뜨진 않더군요. 참고하세요.)  

 

* 아래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http://www.ebs.co.kr/homepage/cafe/02_weekmenu_view.asp?menu_no=104&curPage=1&col=&str=

 

<연속기획 - 한국의 진보와 보수>
2월 15일 / 제 1편-진보 대 진보 논쟁 : 한국의 진보, 어디로 가나
2월 22일 / 제 2편-보수 대 보수 논쟁 : 한국의 보수, 균열인가 변화인가

제 1편 / 한국의 진보, 어디로 가나

한국 사회의 향방을 가름할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 이념을 이끌어가는 진보와 보수가 제도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 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진보의 위기’가 화두로 들어선 지 오래지만, 그동안 대안 없는 비판과 자책의 목소리만 있었던 진보는 열린우리당의 분열로 일단 일정 기간의 혼란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현재의 혼란은 진보세력 내 노선과 대안의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며 ‘헤쳐 모이는’ 과정을 통해, 결국 차기 대선의 방향타를 설정하는 견인차가 될 것이다.

이에 <EBS 생방송 토론카페>는, 한국 진보의 위기를 올바르게 진단하고 대선 정국 등 향후 진보의 갈 길을 모색하는 <제 1편 진보 대 진보 논쟁 : 한국의 진보, 어디로 가나> 에 이어, <제 2편 보수 대 보수 논쟁 : 한국의 보수, 균열인가 변화인가>라는 주제로 2주 연속 두 차례에 걸쳐 토론을 벌인다.

이번 주 EBS 생방송 <토론카페>(진행 김주환/연출 엄한숙)는 <제 1편 한국의 진보, 어디로 가나>에서 진보개혁 세력 위기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고, 진보세력의 정권 재창출은 가능할 것인지, 진보세력의 결집과 그 생산적 대안은 무엇인지, 또한 진보가 가야할 방향과 미래에 대해 토론해 보고자 한다.

▷▶ 초대손님 (가나다 순)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김수진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윤태 계간 <한국의 전망> 편집인
정영태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종 창조한국 미래구상 사무총장
진중권 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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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오래된 정원>(2007)

 

약 한달 전 쯤이었나. 그날 작은 모임이 이 있어 새해 들어 처음 술을 했다. 양은 백세주 몇 잔에 불과했지만.. (맘이 힘드니 근래 술맛을 잃었다^^;;)  학교 앞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학사주점의 분위기 때문인지, 요 며칠 계속 이어진 감상 때문인지 돌아오는 길, 남의 집 대문에 붙여진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행사 포스터가 눈에 띄어 떼 오는 치기를 부렸다. 이미 그 며칠 전 토요일 그의 모교에서 치른 행사였다. "박종철이란 이름..", 그것은 내게 87년이고, 고교 시절 목격했던 부산 거리의 함성, 다시 지울 수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뭉쳐진 기억으로 이어진다. 여하튼 나는 추모제 소식을 부산 지역 뉴스를 통해 알았고, 우연하게도 같은 주 일요일, 남편과 함께 <오래된 정원>을 관람했었다.


씨네21에 의하면, <오래된 정원>은 임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들, <바람난 가족>과 <그때 그 사람>과 함께 한국 현대사 3부작을 완성한다고 한다. 내가 그의 영화 전부를 보지 않았기에 임상수의 영화를 결산하거나 할 맘은 없지만, 그의 전작들은 한국 사회의 변화된 시대정신을 읽으려는 자의식으로 가득하다 .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성과 결혼이라는 습속에 대한 희화화와 여성들의  반란(?)에 대한 기대를, <눈물>은 소위 주변인들에 대한 기성의 시선과 그 어긋남이 만드는 소통불가능을 직접화법으로 보여주려 하고,  <바람난 가족>은 일부일처제의 위선을 소재로 한국현대사의 뒤엉킨 이중성들( 그 현실과 균열을), <그때 그 사람>은 합리(rationality)가 부재하는 시절, 기억은 블랙코메디로서만  전달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식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순전한 내 주관적인 평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절, 그는 <오래된 정원>을 기웃거렸나?   


나는 영화를 만든단 소식을 접했을 때도, 막상 영화를 보면서도, 그리고 씨네21의 인터뷰를 보면서도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나는 위에서 "왜..기웃거렸나?"고 표현했다. 듣기 따라서는 감독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린다면 너무 정해진 순서를 밟아가는거 아닌가 하는 삐딱한 시선이 있었나 보다.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소설로 <오래된 정원>을 보지는 않았다. <손님>이 낫다는 중평을 따라 그건 읽었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손님>을 영화로 만들 능력이 없나 하는 답답함이 들어 아일랜드 이야기엔 좀 심드렁했던 것 같다. 각설하고, 왜 하필 <오래된 정원>인가? 씨네21-585호(이래 저래 많이 갖다 쓰고 있는 585호는 년초 어딜 다녀오면서 버스터미널에서 정말 오랜만에 구입했던 인연(!)이 있다^^)에서 임상수는 "시대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물결 속에 휩쓸리며 헤엄쳐가던 하찮고 가냘픈 개인의 나날을 통해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는 황석영의 이야기를 전한다.

 

황석영 선생이 이 소설을 구상한 것은 독일의 윤이상 선생 댁에서였다고 한다. 비틀린 역사에 의해 내몰린 윤이상이 망향의 슬픔으로 관현악 조곡 <뤄양>에서 태곳적 평화로운 고향을 꿈꾸었던 것처럼, 황석영도 감방에서 냉전과 분단을 살아온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가상의 유토피아 "갈뫼"를 꿈꿨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와버린 낡고 버려진 과거 속에서 말그대로 어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미처 다 살피고 못한 기억 속에서 현재의 암담함에 대한 어떤 가느다른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섣부른 짐작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실 직접 소설을 잃어야만 확인될 수 있지 싶다).

 

그 두사람, 윤이상과 황석영에게  임상수는 어떤 반향을 일으켰나? 임상수는 적어도 내가 짐작하는 바에 의하면, (그리고 리뷰의 내용도 대체로 그렇지만) 소설과 달리 과거 운동권의 집단성과 한윤희의 개인의 시간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장소에 서려 한다.  한윤희는 영화 속 인물일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운동권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며 늘 함께하는 개인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은 과거의 오현우를 받아주었고, 사랑했고, 기다려주었고, 현재의 딸과의 대면을 통해 다른 시간의 가능성의 싹을 틔어주게 된다. 

그래서 "오래된" 정원은 오래되었지만 계속 새로운 계절들 속에서 "정원"은 가꾸어질  것인가?  임상수는 이제 어떤 정치적인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과거의 운동권이 꼭 다 망각해야 하는 존재들인가 하는 물음을 가졌던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의 임상수의 화법에 너무 편견을 가졌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게 딜레마인 건 맞다. 거대한 담론보다 개인에 집중할수록 정치적인 힘은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그런데 그렇게 아직도 정치적인 힘으로 하고 싶은 게 있는 건가? 한국 현대사 3부작에는 쿨한 태도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고 개인보다는 사회 전체와 이야기하려는 시도였다. 사실은 이런 영화를 보고 즐기도 토론하는 행위 자체도 어느 면에서 원자화되고 개인만 남은 삶의 태도를 반성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 것 같다." 

 

 

P.S)1. 사실 소설은, 아는 선생님이 어떤 사이트에 올린 브레히트의 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슴 저릿한 슬픔과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겹쳐 깊은 울림을 주었던 그 시가 다시 생각난다.

 

너희들은 어디로 날아가느냐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누구로부터 떠나왔느냐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이 함께 있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조금 아까부터
그러면 언제 그들은 헤어질 것이냐
이제 곧
Wohin ihr?
Nirgendhin.
Von wem davon?
Von allen.
Ihr fragt, wie lange sind sie schon beisammen?
Seit kurzem.
Und wann werden sie sich trennen?
Bald.

 

P.S)2. 그런데 영화 본 날 극장에 사람이 너무 없어 섭섭했다. 극장이 반 정도 찼던 것 같다. 운동권이었고 이러저러한 사건에 연루돼 감방 경험도 했던 남편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우리의 민주화라는 게 왜 이 모양이냐는 억울한 감정이 치밀었다(내가 뭘 했길래? 웃기네!). 제대로 됐으면 박종철 이한열 등등의 분들이 국민적 영웅은 못 돼도 뭔가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이런 게 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는 아직 진행중이라면 너무 비약일까? 

 

**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은 소비에트 영화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의 영화 제목에서 가져왔다. 

*이 글 마치기 전, 마침 최근 오마이에 실린 황석영선생의 글에 대한 반론이 있단 얘길 듣고 함께 올린다.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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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해 계속 찔끔 찔끔 다시 보면서 너무나 느리게 글을 다듬고 있다.

물론 두 권 중 더 중요한 책은 당연히 두번째 책이지만, 시간의 문제는 여전히 쉽지 않다.  어떻게 접근하겠다는 방법론 없이 그냥 이 책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자체가 지닌 한계를 절감하다.

들뢰즈의 책들 중에 깊고 넓지 않은 책이 어디 있을까만은 <차이와 반복>, <천의 고원>, <주름> 등을 아우를 만큼 <시네마>는 웅숭깊은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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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 세계적 폭력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
에티엔 발리바르
[편집자주]

<무장한 세계화 목차>
알랭 족스, 무질서의 제국: 두 개의 좌담, {사회진보연대} 2003년 1·2월호, 3월호
끌로드 세르파티, 21세기 초, 미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한 군사 교리, {사회진보연대} 2003년 4월호
메리 켈도어 세계화된 전쟁 경제, {사회진보연대} 2003년 5월호
마틴 쇼, 위험전가 군사주의, 소규모 학살과 전쟁의 역사적 합법성, {사회진보연대} 2003년 6월호
알렉스 드 와알, 아프리카의 전쟁들, {사회진보연대} 2003년 7·8월호

이번이 "무장한 세계화" 기획의 마지막입니다. 시간의 간격이 너무 길어 이렇게 말하는 게 참 쑥스럽지만, 지금까지 기획을 일단 마무리하고 앞으로 이 주제를 더욱 보강할 수 있는 기획을 마련하려는 뜻으로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군사세계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반전-반군사주의, 평화운동의 역사적 사례들로부터 교훈을 얻으며, 현재의 긴급한 과제를 풍부히 이해하기 위한 기획을 앞으로 새로이 마련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잔혹한 극단적 폭력이 벌어지는 서로 이질적인 장소와 형태들, 그리고 상호관련성을 "지형학"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필자는 극단적인 폭력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발생하지만, 분명한 누적 효과를 생산하며, 결국 세계를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는 "초국경" (원한의 경계선) 을 생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세계적인 시민성을 창출할 수 없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대의 인민은 불필요한 "잉여"로 간주되고 , 외부세계는 예방적 "반봉기"라는 관점에서 이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호제거 또는 절멸을 조장하거나 개입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초국경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에 대한 (전쟁과 결합된) 인도주의적 개입 또는 불개입은 서로 시소처럼 반복되지만, 오히려 초국경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한 애초부터 사태의 해결 능력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국경의 민주화"를 위한 집단적 실천이 긴급한 과제라고 제안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범유럽적인 차원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제도화하고 있는 유럽연합은 극히 우려해야할 경향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번역 대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tienne Balibar, "Outline of a Topography of Cruelty: Citizenship and Civility in Era of Global Violence", We, the People of Europe?: Reflection on Transnational Citizenship, trans. James Swenson (New Jersey: Prinston University Press, 2004), pp. 1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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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세계적 폭력 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
에티엔 발리바르

나는 이런 젠 체하는 제목으로 내가 이미 여러 번 다루었던 이론적이며 철학적인 문제들의 연계에 관한 탐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잔혹성' (cruelty) 이라는 용어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을 지칭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그러나 학문적 관련성을 고려하여) 선택되었는데, 그것들은 의도적인 것이든 체계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우리가 극단성의 선을 넘어서는 바로 그 때 미심쩍게 된다 - '죽음보다 더 나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해, 잔혹성의 현실적 또는 가상적 위협은 정치에게, 특히 '세계화'라는 맥락에 있는 오늘의 정치에게 정치의 가능성 그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결정적인 실험을 의미한다는 게 나의 가설이다. 나는 정치에 대한 정치 (politics of politics) 또는 2차적 정치라는 사변적 관념을 가리키기 위해 '시빌리티' (civility) [시민적 예절]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에는 실제로 많은 다른 사용법들이 있다). 시빌리티는 공적인 일들에 대한 집단적 참여로서의 정치가 가능하거나 또는 최소한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지지 않도록 일련의 조건들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며,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시빌리티'는 분명히 모호한 용어지만, 나는 그것의 함의가 다른 용어들 예컨대 문명화, 사회화, 도시행정과 질서유지 (police and policing), 공손함 (politeness) 등등 보다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빌리티'는 사회 내의 '갈등'과 '적대'에 대한 억압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갈등과 적대가 항상 폭력의 선구자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극단적 폭력의 상당수는 ―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 사실상 '합의'와 '평화'에 대한 맹목적인 정치적 선호의 결과며, 세계적 범위에서의 법과 질서라는 정책들의 실행에 관한 맹목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른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러한 쟁점들을 '지형학' (topography) 이라는 관점에서 토론할 것이다. 나는 그 용어를 통해서 구체적·공간적·지리적 또는 지정학적인 전망과 - 이를테면 '북반구와 남반구', '중심과 주변', '국경의 이쪽 편 또는 국경의 교차점', '세계적인 것과 지방적인 것' 등과 같은 변화하는 구획들을 고려한다 - 추상적·사변적 전망을 동시에 이해한다. 이는 극단적 폭력의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무대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면들' 또는 '무대들'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장면 또는 무대는 각각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또는 '허구적인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상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보다 덜 물질적이거나 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 글은 1999년 11월 제네바 대학의 인도주의적 행동(Humanitarian Action) 대학원 과정의 개강 때 요청 받은 강연에 기초한다. 이 글은 세계화된 세계질서에서의 시민권과 인종분리, 난민과 이주, 대량빈곤과 집단학살 등이 왜 이러한 논의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가를 설명한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오늘의 세계에서 민주적 시민성 (citizenship)이 시빌리티의 구체적 형태와 전략을 발명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위치를 부여하고 연결시켜야 할 결정적인 '코스모폴리탄적인' 쟁점들이다.
나는 두 가지 일련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는, 전형적으로 유럽적인 것으로, 포스트-민족적 통합과 '유럽의 시민성'의 도입의 부정적 반향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단지 '공동체주의적' (communitarian) 요구와 '동일성의 정치'의 부활뿐만 아니라, 나아가 특히 준-아파르트헤이트적인 사회적 구조와 기관들이 발전이다. 그것은 하나의 모순적 유형을 형성하는 데, 그 유형은 이제 많은 측면에서 매우 불안정해지고 있다. 두 번째는 세계적인 것이다: 그것은 지배의 구조들을 변혁하려는 집단적 해방운동을 예방하기 위해 극단적 폭력과 대중의 불안을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 그리고 또한 토마스 홉즈가 {리바이어던}에서 예방적 대항폭력을 염두에 두고 묘사한 국가 형성의 유형을 참조로 해서 ― 나는 세계적인 예방적 반혁명 또는 반봉기의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러한 '정치'는 현실적으로 반정치적이다. 왜냐하면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은 하나의 정체 (polity) 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들 그 자체에 대한 억압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전쟁과 일종의 '인도주의적' 행동 또는 개입이 결합하여 발전하는 것을 목도한다. 많은 경우에 그러한 행동과 개입은 정확히 고통을 낳은 바로 그 권력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두 가지 일련의 문제들에서, 국경들이라는 전통적 제도가 ― 나는 그것이 현대 시대에서 민주주의 그 자체의 '주권적' 또는 '비민주적' 조건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주로 안전의 통제, 사회적 분리, 생존수단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의 수단으로 작동하며, 종종 생과 사의 제도적 분배 수단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적 폭력의 초석이 된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국경의 민주화를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것은 단지 국경의 개방뿐만 아니라 (이는 국경의 일반적인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경의 일반적인 철폐는 많은 경우에서 경제적 세력들간의 야만적 경쟁이라는 형태로 부활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으로 귀결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인민들 (물론 이주한 인민들을 포함한다) 그 자신이 국경의 기능을 다자적으로, 협상에 의해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단순히 '영토적'이지 않고 결코 순수하게 '민족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대의기관이 세워져야 한다. 이는 내가 시민성과 시빌리티가 밀접히 결합되는 '인권의 세계정치' (cosmopolitics) 라고 부른 것의 일부다.

시민성과 시빌리티: '권리들을 가질 권리'의 문제

두 가지 일련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세부적으로 검토하기에 앞서, 나는 우리가 인권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라는 더 광범위한 시각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약간의 철학적 도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작업이 필수적 출발점을 제공한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 그리고 나도 이러한 관점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그녀로부터 끌어올 수 있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전체주의의 기원}에 나오는 제국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그녀는 모든 시민적·공민적 권리를 박탈당한 '국가 없는' 인민들의 문제를 제기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들에 대한 논의에서 그녀는 정치철학이라는 전망을 이중적인 방식으로 전도한다.
첫 번째, 그녀는 [인간이라는] 종의 단순한 대표물로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배제의 형태와 극단적 폭력의 상황을 시민성과 정치 체제에 관한 논쟁의 중심으로 재도입한다. 그녀의 목적은 정의를 행하는 것과 관련된 인간주의적 기준을 주장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가 오직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한 해법을 발견함으로써만 공적 영역, 즉 인민 운동들의 관리와 사회적 갈등의 통제 (policing)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 (또는 실천(praxis)) 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최근에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기원 바로 그 직후부터 정치적 영역 내에서 만인에 대한 평등한 자유의 척도는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몫', 즉 공공선 (commonwealth) [국가 또는 공동체] 내에서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몫을 주는 것 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인정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해, 이는 차별 받는 범주들의 배제의 과정이 '도시' 또는 '정치조직'으로의 포함의 과정으로 능동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 도시에서 이소노미아 (isonomia)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권을 적용시킨 원칙] 가 의미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강한 의미의 '정치'는 아마도 아렌트가 로자 룩셈부르크로부터 물려받은 통념인 '영구 혁명'과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평등한 자유의 법률적 형태는 분명하게 제거되지 않지만 완전히 재가공되어야 한다. 현대의 인간주의와 보편주의라는 원칙의 측면에서, '권리 없는 인간'이라는 통념은 용어 자체가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명목상 권리 없는 인간은 없으며, 심지어 아동이나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를 들어 우리가 브라질의 무소유 (propertyless) [무토지] 농민들의 권리 주장 ― 그들의 모토는 '권리 없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justice for rightless) 인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위협하는 준군사집단들이 법정에서 심판 받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 또는 공식적 서류발급을 거부당한 것에 항의하며 무적자 (undocumented) 의 합법적 거주를 요구하는 프랑스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면, 우리는 저항과 폭력에 대한 거부에 기초한 이러한 요구들은 권리들의 창조 과정, 즉 '인민주권' 또는 민주주의라고 인정되는 정치적 헌정질서 (constitution) 를 허용하는 역동적인 과정의 부분적이지만 직접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시민성에 대한 아렌트의 반성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교훈들의 한 가지 측면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은 더욱 더 오늘날 현실에 적합하다. 나는 민주적·민족적 혁명의 시대 이후부터 국제적 갈등의 일반화와 제국주의의 발전에 이르는 민족국가의 역사가 '인권'과 '정치적 권리' (또는 인권과 시민권)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역전시켰다는 점을 보여준 [그녀의] 유명한 논증을 생각하고 있다. 인권 일반은 더 이상 주어진 민족적·주권적 국가의 경계들 내부에서 제정되고 보존되는 정치적 권리들을 위한 단순한 전제이자 추상적 기초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법률적인 것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지배에 대한 제한으로도 간주될 수 없다. 20세기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비극적 경험은 그 반대가 진실이 되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평등한 시민성의 현실적 승인이자 조건인 정치적 권리는 생존, 즉 단순한 생명의 유지와 관련된 가장 초보적인 권리들부터 시작하여, 인권에 대한 정의와 승인을 위한 진정한 토대다. 정치적 동물 (zo n politikon) 그 자체에 새롭고 '비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어떤 국가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되고 결국 실천적으로는 더 이상 인간으로 승인되고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시민의 능동적인 제도적 권리들이 파괴될 때 ― 예를 들어, 시민성과 민족성이 밀접히 결합되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개인들과 집단들이 그들의 민족적 소속에서 쫓겨나거나 또는 단순히 억압받는 민족적 '약소자'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 '자연적' 또는 '보편적으로 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기본적 권리는 위협 당하고 파괴된다: 우리는 이른바 과소인간 (Untermenschen) 과 과잉인간 ( berrmenschen) 이라고 여기지는 '인간' 사이의 구별이 확립되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를 목도한다. 이는 결코 우연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오늘의 정치에서 공통적인 것이 되고 있는 비가역적 과정의 결과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일신해야 한다는 긴급한 임무를 부과한다. 여기서는 정치의 본질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정치는 생명, 교통, 문화의 사회적·자연적 토대 위에 서 있는 단순한 '상부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진정한 개념은 인간들간의 특정한 공동체의 가능성 자체와 이미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은 해후를 위한, 다양한 구성 부분들과 집단들 사이의 적대의 표출과 변증법적 해결을 위한 공간을 건설하는 것과 이미 관련된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아렌트가 제안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결정적 통념은 헌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법률적·도덕적 요구들로 구성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최소의 준거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최대에 관한 이념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통념은 인간이 '공통의' 실존 영역 (그리고 따라서 노동, 문화, 공적·사적 발언의 영역) 에 소속되는 것을 최소한 승인하는 것이 이미 권리들의 총체를 수반하는 ― 그리고 가능하게 하는 ― 연속적 과정에 준거를 둔다. 나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봉기적' 요소라고 부른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또는 공화주의적 국가의 모든 헌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국가는 정의상 위로부터 부여된 지위와 권리로 구성될 수 없다 (또는 그것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다). 그것은 데모스 (dm os) [인민, 시민권을 혈통적인 방식이 아닌 이소노미아에 따라 성취한 인민] 의 직접적 참여를 요구한다.
아렌트의 논증은 민주주의적 시민성을 구성하는 평등주의적 또는 봉기적 요소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녀는 또한 그것을 시빌리티의 정치와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개념화한다. 이는 극단적으로 배제된 사람들, 곧 시민성이 부정됨으로써 또한 자동적으로 생활의 물질적 조건과 인간 존엄에 대한 인정을 부정당한 사람들이 단지 이상적인 헌정 모델에 대비하여 역사적 제도들을 평가하는 이론적 기준을 제공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오늘의 정치사회들 내에서의 ― 아니, 그들의 일상생활의 핵심에서의 ― 극단적 폭력의 현실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도록 강제한다. 이는 단지 외견상으로만 역설적이다: 칼 슈미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한계 또는 '예외 상태'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진부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체계들의 기능에 침투해 있다. 그것은 그 체계들이 권력에 부여한 이익의 연속성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체계의 생명력에 대한 영구적 위협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시민성의 권리에 대한 접근 [이용할 수 있는 권리] 과 그것에 대한 부정 사이의 ― 더욱 일반적으로는 포함의 (inclusive) 정치적 질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의 ― 선택을 사변적 쟁점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구체적인 도전이다. (민주주의적) 정치질서는 내생적으로 깨어지기 쉽거나 불확실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시빌리티의 정치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경들 국경 내부에서 또는 국경을 가로질러 또 다시 '전쟁 상태'로 전화할 것이다.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 국경의 폭력

우리는 아렌트의 논증이 유럽 역사의 '파국'의 경험, 즉 나치즘, 2차 세계대전, 유럽의 유대인·집시·여타 집단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절멸주의 등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그것의 '기원'을 민족형태의 제국주의로의 진화에서 밝혀내려고 했지만 동시에 [유럽의] 고유성을 주의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국가의 민족적 구성이 우리를 덫에 빠뜨렸던 치명적인 순환을 말함으로써 그녀의 생각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권과 '불가능한' 권리를 인식하기 위한 유일한 긍정적 또는 제도적 지평이었으며, 그것이 지지해온 보편적 가치들의 파괴를 낳았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조건 속에서 생활하며 행동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오늘의 정치에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비록 민족형태가 단순히 쇠퇴한 것은 아니더라도, 정치·경제·문화, 그리고 권력의 물질적 분배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의 조건들이 점점 더 초민족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관찰할 때, 이러한 문제는 첨예해진다. 세계화라는 일반적 틀 내에서 '포스트-민족적' 국가 또는 준-국가 기구가 출현해왔고, 여기서 '유럽 공동체'는 특권적 사례가 되었다. 우선 이러한 과정의 모순적이고 우려되는 몇몇 측면들을 살펴보자. 사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런 측면이 훨씬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공식적인 '유럽적 시민성'의 발전과 함께 현실의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가 출현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결정적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장기적 또는 오히려 단기적으로, 그것은 민주주의적인 유럽 공동체의 건설에 장애물 또는 차단물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전체적으로 유럽의 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비록 세계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초강대국에 필적할 수 있는 권력의 축적 또는 지역 권력의 창조를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비스마르크식의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성취되는 민족-이상적 (supranational) 공동체의 진정한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민족적 헌정질서와 비교해볼 때, 민족-이상적 유럽 공동체는 오직 그것이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적 잉여 (democratic surplus) 를 창조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두 가지 대칭적 문제를 제기하여 쟁점을 더욱 명확히 해볼 수 있다: 왜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왜 유럽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왜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이는 단지 외국인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국인의 일부 범부들, 주로는 합법적으로 또는 불법적으로 유럽의 부유한 '문명'을 보호하는 국경을 건너 동구나 남반부에서 온 이주 노동자와 임시수용소를 찾는 사람들, 이런 측면에서 발칸 지역은 외부성의 두 형태의 일종의 조합을 보여준다) 권리를 덜 승인 받기 때문일 수 없다.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있어야만 한다. 1993년 마하스트리히트 조약 이후로 유럽 건설의 새로운 전개는 실로 그러하다. 유럽의 모든 민족국가들에서, 시민성 또는 민족성에 대한 불균등한 접근권을 강요하는 차별 구조가 존재하였고, 특히 이는 식민주의의 과거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유럽경제공동체 이후 막 바로 등장한) 유럽 연합의 탄생으로 추가된 사실은 유럽 시민 (civis europeanus) 의 지위가 점차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개인적·집단적 권리는 점차 유효성을 획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각각의 민족 정부와 법에 반하여 유럽재판소 (European Courts) 에 호소할 수 있는 가능성).
이제 결정적 문제가 시작된다: 누구를 위한 새로운 권리인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유럽의 인구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단지 좀더 제한된 유럽 인민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현재 독일에서 벌어지고 인민 (Volk) 과 주민 (Bev lkerung) 사이의 구별을 둘러싼 딜레마를 확장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이러한 딜레마가 나타나고 있으며, 독일의 논쟁은 하나의 패러다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럽 헌법을 위한 상징적·법적·물리적 기초로서 유럽 인민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곤란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마하스트리히트 조약은 하나의 입헌 민족국가에서 이미 시민성 (즉 민족성) 을 소유한 사람들, 오직 이 사람들만이 자동적으로 유럽적 시민성을 보장받는다고 진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 이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내에서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 이미 하나의 방향을 결정한다. 유럽에서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이민자들의 양적·질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프랑스의 정치학자 까뜨린느 위똘 드 웬뎅은 이들을 '16번째 회원국가'라고 불렀다), 그것은 포함의 기획을 배제의 프로그램으로 즉각적으로 변형한다. 이는 세 가지 변태로 요약될 수 있다.

1. 외국인 (foreigner) 에서 [이질적인] 이방인 (alien) 으로 (이는 다른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2등 계급의 거주자들을 의미한다).
2. 보호에서 차별로 (오스트리아의 사례가 보여준 것처럼, 이는 민감한 쟁점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는 정도와 언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유럽의 일반적 문제다: 정치적 시민성이 허용되지 않은 이주 노동자의 일부가 약간의 사회적 권리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즉 그들이 '사회적 시민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복지와 사회보장 또는 이와 유사한 것들에서 추방하는 것은 보수주의 세력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쟁점이자 강박이 된다 ― 프랑스의 민족전선 (National Front) 은 이를 '민족 우선' (national preference) 이라고 부르지만, 민족적 제도들 내에 이미 그러한 우선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유럽 우선'이 될 수 있다).
3. 문화적 차이에서 인종적 낙인으로. 이는 포스트-식민적 그리고 포스트-민족적 '새로운 인종주의'의 창조 과정의 중심에 있다.

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와 유사한 것을 제안하는가? 이는 단지 쓸데없는 자극이 될 수 있다...

정말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아프리카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이제 유럽에서 (그리고 아마도 다른 곳에서) 재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 '제국의 역습'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우리는 제도화된 인종주의의 다른 역사적 사례들과의 비교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미국은 '짐 크로우' [흑인 일반, 또는 흑인차별주의] 체계를 완전히 망각한 적이 결코 없으며, 보수적 정책이 의제에 오를 때, 주기적으로 그것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독일 동료인 헬무트 리트리히 (Helmut Detrich) 는 유럽의 '동쪽 국경'에서의 난민과 이주자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는데, 그는 유럽제국의 새로운 배후지 (Hinterland)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하나의 또는 다른 체계에 의해 창조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라는 문제는 제쳐놓고 대신에 그 구조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아프리카, 아시아 또는 유럽의 여타 지역 출신의 이주자들이 과거에 생활하던 지역의 상황과 남아프리카적 의미에서의 자치구 (homelands) [남아공 흑인 반투족의 자치구] 사이의 비교라는 관점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적 사례로부터 최소한 교훈을 빌어 오기 위해 두 가지 보충적 논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국경의 한쪽 편에서 그들의 생활을 '재생산'하고 또 다른 쪽 편에서 '생산'하며, 따라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자도 아니고 외부자도 아니거나 또는 (우리들 다수에게) 공식적으로는 외부자로 간주되는 내부자인 중요한 노동자 집단의 상태가 '안전' 통제의 규모와 그 폭력을 점차 증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 통제는 상당히 오래된 '인종적 프로파일링' (profiling) 을 신원확인과 기록의 현대적 기술과 결합하면서 사회의 모든 곳으로 확산되고 '유럽적' 영토 전역에서 경계선들을 세분화한다. 쉥겐 (Schengen) 협정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EU 회원국간의 국경을 철폐하고 출입국수속을 없애기 위해 1986년 룩셈부르그의 쉥겐에서 체결된 협정]. 두 번째 보충적 근거는 이주자 가족 (그리고 그들의 구성, 그들의 생활방식) 의 존재는 이주 정책과 여론의 진정한 강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 가족은 분리되어야 하는가, 통합되어야 하는가 (즉 재통합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국경의 어느 편에서, 어떤 종류의 가족이 (전통적 또는 현대적), 어떤 종류의 친척들과 (부모 또는 자식), 어떤 종류의 권리를 갖고?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민족적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가족 정치, 또는 더 일반적으로 계보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역사적 인종주의의 결정적인 구조적 생산양식이다. 물론 민족적인 것이 다민족적 공동체가 될 때에도 이는 진실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인종분리를 폐지하는 유럽, 즉 민주주의적 유럽은 결코 의제에 오르지 않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사실상 상황은 훨씬 더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두 가지 방향의 경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마지못해 인정되는 역사적 교차점에 서 있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생각을 주장하고 싶은데, 이는 다음 논지로 넘어가기 위해 필수적이다. 즉 이러한 쟁점들이 전형적으로 하나의 세계적-지역적 ('세계-지역적'(glocal)) 문제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부착된 유럽적 시민성' (또는 법률-지위적·귀속적 시민성) 의 모순적·진화적 모형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화의 현실적·가상적 효과에 대한 반작용이다.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효과의 단순한 투영이다.

세계적인 예방적 반봉기: '국경 없는 폭력'

나는 이제 내가 말했던 중심 주제인 '세계적 반봉기'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는 국경의 폭력이 아니라 국경 없는 또는 국경을 넘어선 폭력이다.
나는 로잔 대학의 피에르 드 세나르클랜이라는 스위스 전문가가 출판한 인도주의적 행동에 대한 최근 저작을 인용할 것이다. 그는 오늘의 폭력에 대한 공식적 정의의 중요성과 '인도주의적인 개입'의 범위와 의미를 확대하기 위한 정당화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1981년, UN 총회는 새로운 국제 인도주의적 질서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 직후, 총회는 저명한 인사들을 모아놓은, 국제적인 인도주의 문제들에 관한 독립위원회의 창립을 지지하였다... 위원회의 1986년 보고서는 환경파괴, 인구변화, 인구이동, 인권침해, 대량살상무기, 북반구-남반구의 양극화, 테러리즘, 마약 등과 같은 이 시대의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도전을 인도주의적 기획 내부에 포함시켰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 "우리는 인도주의를 동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규정하기 위해 참고해야할 틀로서 그리고, 해결을 위한 처방으로서 고려해야 한다." 이후 저자는 1989년 이후 "양대 진영"이라는 냉전 체계의 붕괴가 어떻게 초강대국들 사이의 대치로 인해 정치적 폭력에 부과되었던 한계를 무너뜨리고, '전쟁'과 '평화' 사이의 경계선을 흐리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도 냉전의 빠른 종말의 서곡이었던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예견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국제적 구조의 변형과 그에 따르는 폭력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50건 이상의 새로운 군사분쟁이 있었고, 이러한 분쟁들은 본질적으로 내전이었다. 이 중 특정 분쟁들―르완다, 유고슬라비아, 체첸 또는 알제리의 분쟁들―은 폭력과 잔혹성, 파괴의 광범위함, 그리고 분쟁이 야기한 인구이동이라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국제사회는 단 한번도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낸 이렇게 많은 전쟁을 대면한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대량폭력과 극단적 폭력의 다면적 현상이 일반적으로 국가들 사이의 내부적·외부적 세력관계를 포함하는 정치를 대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정치와 폭력 ― 합리적 조직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파괴를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는 폭력 ― 의 영역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할 수도 있다. 정치와 폭력은 점차 상호 침투해왔다.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인도주의적 행동' 또는 '개입'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정치의 필수적 보충물이 되어버린 바로 그러한 조건 속에서 정치와 폭력의 상호 침투가 일어난다. 나는 이 같은 변이의 모든 측면을 논의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정치 그 자체의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질문을 간략히 언급하려고 한다.

우리는 '전례 없는' 극단적 폭력 (또는 극단적인 것의 폭력) 의 확산에 직면하고 있는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싶다. 이 문제는 '과거의 전쟁과 새로운 전쟁'이라는 쟁점에서부터 왜 그리고 어떻게 역사 속에서 벌어진 '집단학살들을 비교해야 하는가'라는 도덕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토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전례가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극단적 폭력의 새로운 가시성일 것이다. 특히 매체의 포괄 범위와 텔레비전 방송과 이미지 변형 등의 현대적 기술이 ― 마침내 우리가 사상 최초로 걸프전 동안 거대한 규모로 '가상 현실'이 생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 극단적 폭력을 하나의 쇼로 변형하고,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동시에 이 쇼를 펼쳐놓는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가시성은 전례가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기술의 효과가 (앙골라나 시에라리온에서 수백 명의 불구가 된 아이들의 모습과 같은 진정으로 끔찍한) 어떤 폭력적 과정들 또는 끔찍한 장면들은 드러내 보이고 (바그다드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똑같이 끔찍한) 다른 것들은 덮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극단적 폭력에 대한 [매체의] 보도가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라는 법적·도덕적이지만 거의 정치적이지 않은 개념의 무차별적 사용을 통해 냉전 동안의 '공포의 균형'이 '희생자들 사이의 경쟁상태'로 정치적으로 이행했다는 매우 단순한 관념을 믿게 만들 때, 우리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작용한다는 의심을 품는다. 결국 우리는 일상적 공포의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고 그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특히 인류 중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보호받는 지역 내에서 매우 양가적인 효과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동정심과 함께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이처럼 인류가 질적으로 다른 문화 또는 문명으로 실제로 분할되어 있으며, 이러한 문화 또는 문명은 오직 그들간의 '충돌'을 초래할 것이라는 관념을 강화한다.
나는 이러한 모든 곤란함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실은 '전례 없는' 어떤 것이라는 통념의 이면에 놓여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아마도 수많은 절멸의 이질적 방법들 또는 과정들 (나는 이를 통해 어떤 개인들이 객관적 또는 주체적 집단들에 속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개인들로 구성된 대중을 제거하는 것을 지칭하고자 한다) 이 스스로 '세계화'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즉, 그것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시에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점차적으로 하나의 '연쇄'를 형성하며, 20년 전 E. P. 톰슨 (E. P. Thompson) 이 '절멸주의'라는 이름으로 예상했던 것에 완전한 현실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일련의 연속된 과정들 속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은 포함해야 하는데, 정확히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들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원인'을 갖고 있지 않지만 누적된 효과를 생산한다.

1. 전쟁 ('내전'과 '외국과의 전쟁' 양자 모두,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나 체첸과 같은 많은 사례들에서 이런 구별은 쉽지 않은 일이다).
2. 인종적 또는/그리고 종교적 '정화'(cleansing)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는 [보통 '인종청소'라고 부르는], 공동체에서의 폭동.
3.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 경제의 파멸로 야기된 기근과 다른 종류의 '절대' 빈곤.
4. 외관상 '자연적인' 대재앙들. 그러나 그것들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구조들로 과잉결정 되었으므로 실제로는 대규모의 살인이다. 여기에는 발전된 시민적 보호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의 세계적 유행병 (예를 들면, AIDS의 분포와 치료 가능성은 유럽·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뭄, 홍수 또는 지진 등이 포함된다.

결국 나는 다양한 종류의 극단적 폭력의 '세계화'가 '세계화된' 세계를 점차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고 있다고 제안하고자 한다. 이들 지대 (심지어 그것들은 하나의 나라 또는 도시의 경계 내에서 복잡하게 중첩되고 빈번하게 재생산된다) 사이에, 결정적이고 깨지기 쉬운 초국경 (super-border) 이 존재한다. 이는 인류의 통일과 분할에 대한 공포와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 현대 유럽의 세계 정복 초기에 존재했던 '친선의 경계선' (amity line)과 유사한 세계적·지역적 '증오의 경계선' (enmity line) 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영원한 쇼의 대상이자 동시에 개입과 불개입을 위한 뜨거운 지역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초국경이며 증오의 경계선이다. 우리는 현재의 국제 정치에서 가장 우려되는 측면이 '인도주의적 개입'인지, '일반화된 불개입'인지, 아니면 후자 이후의 전자인지 토론할 수 있다.

우리는 극단적 폭력을 시장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 경제') 관점에서 '합리적'이거나 '기능적'이라고 간주해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 사실 나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 회피될 수 없다. 따라서 이는 또한 지적으로도 가장 어려운 도전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매우 명백하지만 자주 범하는 그릇된 추리를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결과와 목표 또는 목적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체계들을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토론하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한가? 다른 한편, 우리는 자본주의와 같은 어떤 구조의 내재적 목적 또는 '논리'에 대한 반성을 회피할 수 있는가?) 매우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난점은 대량폭력의 연쇄 ― 예컨대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한 전제조건들의 창조를 빈민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하면서 시초 축적 (primitive accumulation) 이라고 부른 것과 비교될 수 있다 ― 의 출현에 기원을 둔 두 가지 대립적인 '세계적 효과'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 효과들 중 하나는 수백만 명의 잠재적 노동자들의 물질적·도덕적 불안전 (insecurity) 을 일반화하는 것, 즉 대규모의 프롤레타리아화 또는 재프롤레타리아화를 유발하는 것이다 (불안전이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의 핵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다소간 벗어났던 프롤레타리아 상태로의 복귀를 결정적으로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화의 새로운 국면이다). 이러한 과정은 자본과 또한 인류의 이동성이 증가된 것과 동시대적이며, 그리고 그 때문에 이는 국경을 가로질러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과정은 또한 몇 개의 정치적 변종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북반구'에서 그것은 내가 '민족적 사회적 국가'라고 부르는 복지국가가 창조한 사회정책과 사회적 시민성의 기관들의 부분적 또는 심층적 해체를 포함하여, 따라서 복지에서 근로연계복지 (workfare) [노동하는 것을 조건으로 국가가 공적인 부조를 베푸는 것]로의 폭력적 이행과 사회적 국가에서 징벌 국가 (penal state) 로의 폭력적 이행을 포함한다 (루익 와깡이 최근의 에세이에서 설득력 있게 논증한 것처럼, 미국은 이런 관점에서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2. '남반구'에서 그것은 '발전주의적' 프로그램과 정책들의 파괴와 전도를 포함한다. 발전주의는 대체로 희망했던 [경제적] '도약'을 낳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지만 빈곤화에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주었다.
3. 이매뉴엘 월러스틴의 범주를 빌려오면, '반주변부'에서 그것은 '현존 사회주의'라고 불렸던 독재 구조의 붕괴와 연관되었다.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는 결핍과 부패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다시금 특정한 한계들 내에서 부와 빈곤의 양극화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안하고자 한다. 노동력의 재프롤레타리아화로 귀결되는 이 모든 과정들의 공통적인 형식적 특성은 그것들이 국가장치 바로 그 내부에서 [역사를 만드는] 기층 민중 (subaltern) 의 대표 형태와 가능성을, 또는 당신이 이 표현을 더 선호한다면, 다소 유효한 대항권력의 가능성을 억압하거나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주목함으로써 우선 주로 '경제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과정의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다른 장면, 즉 대량폭력이 야기한 다른 종류의 결과들을 살펴볼 때, 정치적 측면은 훨씬 더 결정적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원인과 결과의 메커니즘은 지극히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의문의 여지가 없이 현실적이다. 나는 훨씬 더 파괴적인 경향, 즉 복지나 전통적 생활양식에 대한 파괴의 경향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 그 자체에 대한 그리고 결국 '생명 그 자체'에 대한 파괴적 경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생을 명령하는' 정치와 '죽음을 명령하는' 정치라는 두 가지 종류의 정치를 대비시키곤 했던 미셸 푸코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인류의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던 곳에서 펼쳐지는 극단적 폭력 또는 잔혹성의 다양한 형태들의 누적된 효과에 직면하여, 우리는 현재의 생산 및 재생산 양식이 제거를 위한 생산의 양식이자, 생산적으로 활용되거나 착취되기보다는 오히려 항상 이미 불필요한 잉여 (superfluous) 가 되는 인구의 재생산 양식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인구는 '정치적' 또는 '자연적' 수단을 통해 제거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이른다―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사회학자들은 도발적으로 이들을 세계 도시 밖으로 '내던져진' '쓰레기 인간' (poblacion chatarra) 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다시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한 것의 합리성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비합리성의 완벽한 승리를 대면하고 있는가?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이지만 (왜냐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축적 규모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합리적이다 ― 또는 더 적절히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사실상 역사는 단순히 순환적인 방식으로 즉 축적의 연속적 국면들의 순환 유형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19세기와 20세기에 경제적·정치적 계급투쟁이 출현했고, 그 결과로 착취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세력 균형을 창조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말하자면, 체계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 체계는 (그리고 아마도 그 체계의 이론가와 정치가의 일부는) 계급투쟁이 없는 착취는 없고, 착취 받는 자들의 조직과 대표가 없는 계급투쟁은 없으며, 정치적·사회적 시민성을 향한 경향이 없는 대표와 조직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이 정확히 현재의 자본주의가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세계의 일부에서 실현된 '민족적 사회적 국가'에 상응하는 '세계적 사회적 국가'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내 뜻은 정치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세계적 사회적 국가'를 향한 모든 움직임에 대한 [현재 자본주의의] 정치적 저항이 존재하며, 게다가 그러한 저항은 매우 폭력적이다. 기술혁명은 현재적 또는 잠재적 노동력의 탈프로레타리아화를 위해 긍정적이지만 불충분한 조건을 제공한다. 바로 이 때, 직접적인 정치적 억압 또한 불충분할 것이다. 가능한 한 '수동적으로' 그리고 필요하다면 '능동적으로' 제거 또는 절멸이 일어나야 한다: 상호 제거가 '최상'이지만, 그것은 외부로부터 조장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세계적 폭력의 경제'가 기능적이지는 않지만 (왜냐하면 그것의 내재적 목표는 실로 모순적이다) 목적론적 (teleological) 의미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우리는 나의 세 번째 질문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일한' 인구가 광범위하게 목표물로 삼아진다 (또는 역으로 목표물로 규정되지 않은 인구는 점점 동화되며, '동일한 사람들'처럼 보이게 된다). 질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외연적 의미가 아니라 내포적 의미에서 질적으로 '탈영토화된다'. 그들은 항구적인 제거의 위협을 받으면서 도시의 변두리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역으로 그들이 그들의 본국 내부로 고정될 때에도 그들은 '유목민'처럼 생활하고 또 그렇게 인식된다. 즉, 그들의 실존 그 자체, 그들의 양, 그들의 운동, 권리와 시민성에 대한 그들의 잠재적 요구가 '문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된다.

결국, '극단적 폭력'은 '세계적 체계'를 형성하는가?

폭력은 고도로 '비정치적'일 수 있다―이는 내가 제안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폭력의 다양한 형태가 서로를 강화한다면, 그리고 그 다양한 형태들이 그 자신의 연속과 잠식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데 기여한다면,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들이 잔혹성과 절멸의 확산을 예방하거나 그 효과만을 제한하려는 행동들이 체계적으로 가로막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인간 (주의) 적 파국'의 연쇄를 확립한다면, 폭력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거나 또는 '체계적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목적 없는 목적론은 내가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예방적 반혁명'으로 또는 아마 더 나은 표현으로 '예방적 반봉기'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은 외양상으로만 '홉즈적'인데, 왜냐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 대항하여 사용되는 무기는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르 몽드}는 최근에 콜럼비아를 국가와 마피아에 의해 수행된 '사회에 대한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언급했다). 이는 반정치로서의 정치이지만, 폭력의 이질적 형태들 사이에 수많은 연관으로 인해 하나의 체계로 나타난다 (국가예산에 필수적인 무기거래는 부패를 동반하며, 부패는 범죄행위를 동반하며, 마약·장기매매·현대적 노예무역은 독재를 동반하고, 독재는 내전과 테러를 동반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형상을 그리기 위해서 모든 형태의 폭력을 혼돈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정치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인도주의적 개입은 종종 여기에 참여한다), 방송과 개입 양자 모두를 수익성 있는 사업의 원천으로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경제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깨지기 쉬운 경계선을 갖는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 사이의 분할에 대해 말하였다. 그것은 세계화의 '전체주의적' 양상에 대해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계화는 분명히 그것만이 아니다. 인류가 경제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문화적으로 '통일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인류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 '생-정치적으로' (bio-politically) 분할되었다. 시빌리티의 정치 (또는 인권의 정치) 는 파괴된 통일성에 대한 가상적 대체물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모든 곳에서 그리고 특히 국경 자체에서 평등이라는 쟁점을 정치적 행동의 지평으로 재도입하는 일련의 주도성이 될 수도 있다.

결론

'진정한' 결론은 없을 것이고, 단지 몇몇 민감한 쟁점에 관한 직접적 반성과 토론의 시도들만이 있을 뿐이다: '대항폭력'이라는 쟁점, 국제법이라는 쟁점, '시민성'에 대한 접근이라는 쟁점, 그리고 내가 '봉기'라고 부른 것 등.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시빌리티 전략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전략들의 실현 가능한 토대와 실행에 관한 논의는 또 다른 에세이에서 다룰 문제다. 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극단적 폭력 또는 잔혹성의 연계 속에서 현실적 측면과 가상적 측면이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를 다른 것에 비해 특권화하는 태도를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정치적 행위에 관한 고전적 개념들이 항상 행해왔던 것이다: 고전적 개념들은 주로 공동체들과 공동체적 감정을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리고 나는 모든 역사적 공동체들이 일차적으로 '상상된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에 확실히 동의한다), 또는 더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즉 사회적 구조들, 특히 지배와 착취의 구조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전형적인 사례다). 나는 오늘의 정치에서 극단적 폭력이라는 쟁점의 핵심적 특징은, 이러한 이중적 양상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상들의 요구와 제약을 비판적인 방식으로 결합하기 위해 실천적·구체적으로 노력함으로써, 그러한 이원성의 지양을 탐색하고 발명하는 것을 훨씬 더 긴급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때문에, 예를 들어, 나는 국제법이 세계적 규모의 민주주의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시빌리티의 정치의 토대가 국제법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다. 예컨대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 [국제법] 이면에 있는 교통 (communication) 의 윤리에 대한 강조를 덧붙이면서 일관되게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교통'의 관문들이 때로는 강제에 의해서, 때로는 폭력적 방식으로 열려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잠겨진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여기서 국제법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반대 각도에서 보면, 우리는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는 대량폭력의 반혁명적 또는 반봉기적 특징은 혁명이라는 관념의 갱신으로서 '반-반봉기' (counter-counterinsurrection) 를 요청한다고 제안할 수 있으며, 이를 옹호하는 충실한 사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 이 때 아마도 진정한 '세계혁명'은 폭력과 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최근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 등을 연계시키는 바로 그 세계적 구조에 대항하는 방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은 정치적 수단과 목표가 바로 그 [자본주의, 제국주의, '제국'과 똑같은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대칭성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회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최초의 혁명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하려한 이래로, 정치적 수단과 목표는 극단적 폭력이 해방의 정치의 핵심에 구축되는 데 일조했고, 20세기가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것이 되는 것에 일조했다. 국가나 경제뿐만이 아니라 혁명 그 자체가 '문명화'되거나 '시민적' (civil) 이게 될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 많은 곳에서 그러한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적극적으로 탐색되고 있지만 분명히 발견되거나 제시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좀 더 조심스럽고 아마도 아포리아에 가까운 방식으로 네덜란드 정치학자 헤르만 판 군스테렌의 최근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나는 모든 정치적 공동체들 ― 여기에는 근린에서부터 도시, 국가, 대륙, 지구 그 자체에 이르는 (가야트리 샤크라보티 스피박은 이런 맥락에서 행성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또는 '영토'에서 '네트워크'에 이르는 가상적 공동체들이 포함된다 ― ( [위대한 결말을 암시하는] '숙명' (destiny) 과는 반대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지만 비극적으로 투쟁할 수는 있는] 운명 (fate) 의 공동체라는 판 군스테렌의 제안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이미 차이와 갈등을 포함하며, 그 곳에서 이질적인 인간과 집단들은 역사와 경제에 의해 '함께 내던져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이익이나 문화적 이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수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호파괴 (또는 외부 세력에 의한 공멸) 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완전히 분기될 수도 없다. 인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 (그리고 또한 1796년 칸트의 에세이 '영구 평화를 향하여'의 정식, '그들은 ... 결국 서로 가까이 있는 것을 참아야 한다')에서 영감을 얻어서, 판 군스테렌은 모든 집단의 모든 개인에게는 그 또는 그녀가 '시민'으로 인정되는 적어도 하나의 '장소'가 세계 내에 존재해야만 하고, 따라서 인권을 누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메타정치적 (metapolitical) [정치에 대한 정치라는 차원의] 원칙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그 원칙을 넘어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이 원칙은 다른 의미에서는 단지 우리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한 장소는 어디인가? 공동체가 '운명의 공동체'라면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급진적인 것이다: 개인들과 집단들이 속한 어느 곳이라도 그러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어디든 그들이 '우연히' 살게되고, 그래서 일하며 아이를 기르고, 친척을 부양하고, 모든 종류의 '친교'를 위해 동료를 찾는 모든 곳이 그러한 장소다. 오늘날의 세계화되고 잔혹한 세계의 '지형학'에 대해 내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권에 대한 승인과 제도는 실천적으로 인권의 발전을 명령하며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배타적 소속 (membership) 을 넘어 조직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국경 위에' 위치해야 하는데, 우리의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실제로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불안정한 상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매우 정확한 요구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판 군스테렌은, 내가 '시빌리티'의 관점이라고 부른 것에 입각해 볼 때 중요한 문제는 단지 시민성과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소속의 자격이 아니라 항구적 접근권이라는 (또는 그가 쓴 것처럼 '형성 중인' 시민성이라는) 관념을 타당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법적 지위라기보다는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시민적 과정이다. PSSP
2004년06월14일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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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을 해서 긴장이 풀렸나. 토요일 병원에 갔다 몸이 안 좋아서 저녁에도 계속 누워 있다 밤늦게까지 티브일 켜 놨다. 교육방송의 <스페이스 공감>에서 '쇼규모 아카시아 밴드'란 소박한 음악을 듣게 되었다. 어린 시절 동요같은 소프트 락이 나름대로 귀에 와 닿는다. 그걸 보다 어느덧 <세계의 명화> 시간. 무슨 영활하는지도 몰랐는데, 제목은 <약속>이었다. 알고보니 바로 다르덴 형제의 <약속>이지 않나!

 

 

너무나 반갑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들>의 '올리비에 구르메'가 아버지로, <더 차일드>의 '제레미 르니어'가 아들로 나온다. 겉늙어 보이는 황폐한 얼굴로 사회의 주변에 떨어져 돈이 되는 좀도둑질로 먹고 살던 20대 초반의 청년.  관계가 만들어내는 책임을 배우지 못하고 귀찮고 돈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기를 팔아버렸던 어린 아버지 이고르. 그는 결국 책임을 선택했었다. 바로 그 이고르의 10년 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벨기에의 소도시 작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기술을 배우며 일하는 소년 '이고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냉각수가 떨어진 자동차를 몰고 온 노부인의 차를 봐 주고 공짜로 냉각수를 갈아준다. 이고르는 부인이 수고비를 주겠다는 데도 한사코 사양하고 지갑이 없어졌다는 부인에게 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흘렸을 거라며 거긴 질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주의도 잊지않는 친절한 소년이다.

그러나 곧 다음 장면, 설마 했더니 화장실에 간다던 이고르는 정비소 뒤뜰로 가 여자 지갑에서 돈만 챙기고 지갑은 땅에 묻는다.(나도 깜박 속았다!) 그는 열네살, 도둑질과 거짓말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 '로제'는 이민자들을 밀입국시켜 임시 거처를 마련해 주고 노동을 강요하는 악덕 업자다. 아들 이고르는 아버지를 충직하게 돕는데, 그는 아버지의 불같은 성미와 매질을 잘 알고 있고 이미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런데 이고르는 가나에서 온 불법이민자 남편 '아미두'를 찾아 온 부인과 아들을 보게 된다. 부인은 새집에 오자마자 아기를 위해 악귀를 쫓는다고 아프리카식 푸닥거리를 한다. 엄마 없이 한번도 보호받지 못한 이고르는 그 낯선 광경을 통해서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받은 걸까. 그녀는 항상 그의 주의를 끈다. 어느날 임시 거처에 경찰이 들이닥쳐 급히 피하려던 아미두가 건물에서 떨어지고 정신을 잃어가던 그는 이고르에게 자신의 부인과 아기를 돌봐 줄 것을 부탁한다. 이고르는 약속한다고 대답한다. 

정신을 잃은 아미두를 병원에 데려가려는 이고르는 일이 커질 것을 두려워하는 아버지가 막는다. 로제는 아직 죽지 않은 그를 나무 상자에 넣고 시멘트를 부어 생매장해 버린다. 이고르는 아버지를 용납할 수 없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다. 몰래 그녀를 도우려던 이고르는 아버지에게 들켜 매질을 당하고는 다시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으로 부자지간의 신의를 다짐받고 아버지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로제가 남편을 기다리며 돌아가지 않는 그녀를 속여 급기야 사창가에 팔아 넘기려하자 이고르는 더 이상 아버지를 참지 않는다. 차마 아버지를 고발하지는 못하지만 아미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손에서 부인과 아기를 구해 집에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그녀는 다리 위에서 다리 밑의 그녀에게 노상방뇨하는 양아치들, 그녀를 겁주는 오토바이족들 보며 이고르에게 말한다. '너의 아버지도 그렇고 너네 나라에는 나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냐'고. 서구식 자본주의는 연대하게 하기보다 성과 인종, 그리고 빈곤과 종교에 의해 서로 차별하고 구분짓게 할 뿐만 아니라 약자의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들은 열병이 난 아기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흑인 여자 청소부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남편 아미두를 기다린다. 결국 이고르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녀는 떠나려던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이고르는 짐을 들고 그녀를 따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은 어디까지 동행하게 될까. 그녀가 짐을 풀고 안식할 수 있는 장소는 있을까. 어린 이고르가 언제까지 그들 모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카메라는 그들의 뒷모습을 쫓으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나라도 나서서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 그러나 나서는 것은 연약한 어린 소년 뿐인 것을 보여주며,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을 확립한  첫번째 장편이라는 <약속>은 이후 영화의 시선과 주제 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더 차일드>가 <약속>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영화의 인물들은 제도권의 관심과 혜택 바깥에 거주한다. 말 그대로 주변부 인생인 그들은 몸뚱이-로 하는 절도, 폭행- 외엔 어떤 재산도 없다. 그들은 그러한 삶을 빠져나올 길을 찾지도 못하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사회의 관심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스스로 방어하고 그들 보다 더 약한 이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주변인들의 삶의 윤리다. 결국 <약속>이란 이들에게 암묵적으로 남겨진 자기-구원의 가능성이 아닐까. 그래서 이들의 약속은 지키지 않는 헛된 약속이 아니라 엄중하고 무겁게 서로를 책임지는, 책임지우는 관계의 윤리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 속의 수많은 이고르들에게 약속의 윤리나마 허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최소한의 약속마저 외면하도록 강요하는 어두운 시절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 

(2006.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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