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사회를 위해서는 대안교육이라는 밑거름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시절, 80년대를 마감하면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한국 현대정치사에 문제제기하며 전교조라는 씨를 함께 뿌렸다. 그리고는 20년이 더 지났다. 그런데 전교조는 어떤 상황인가? 여전히 위기이고, 여전히 일방적으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다. 전교조의 일선 교사들과 지도부 모두가 학교 현장의 문제들이 산적한 상황에서 교육의 문제를 현장의 상황에서 절박하게 풀어가지 못한 안일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듣기로는 평교사들은 이해집단으로 전교조를 택하는 이들이 부지기수고, 지도부는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돌출된 행보를 보였다.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고 교육 현장의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는 상황에서 전교조의 이름은 별 울림이 없거나 이 정권의 각색에 의해 정치색만 남고 온갖 부정적인 회칠을 당하고 있다. 다시 처음부터라는 심정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전교조 지도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나대로의 답답함과 관심으로 이런 리스트를 만들어 본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 공교육의 대안으로 뜬 핀란드 교육은 물론 공부법에 대해서 이미 많은 책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핀란드 교육에 대한 두 권의 책이다. 하지만 얼마 전 MBC 스페셜을 통해서 본 남한산초등학교 사례는 우리 땅에 교육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려줬다는 점에서 첫번째 책으로 꼽고 싶었다. 

그리고 대안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조한혜정 선생과 <하자 센터>를 빼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그 공간은 학교와 정책이 만나 이룰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사례를 낳은 것 같다. 수많은 교육 활동가들, 자기 길을 창조하는 청년들을 배출했다. 조한혜정 선생의 하자센터의 결과물과 그 영향관계 속에 있는 책들을 몇 권 꼽았다.  

  

 

 

 

 

 

 

대안교육의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부산의 소위 부자 동네 작은 서점에서 시작된 책읽기와 글쓰기가 생각과 삶의 문제로 옮겨가 보기 드문 실천의 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소수이면서 매우 거창해서 대안교육의 사례로 볼 것인가가 약간 고민스러웠다. 유명하다고 주류는 아니지만 인디고서원의 드러난 행보는 이름난 이들과의 교류로 채워져왔다(최근 출간된 인디고잉의 국제판 표지를 보라). 나는 일선 학교에서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유명학자들과의 인터뷰와 만남을 갖는 것을 대안적인 사례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우리는 그들과 꼭 만나지 못하더라도 책을 통해 얼마든지 그들과 교류할 수 있고, 그러한 교류만으로 어떤 대안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안교육의 사례를 넓은 범주에서 학교 안팎의 모든 새로운 교육적 시도와 실천이라고 한다면 인디고 서원의 이야기도 분명 대안교육의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디고 서원의 아이들(이라고 하기에는 이제 모두 나이가 많지만)은 공교육(중고등은 물론 대학교육)에서 만들지 못하는 어떤 삶의 길을 만들고 있고 우리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 지는 좀 더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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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하르투리언.  <역사의 요동 - 근대성,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

윤영실, 서정은 옮김, 휴머니티(2006)

 

한국어판 서문에 붙은 부제, "시간, 경험, 파시즘의 유령"이야말로 지금 내 관심과 일치해 눈이 반짝 뜨였다. 하르투니언은 1918년부터 1940년까지 산업화가 진행되던 소위 전간기(戰間期)에 가장 긴급하면서도 어려운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시간>이라 본다. 자본주의 근대화 및 도시 산업화와 더불어 헤겔적 의미에서의 역사로서의 시간이 개념화된 것이다. 이 역사적 시간의 자율성은 동시에 <내적 시간> 개념을 낳았는데, 베르그손(Henri Bergson)으로부터 시작된 과학과 양적 시간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질적 시간의 등장인 것이다. 여기서 시간에 대한 비판은 과학적으로 계량화되는 외적 세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와 노동시간이라는 계량 가능한 추상적 시간 위에 설립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겸하고 있다.

한편, 하르투리언은 베르그손으로부터 시작된 <내적 시간> 문제는 짐멜(Georg Simmel)이 새로운 대도시와 시간의 내면화 경향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에서 루카치는 과학으로서의 철학을 철학의 정치화라는 방식으로 풀어나갔다면, 후설은 순수한 심리적 경험 상태로, 하이데거는 실존을 시간화하는 존재론적 역사성으로 향해갔다.

이들을 질적 시간의 회복이란 공통의 노력으로 계열화시킬 때, 그 근저에는 부르주아의 생산양식이 확립되면서 사회가 합리적 효율성으로 규정되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될 때, 일상적 삶(과 행위) 역시 그러한 산업관리체제에 종속된다는 세계 인식이 깔려있다.

마르크스가 이미 거기에 주목해 19세기에 사회적 관계의 대상화와 노동자의 자본에 소외된 노동을 지적하는 선구안을 지녔다면, 짐멜은 대도시에서 주관세계와 객관세계 사이의 간극에 최초로 주목한 사상가 중 하나로 역사철학적 저작에서 예술(형식)이 삶과 역사의 부조화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짐멜의 제자인 루카치 역시 초기에는 스승을 따라 형식과 예술에 특권적 지위를 되찾아주려 했지만, 맑시즘에 경도 후 문화적 형식과 일상 생활의 분리 현상을 '사물화'로 재해석하기에 이른다. 즉, 사물화 이론을 통해 루카치는 노동자의 의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요구하는 주관과 객관 세계의 분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프롤레타리아가 (사물화된 의식의 분리를 극복하고) 주객 동일성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했던 루카치의 노력이 예술(형식)과 삶을 재통합시키려는 낭만주의적 열정의 반복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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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푸코를 읽을 계획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방학중에 이런저런 일들에 지쳐 수업준비가 너무 늦었다. 그런데도 그 계획을 밀고 나가자니 역시 버겁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를 내가 너무 얄팍하게 본 것이 아닌가 싶은 후회도 들고, 나도 버거운 처지에  학생들에게까지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밀려와 학기초 심경이 복잡하다.

일단 푸코의 저작들 중에서는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권, 이 세 권을 보는 것이 이번 학기 목표다.  물론 다 읽을 수 있는 환경은 아니기 때문에 나의 발제와 학생들의 발제로 구분해서 진행할 것이다. 푸코에 대한 접근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읽을 수 없다는 약간의 과장된 절박함을 가지고 이번 학기의 푸코에 대한 도전이 내 들뢰즈 공부에 어떤 돌파구로 연결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수업에 대한 좋은 해설서, 연구서들은 다음과 같다. 

             

책 이미지 크기가 제각각이라 좀 그렇지만, 의외로 국내에 소개된 푸코에 대한 책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서점에서 구입한 푸코 개설서가 알라딘에 뜨지도 않아 좀 의외였다.

순서대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면,

1) 양운덕 선생이 살림 문고판으로 낸 책으로, 푸코의 권력이론을 이보다 더 쉽고 간결하게 정리한 책은 없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아주 얇은 문고본인 만큼 푸코 사유의 다양한 주제들이나 방법론과 관련한 내용을 얻기는 힘들다.

2) 프랑스의 푸코 연구자가 쓴 연구서로 <광기의 역사>에 대한 입문서로 적합하다고 한다.

3) 드레피스와 라비노우 이후 영미권에서 나온 푸코 연구서로는 가장 정평이 나 있는 연구서들 중 하나로 보인다. 특히 바슐라르와 캉길렘과의 인식론적인 계보를 밝혀준다는 측면에서 다른 연구서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푸코의 방법의 근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4) 들뢰즈의 <푸코> 연구서는 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독창적인 푸코 해석으로서, 푸코 철학를 통해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덧입힌 재해석을 가한다는 면에서 푸코와 들뢰즈 양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앞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푸코에 대한 정리된 생각들을 계속 올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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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해 계속 찔끔 찔끔 다시 보면서 너무나 느리게 글을 다듬고 있다.

물론 두 권 중 더 중요한 책은 당연히 두번째 책이지만, 시간의 문제는 여전히 쉽지 않다.  어떻게 접근하겠다는 방법론 없이 그냥 이 책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자체가 지닌 한계를 절감하다.

들뢰즈의 책들 중에 깊고 넓지 않은 책이 어디 있을까만은 <차이와 반복>, <천의 고원>, <주름> 등을 아우를 만큼 <시네마>는 웅숭깊은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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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님에게 자극 받아 이 참에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쓰기를 한 철학자들의 철학관을 한번 정리할 요량으로 내 딴엔 아주 빠른 속도로 서론격의 몇 줄을 쓰고 책 이미지를 붙이려고 애쓰다가 날아가버렸다. 나는 왜 누구처럼 폼 나게 안 되는거지?ㅠㅠ

그래서 다시 쓴다.

철학자들의 철학관은 단지 그들의 철학하기의 입장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곧 철학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현실 인식과 진단의 물음으로 이행하고, 나아가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철학적 욕망과 생성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철학작들의 철학관이란 단지 그들의 철학적 입장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현실 인식과 정치적 입장과 태도의 차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이런 입장에서는 철학과 정치, 진리와 정치를 구분하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적 태도가 우선 의심스럽게 보인다. 그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도 문제겠지만, 그 의도와 목적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방식이 낳는 결과의 철학적 현실적 효과가 더 더욱 문제가 될 것이다. 아렌트의 방식으로는 하이데거는 정치적 선택과 태도는 문제가 있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은 오롯이 살아 남는다. 물론 이런 방식은 목욕물은 버리고 아기는 남기려는 오랜 서구적 합리성의 일반적인 태도와 일치한다.  여기서 아렌트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히려 아렌트에 대한 나의 의문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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