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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님에게 자극 받아 이 참에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쓰기를 한 철학자들의 철학관을 한번 정리할 요량으로 내 딴엔 아주 빠른 속도로 서론격의 몇 줄을 쓰고 책 이미지를 붙이려고 애쓰다가 날아가버렸다. 나는 왜 누구처럼 폼 나게 안 되는거지?ㅠㅠ

그래서 다시 쓴다.

철학자들의 철학관은 단지 그들의 철학하기의 입장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곧 철학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현실 인식과 진단의 물음으로 이행하고, 나아가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철학적 욕망과 생성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철학작들의 철학관이란 단지 그들의 철학적 입장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현실 인식과 정치적 입장과 태도의 차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이런 입장에서는 철학과 정치, 진리와 정치를 구분하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적 태도가 우선 의심스럽게 보인다. 그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도 문제겠지만, 그 의도와 목적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방식이 낳는 결과의 철학적 현실적 효과가 더 더욱 문제가 될 것이다. 아렌트의 방식으로는 하이데거는 정치적 선택과 태도는 문제가 있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은 오롯이 살아 남는다. 물론 이런 방식은 목욕물은 버리고 아기는 남기려는 오랜 서구적 합리성의 일반적인 태도와 일치한다.  여기서 아렌트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히려 아렌트에 대한 나의 의문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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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Under the Sky of My Africa

날짜로는 어제가 되겠지만 '오늘' 오전엔 강의가 있었고 오후엔 전시회 관람이 있었다. 그리고는 성적처리하는 데 나머지 시간을 꼬박 쏟아부었다. 별다른 개성이나 성의가 없는 답안지/리포트들을 읽는 일은 나름대로 고역이다. 그나마 잠시 마음을 달래준 것은 한꺼번에 들이닥친 책들인데, 학교에 가보니 얼마전 미국과 러시아의 인터넷서점에 주문한 책들과 해외도서관에 주문한 자료, 그리고 복사를 맡긴 책들과 알라딘에 주문한 책들까지 모두 합해 15권의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이번달 북매거진 '텍스트'까지 포함하면 16권이다). 책을 많이 구해보는 편이긴 하나 이 15권은 올해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해마다 나의 장서는 4-500권씩 불어난다).

그 '기록'을 기록해두기 위해서 집에 들고 온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한권을 집어든다. 푸슈킨 연구논문집인 <나의 아프리카 하늘 아래서(Under the Sky of My Africa)>가 그것인데, 노스웨스턴대학출판부에서 올해 나온 책이다(이 대학에선 '러시아 문학과 이론 연구 총서'가 출간된다). 제목에 걸맞게 표지는 까만색이고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의 초상화가 박혀 있다. 그런데, 어인 아프리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푸슈킨의 외증조부가 표트르 대제의 총신이었던 아브람 페트로비치 한니발(1696-1781) 장군이었고 그가 아프리카 노예 출신의 흑인이었다. 족보를 따지자면 러시아 최고 시인에겐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 푸슈킨의 그의 조상을 모델로 <표트르 대제의 흑인>이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여 던질 수 있는 질문. "푸슈킨은 흑인이었고 그게 정말 중요한가?" 이 연구논문집은 러시아와 미국의 정상급 학자들이 그러한 물음에 답한 글들을 모아놓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앤솔로지로서는 최고의 책이다. 분류하자면, 이런 게 나의 '전공서적'이며 이런 류의 책이나 논문들을 읽고 그와 유사한 성격의 논문들을 쓰는 게 나의 '전공공부'이다(아직도 간혹 당신의 전공이 뭐냐고 물어오시는 분들이 있다).   

 

이미 지난 1999년에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국어로 된 푸슈킨 선집이 2종 출간된 바 있다. 그것만으로도 러시아문학 연구자들의 체면은 얼마간 유지된다. 단, 아쉽게 생각하는 건 푸슈킨에 관한 국내 출간 단행본 연구서나 논문모음집이 단 한권도 없다는 것(놀라운 일이지만 이건 톨스토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출간되는 탐나는 연구서들을 구해볼 때마다 마음 한켠에서는 매번 그런 비교를 하게 된다. 2009년에는 사정이 좀 달라지기를 기대하며 나 자신에게도 분발의 채찍질을 가한다.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서'.(점차 인문학은 '니그로의 학문'이 되어 가는 게 아닐까?)

06.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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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파리 - 황성혜의 파리, 파리지앵 리포트
황성혜 지음 / 예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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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 없이 이야기하면 나는 조선일보는 덩종이보다 못하다 생각한다는 말부터 해 두고 보자. 하지만 편견의 시선이 항상 트집만을 잡진 않는다. 나는 좋은 것을 좋다고 이야기하고 문제를 문제로 이야기하는 세계시민으로 살고 싶으니까. 그리고 내 간략한 리뷰는 정말 인상비평에 가깝다고 미리 말해둔다. 책 전체를 보지 않았고, 별점도 내가 본 것에 기초해 단 것이다. (물론 전체를 다 봐야 전체를 안다고 생각지 않는다.)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다시 서경식 씨의 책을 구입하려고 학교 앞 서점에 들렀다. 갑자기 생각이 나 내가 아는 그 분이 쓴 책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마침 여행 코너에 진열되어 있어서 펼쳐드니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분은 60년 대 생이라 동명이인임을 확인했다.  국내 명문 사립대에 그 악명 높은 신문사의 기자 출신에 파리대학에서 과정을 밟았다고 약력은 전한다.

우선 책의 제목은 올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야외상영작이었던 <Paris, Je t'aime사랑해, 빠리>를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었다. 나는 물론 영화를 관람했었고, 이런 저런 비평을 할 수 있겠지만, 10여 명의 작가들이 지닌 시선의 다양한 맥락과 차이들이 좋았다. 저자의 빠리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지 확인해 볼 길 없는 간단 독서를 했기에 뭐라 말할 수 없겠지만 다양한 시선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은 절대적 조건이니 그 영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제목이라 생각된다.

책을 펼치니 화려한 사진들이 눈이 들어왔다. 아트지가 아니니 그것 자체로 나름 파리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별로 읽어볼 생각은 없었지만, 넘기다 보니 스타벅스의 파리 입성 소식이 있었다. 우리사회에서도 여러 문젯거릴 낳았고 지금도 그러니 약간 흥미로운 생각이 들어 몇 군데 읽어보았다.

스타벅스가 문을 연 첫 날 2000명이 몰려왔다고 말하는데서 이 책은 흥분한 리포트의 어조다. 파리지앵 너희들이라고 어찌 환대하지 않겠느냐? 는 듯이..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하지만 대부분 에스프레소를 마치고 '우리 스타벅스'처럼 다양한 메뉴가 구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등등.. 그리고 대학가로 들어가 대학생들을 공략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전형적인 스타벅스의 상술에 대한 소식까지 전한다. 응원으로 들린 것은 정말 나의 편견일까? 그리고 마지막 문장들, 압권이었다. 대충 기억나는 내용을 옮기면 이랬다. 파리에서는 우리 스타벅스가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파리에 스타벅스가 들어간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라는 문장으로 그 꼭지는 끝났던 것이다. 전형적인 조선의 어조가 거기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저자의 약력을 확인했다. 명문대와 조선일보. 그들의 관계에 대해 누군가 한번 책을 쓰면 우리사회의 계급질서와 그에 대한 이데올로기 생산처를 분명히 해부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평소 조선의 어조에 대해 어떤 문제에 대해 대충, 황급히 결론 짓고, 본질에 대해 천착하지 않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런 여행 안내서에서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는 배제되어 마땅하기 때문에 저자는 자신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자.

암튼 나는 마지막 대목을 읽고 실소하며 책을 제자리에 두고 서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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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조이담.박태원 지음 / 바람구두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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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중순, 근 한 달 이상 몸과 특히 마음이 매우 힘들었다. 생산적인 일은 결국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꼬인 상황과 다운된 기분 끝에 억지로 긁어낸 글 한편 끝내고 약간의 휴식 중 선택된 책.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이미 작년, 새로운 서울 생활에 적응하고 계신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던 책이다. 읽어야지 마음 먹었지만, 전공책들 보는 것도 항상 허덕거리며 따라가야 하고, 쟁여둔 책들의 눈길을 반쯤 피하는 주제에 이런 류의 책을 볼 틈은 좀체로 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마련한 틈을 타 이 책과 함께 촌놈(년?)분위기 팍팍 풍기며 KTX 타고 서울에 댕겨왔지..ㅎㅎ

뒷표지를 보라. 철학과 문학에서 모더니즘의 대표자들이 거론되며, 현대문화와 관련된 화려한 용어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 책의 의미와 값어치를 치장하고 있다. 그런데 추천인들이 모두 건축가라는 것이 재밌지 않나?

그것은 물론 지은이의 이력 때문이다.

지은이 조이담은, 1967년 서울생으로 대학에서 건축, 도시계획을 공부했단다. 경력은 한국공간환경연구회(이런 데가 있단 걸 첨 알았다)에서 도시문화와 공간이론에 천착, 80년대 이후 도시의 포스트모던 문화현상에 관한 논문을 냈고,  국책 연구기관에서 주택, 도시, GIS 분야에서 일했으며,  독립 후 <서울 근대공간> 프로젝트에서 참여하는 진귀한(!) 일들을 한 사람이다.

 이런 전문 분야에다가 인문학적 소양을  발휘해서 박태원의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근대문학 속에서 현대적 관점을 지닌 근대사의 추출, 그리고 거기다 자신의 도시학적 식견을 버무려서 이접적인 제3의 영역을 창조했다 할까. 참신한 접근과 작가의 전문성이 탁월하게 결합해서 인문학적 글쓰기의 새로움과 가능성을 엿보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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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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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그토록 돈을 쓰면서도 알라딘에 리뷰를 쓴 기억은 없다. 좀 부끄럽기도 하고 서재를 새로 연다.

어떻게 하다보니 처음 쓰는 페이퍼들이 모두 이탈리아와 관련돼 있다는 게 신기하다.

저자인 서경식씨는 내 개인적으로는 인연이 깊다. 대학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그의 <나의 서양 미술 순례>는 서승, 서준식 형제의 재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실체를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의 간접적인 말을 통해 느끼게 했고,  무엇보다 그 사건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서경식씨와 같은 이들을 알게 했다. 

                 

(*물론 내가 가진 판은 젤 왼쪽에 있는 것이다. 이미지를 가져와보니 이제 서경식씨의 책도 꽤 쌓여간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이야기한 탓에 <청춘의 사신>을 제외하곤 더 이상 구입하진 않았다. 이런 걸 용두사미(?)라고 하나.^^)

그리고 <나의 서양미술순례>를 통해 접했던 미술 작품들은 그때까지 관객으로 피상적으로만 구경하던 미술에 대한 한가지 시각을 갖게 해 주었다. 그것은 한 개인 안팎을 형성하는 역사와 사회적 관계 라는 시선이다. 물론 그것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서경식씨의 예술 에세이가 내게 남긴 것은 무엇보다도 시대나 사회, 즉 한 인간의 환경과 개인이 단절될 수 있다는 나이브한 생각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해 줬단 점이었다. 소위 순수주의에 대한 막연한 경멸한 있었을 뿐인 시절, 순수주의란 기만이란 것을 제대로 인식하게 했다고 할까.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디아스포라로서의 한 생에 접근하는 방식이 이 책의 미덕이 아닐까 한다. 폭력과 살육의 역사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런 책을 바치는 그의 마음은 어떤 간절한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소위 증언문학이란 현재와 같은 시대에 낡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증언하는 그들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자격이 특권적으로 부여되고, 우리는 그 일방성 앞에서  완전히 수동적으로 들어야만 할 뿐이다. 들을 수 있는 능력, 그것만이 그들 앞에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정의'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레비나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증언문학은 우리에게 어떤 삶의 윤리, 더군다나 종래의 윤리를 지속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한 시대상황에서의 윤리를 이야기하고, 우리에게 새롭게 암중모색하게 한다.

브레히트나 잉게 쏠의 책들은 한참 고등학생으로서 87년을 겪었던 내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를 갖게 했다. 빅터 프랑클이나 서준식씨의 글 역시 엄청난 부끄러움을 가지고 그러한 물음을 계속해서 놓지 않도록 해 준 책들이다. 특히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진실한 글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나의 모델이다.     

                         

본론에 충실한 리뷰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사실 프리모 레비의 이름은 들뢰즈의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철학이란 무엇인가?> 1부 4장에 해당하는 Geophlosohie 제목(국역본엔 '지리철학'으로 번역돼 있는데, 한 때는 '지질'이란 번역어가 더 나아 보인 적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영토 territoires ' 개념이 공간적 구획이란 의미 이상의 어떤 국지화된 영역을 가진 것들 사이의 강도적 힘들이 표현하는 차이의 운동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의 장에서 프리모 레비를 언급하고 있다.

소위 독일 철학, 영미철학, 프랑스철학 등으로 영토화되는 철학의 보편성을 우리는 쉽사리 받아들인다. 들뢰즈는 그러한 보편성의 구축이야말로 <세계적 자본주의의 엄청난 상대적 탈영토화가 현대국가에서 재영토화를 필요>로 하는 방식과 유사한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들뢰즈의 진단은 철학은 그리스에서부터 도시라는 시장의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 철학과 자본주의의 관계란 뭐냐? <철학은 자본의 상대적 탈영토화를 절대에로 이끌며, 자본이 무한한 운동으로서 내재성의 구도 위에 펼쳐지도록 만들고, 내적 제한의 자격으로 자본을 제어하고, 자본을 새로운 땅, 새로운 민족에게로 이끌기 위해 자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거스르며 돌아서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조건을 통해 철학은 유토피아에 대한 발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란 뭐냐? <철학이 정치적이 되고, 시대에 대한 비판의 최고의 경지로까지 이르게>되는 것은 이 유토피아라는 무한한 운동과 함께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철학이, 보편적인 민주국가라는 허울의 실제 내용인 시장 자본주의로 재영토화되어 복속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무한한 탈영토화의 운동 속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운동의 한 유형으로서 프리모 레비는 있다. 인간이라는 수치(아우슈비츠로 대별되는 사건을 막을 수 없었다는 , 또한 거기서 살아남았다는)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해 세계에 대해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이란 것이다.

실제로 프리모 레비에 대한 글은 최근 출간된 두 책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를 통해 다시 세부적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서경식 씨의 책은 우리에게 보다 복합적으로 읽힌다. 먼 아우슈비츠와 80년 광주, 그리고 서승/서준식이라는 수형인들을 만든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그들 각각의 삶, 그들을 바라보며 만나는 한 디아스포라로서의 서경식의 실존 등등.  그래서 그 모든 사건들은 우리에게 실제로 외친다. 기억하라고, 사유하라고. 그리고 일상 속에서 변형될 것을..

다만 번역이 크게 정성들인 것 같지는 않다. 한겨레에 연재되는 서경식 씨의 글을 보면 그리 논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번역자가 세심하게 배려했다면 저자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쓰기 스타일을 살릴 수 있었을텐데 간혹 아귀가 맞지 않는 글들이 나열된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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